
좋아하는 영화들은 늘 제자리에 있어서 언제든 원할 때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잊히는 영화도 많다. 대신 사소한 디테일들로 연상되거나 산만한 의식의 흐름을 그저 따라가다 보면 다시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다. 그렇다고 그 영화가 갑자기 새로 좋아지거나 특별해지진 않지만 그 비켜났던 길에서 조금은 다시 내 영역으로 들어온다.
양영화 얘기를 하며(https://ashland.tistory.com/m/559060)
양머리 생각을 많이 했는지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많은 부분이 잊힌 가운데 그 짧은 장면이 떠올랐다는 것은 어쩌면 내 무의식에는 의외로 강하게 인식됐다는 증거일 거다. 꿈을 꾸고 나면 내가 신경 쓰는 것이 뭔지 좀 더 선명해지고 계단에서 맡은 음식냄새가 아주 의외의 오래된 기억들을 소환하는 것처럼.
클레어 드니의 <화이트 머테리얼>. 외진 농장에서 고독하게 자연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아이슬란드인과는 또 다른 형태의 생존이 펼쳐지는 아프리카 어딘가가 배경이다. 작고 깡마르고 창백한 이자벨 위페르가 이끌고 지나가던 장면들을 대충 떠올려본다. 홑겹의 반팔 원피스와 샌들, 신경 써서 발라보는 립스틱, 검은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지붕 없는 트럭, 붉은 커피열매를 씻기 위해 수로로 쏟아지는 맑은 물들. 듣기에는 따사롭고 평화롭다. 추위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적정량의 습도와 기온이 전해지는 풍경은 퇴폐스러울 만큼 안락하다. 아프리카 시골에 사는 프랑스 여자라면 아마 밥은 굶지 않고 다닐 거라는 편견이 끼어든다.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우리는 늘 풍경에 속는다.

영화는 불안하고 긴박하다. 멀쩡한 길 한가운데 구식 소총을 든 사람들이 통행료를 요구하고 약국 앞에는 경비병들이 서있다.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놀아야 할 어린아이들이 칼이나 총을 들고 거리를 배회하고 사람들의 눈을 채운 것은 분노 아니면 공포이다. 그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부터 오래도록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적어도 뿌리를 내렸다고 생각하는)살아온 프랑스인들, 대대로 그 하얀 피부의 정복자들에게 협력하거나 착취당하면서 복종과 불복종 사이에서 갈등하며 순응하거나 증오를 키우며 자라온 토착민의 후손들, 누군가로부터 지원받는 구식 무기를 들고 잃을 게 없다는 표정으로 시내를 활보하는 반군들과 그들을 소탕하려는 잔혹한 군부, 그리고 아프리카와 프랑스 그 어느 쪽에도 동화되지 못한 나약하고 수동적인 어린 프랑스인.
아프리카에서 커피 농장을 운영하는, 각자 따로노는 프랑스인 '비알'가족. 늙고 병든 아버지는 하루 종일 넓은 집을 배회하고 아들은 아프리카 여인과 딴 집 살림을 차리고 나라를 뜰 궁리에 마음이 급하고 그의 부인은 커피 농장을 살려보겠다고 혼자 애를 쓰지만 동네 실세와 마리화나를 피우며 현실 에서 도피하고 그녀의 과보호로 자란 아들은 이렇다 할 자신의 삶이 없다.
살육을 일삼는 군부와 반군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러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 식민지 국가에 남아 커피 농장을 운영하는 정착민 프랑스인은 과거처럼 부유한 지배자의 행세를 하기엔 너무 소수이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노년을 맞이한 사람에게 아마 프랑스 본토는 고향이라는 개념과는 동떨어진 어쩌면 아프리카보다 더 먼 이국이다. 언젠가 '열등한 민족이 사는 슬픔의 땅'이라 규정한 그곳을 신식 군대를 가진 백인들이 휩쓸며 들어왔고 본토 자국민에게는 이곳이 기회의 땅이라 설득하며 이주시켰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후손이 정착하여 토착민처럼 뿌리를 내릴 수 있을거라 생각했겠지만 그곳에 박해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살아남아 뿌리 내릴 토착민의 생명력은 간과한다.

착취당한 수동적인 유전자도 탄압에 반항하는 급진적이고 공격적인 유전자도 대대로 되물림된다.하지만 결국 그곳에 뿌리를 내렸고 그곳에서 일종의 '문명'이란 것을 이룩했던 사람들의 세계를 결정짓는 특유의 질서는 결국 침략자와 정복자들을 밀어낸다. 최소한 이 영화에서는. (지금의 아프리카를 보면 결코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아마도 토착민의 불굴의 의지와 애국심은 다른 대지를 점령하고 학살하고 완전한 박멸, 최종 해결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됐던 수많은 말살의 동기가 되었을 거다. 인간은 저마다의 강함과 악함으로 끈질기게 겨루며 살아남는 존재이고 그것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가는 그 시간에 이끌려가는 사람들이 아닌 오랜 시간이 지나 후세의 사람들만이 판단하는 영역이다.
마리아 (이자벨 위페르)는 내전이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커피 수확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일꾼들은 앞다투어 달아난다. 아무도 백인의 커피 농장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걸지 않는다. 남편 (크리스토퍼 램버트)은 영악한 시장에게 커피 농장을 헐값에 넘기고 실세인 그가 뒤를 봐주는 동안 안전하게 이 나라를 떠나려고 한다. 마리아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 커피콩을 씻고 말리는 일에 마음을 쏟는다. 주변 사람들 모두 이곳을 떠나라고 하지만 그곳은 그녀에게 삶의 터전이자 자기 자식의 고향이다.

마리아는 간신히 일꾼들을 찾아 수로에 물을 흘려보내고 커피열매가 담긴 자루들을 풀어넣는다. 그리고 붉은 열매에 뒤섞인 잘린 양의 머리를 발견한다. 아마도 이제는 마지막 경고라고 해도 좋을 이 땅을 떠나라는 강력한 메시지였을 것이다. 이 장면은 색감이 풍부하지 않은 이 영화에서 피의 이미지와 이제 막 수확한 싱싱한 붉은 커피 열매와 합쳐져서 그 어떤 장면보다 강렬하다.
하지만 그는 담담하게 양머리를 들고 가서 그 땅에 묻어준다. 마치 나는 떠나 온곳이 없어서 여길 떠날 수 없고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하는 이곳 사람이라는 듯이. 하지만 삶에 대한 그녀의 의지와 생명력과는 상관없이 그는 하얀 피부에 금발, 파란 눈을 한 이방인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창고 안으로 숨어든 부상당한 반군의 지도자를 그대로 놔둔다. 그것은 단지 부상당한 인간이기에 숨겨줄 뿐이지 그것엔 어떤 정치적 동기도 없다. 하지만 실제 세상에선 그가 숨겨준 사람이 누구이고 그를 숨겨준 사람의 피부색이 중요할 뿐이다.
그 시간 아들 마누엘은 반군 아이들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머리카락이 잘린다. 그는 이미 정복자의 유전자라고는 전혀 남아있지 않은 수동적이고 배부른 게으름뱅이일 뿐이다. 그는 머리를 삭발하고 총을 들고 오토바이를 끌고 아무런 동기나 원칙도 없이 그저 반군 아이들의 무리에 합류하려고 시도한다. 자기 집 식량창고를 털어 굶주린 반군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마치 정의의 편에 선 듯 스스로에게 취한다. 하지만 그것은 광적인 약탈이 진행되고 있는 순간에만 가능한 일이다.

농장을 지켜내려는 작은 체구의 여성, 마리아의 집념에 집중하면 그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처럼 어떤 역경도 이겨내고 결국 직접 수확한 커피를 마시는 장면으로 이 영화가 끝나는 것이 정당하고 적당할지 모르지만 시대착오적인 결말이 될 것이다. 사실상 결말은 참혹하다. 아마도 돈 많은 사람들, 아프면 돈을 내고 약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 존재했을 약국을 약탈하고 반군에 가담하는 아이들은 정체불명의 약을 사탕을 먹듯이 나눠먹는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잠이 든다. 살육에 익숙한 군부는 욕조에도 침대에도 널브러진 채 잠든 아이들을 소리 없이 칼로 찔러 죽인다. 마리의 남편도 아들도 전부 죽고 그녀는 농장을 팔아버린 시아버지를 죽인다. 사실상 영화는 이 엔딩을 영화 시작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필름을 되감듯 과거로 돌아간다. 누구든 남의 대지에 침략하는 자의 결말을 결국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마리아가 계속 그곳에 남으려는 이유는 뭘까. 그곳에 남아 결국 뭔가를 이루겠다는 야망일까 아니면 살아온 터전에 대한 집착이자 생명력일까. 아니면 대대로 늘 그래왔던 삶이었기에 그 이상의 삶을 계획하는 상상력이 없었던 걸까. 하지만 그 모든 생명력은 아직 금고에서 달러뭉치를 꺼낼 수 있고 인력을 조달할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되는 순간에만 발휘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그 대지를 사랑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삶을 사랑해서라면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다. 커피 농장을 손에 넣은 사설 군대를 가진 시장을 위해 일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의 마음을 얻어서 다른 방식으로 뿌리내릴지도 모른다.
*이자벨 위페르는 프랑스에서는 보기 불편한 영화를 많이 찍는 배우이다. 그리고 나는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이자벨 위페르를 좀 더 좋아한다. 이 영화에서 입는 의상이 홍상수 영화에서 입는 의상들과 스타일이 비슷하다. 사실상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커피 농장을 꾸려가는 강인한 여성이 입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의상이다. 옅은 색감의 얇은 원피스는 마치 부유한 식민지 정착인의 고명딸이 입는듯한 옷이지만 비슷한 옷을 입은 홍상수의 '여름'영화 속의 이자벨 위페르는 소박하고 아직 꿈꾸는 소녀, 멋모르는 이방인의 인상으로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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