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의 영화 Bird. 2024년에 본 영화 중에서 단연 가장 좋았던 영화이다. 좋은 영화는 보통 3가지 이유로 좋다. 1) 영상 자체가 아름답거나. 2) 내용이 훌륭하거나. 3) 전에 본 적 없는 형식이거나. 그리고 이 조건들을 전부 충족시키는 영화들이 드물지만 항상 나타난다.
얼마 전 '7세 고시'라는 테마의 다큐를 우연히 봤다. 때맞춰 10대 임산부에 대한 기사도 읽었다.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어도 행복 유지가 가능한 평범한 아이들이 선택의 여지없이 가혹한 시스템으로 내던져지는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문득 생각났다.

영국 남부 바닷가 지방 켄트. 더 내려가서 도버 해협을 건너면 프랑스로 연결되고 아마도 육로로 가장 멀리 가려고 한다면 닿을 수 있는 곳은 스코틀랜드 정도일 거다. 내가 본 영화들 속에서 바닷가 도시는 주인공들이 늘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장소이자 고립을 자처하고 뛰어드는 감옥 같은 공간인 경우가 많았다. 영국이나 아일랜드 영화 속에선 더더욱 그랬다. 이 영화 속의 바다는 예외이길 바랬지만 역시 안타까운 사람들이 대거 등장한다.
12살 베일리(니키야아담스)는 서른도 채 안돼 보이는 아빠 버그(배리 키오건)와 이복 오빠와 함께 산다. 아이들은 적절한 돌봄의 부재 속에서 잠들 때까지 전화기와 한 몸이 되어 또래들과 떼를 지어 도시를 누빈다. 베일리의 엄마는 베일리의 또 다른 이복동생들 세명과 따로 산다. 엄마의 알콜중독자 남자친구는 강아지를 때려 죽일만큼 폭력적이다. 공포에 떠는 동생들을 가끔 찾아와 들여다보는 것 말고 12살 소녀 베일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베일리의 10대 이복 오빠 헌터(제이슨 부다)는 그의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미성년자 아빠가 될수도 있는 상황에 놓인다. 그는 14살 여자친구와 스코틀랜드로 도망쳐서 아이를 낳겠다고 한다. 그의 스마트폰 배경 화면에는 갓 태어난 그를 가슴에 안고 있는 엄마의 사진이 저장되어있다.
그들의 젊은 아빠 버그는 일주일 후에 있을 또 다른 여인과의 결혼식 준비로 들떠있다. 그는 콜로라도의 두꺼비 한 마리가 결혼식 비용을 마련해 주기를기대한다. 두꺼비에서 분비되는 점액질을 환각제로 비싸게 팔 수 있다는 생각에 두꺼비를 최적의 상태에 이르게 하기 위한 기적의 음악을 찾는다.

버그를 비롯한 영화 속의 어른들은 대부분의 시간 뭔가에 취해있다. 그들은 버젓이 알몸으로 깨어나서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10대 출산은 이 동네의 전통인가 싶을 만큼 만연하고 아이들은 야생동물처럼 스스로 자라난다. 영화를 보자마자 나는 영국의 기본소득이나 실직연금, 아동수당, 저소득층 지원, 미성년자 보호법 같은 키워드를 검색창에 집어넣으며 이들이 이런 상태로도 연명가능케 하는 실제 사회 제도들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납득시켜보려 했다.

이 영화는 사회고발적이며 불편하리만치 직설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초현실적이며 몽환적이다. 이런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이것이 현실이라고 믿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곧 깨어날 악몽에 불과하다고 믿으며 어딘가에 있을 희망을 발견하려 애쓴다.
핸드헬드 카메라가 지저분한 바닷가 도시를 정신없이 뒤쫓으며 정신질환을 앓는듯한 불안정한 사람들의 몸짓과 격앙된 어조 사이를 거칠게 파고들때 우리는 고요한 석양과 따뜻한 파도, 잠시나마 행복에 젖는 아이들의 미소, 날개짓하는 새와 나무, 흔들리는 수풀의 푸른 이미지들이 마치 로모 카메라로 박제된 스냅샷처럼 불쑥불쑥 등장하는 것에 안도한다.
십 대 소녀의 손바닥 안에서 촬영버튼이 눌려진 채 그녀의 하루를 여과 없이 담아내는 몰래카메라 같은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이 모든 장면들이 결국은 잘 성장한 베일리의 회상이길 은근슬쩍 바란다. 언제든 다시 떠오르는 태양과 다시 밀려오는 파도들이 그녀의 어린 시절의 결핍들을 깁고 기워서 결국 그녀의 손바닥 위에 마지막까지 남는 모래알엔 아름다운 기억들이 가득 차있기를 바란다.
버그(배리 키오건)는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소외된 존재이다. 10대때 이미 '제대로 키우지도 못할' 아이를 줄줄이 낳은 이 '아이'는 자기가 가진 형편없는 조건 속에서 위태롭게 아이들을 보듬는다. 그는 어설프게나마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하는 존재의 힘'을 믿는다. 그러면서 버그는 아이들에게 도리어 보호받는다. 그는 아이들이 자기를 외면하지 않고 결혼이라는 그의 새 출발을 함께 반겨주길 원한다. 버그는 아이들이 없었으면 훨씬 편했겠지만 그들을 사랑한다고 진실되게 말한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를 부모의 입장에서 봐야 할지 10대의 나로 돌아가서 봐야 할지 보는 내내 고민했다. 그리고 아이를 어떻게 저렇게 키우냐고 주제넘게 삿대질할뻔한 손가락을 간신히 밀어 넣으며 10대의 내가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며 별 걱정없이 자랄 수 있었던 평범한 환경을 떠올렸다.
이 영화에서 부모와 자식의 경계는 아주 흐릿하다. 이들은 함께 성장하고 서로를 키운다. 부모에게 충분한 관심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엄마와 아빠가 달라도 끈끈하게 연대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덤덤하게 그려진다. 베일리는 주변을 보살피기엔 자신이 아직 연약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모두의 양육자이다.

숲 속을 정처 없이 걷는 베일리 앞에 나타난 버드(프란츠 로고프스키)는 떠돌이 구원자의 느낌을 풍긴다. 그는 종이쪽지 하나를 들고 자신의 부모를 찾으러 이 낯선 도시에 도착한다. 베일리는 그가 풍기는 신비스런 분위기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가 부모를 찾는 여정에 기꺼이 동행한다. 그들이 찾아낸 버드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그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 역시도 10대 때 낳아서 제대로 키워본 적 조차 없는 아이를 기억할 리 없다.
버드는 베일리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기차 여행을 떠난다. 마치 그가 지금까지 기댈 수 있었던 다 구겨진 종이쪽지처럼 그 여행이 어떤 식으로든 모두에게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을 거라고 확신한다. 버드는 베일리의 환상이자 날개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따뜻하고도 겸손한 구원자의 표정으로 베일리와 작별할 때 우리는 베일리의 눈에 꽉 들어찬 상징에 안도한다.

많은 영국의 영화 감독들이 자신들의 영화에 전성기 브릿팝의 지분을 남겨두길 원하는 것처럼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이 영화는 <트레인스포팅>의 리듬 위에 밀레니엄을 맞이한 브릿팝의 화음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폭주하다가 별안간 테렌스 맬릭의 영화 같은 몽롱한 기어를 넣어 속도를 조절한다.
결벽적인 런던의 엘리트 보다는 맨체스터 젊은이들의 깡에 좀 더 헌정되는 영화이다. 영화 속 사람들은 빈민가에서 태어난 유럽 축구 영웅의 드라마틱한 인생사를 선망하기라도 하듯 유럽 소외계층의 젊은이들이 대개 그렇듯 하나같이 스포츠 브랜드를 경쟁적으로 걸치고 있다.
이 영화의 절정은 두꺼비에서 분비물을 채취하려면 두꺼비의 마음을 움직일 가슴 저리고도 진정 어린 음악이 필요하다며 콜드플레이의 옐로우를 떼창 하는 장면과 스코틀랜드로 떠나려던 아들을 플랫폼에서 저지하고 버브의 럭키맨을 부르며 도시를 누비는 장면이다.
늘 한 손에 맥주를 쥐고 온갖 자극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을 보고있으면 한심하고 막막하지만 결혼식에 아내가 원하는 디제이를 초대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철없는 친구의 말에 힐난 대신 진심을 다해 함께 노래를 불러주는 이들의 모습에선 분명 가슴이 먹먹해지는 부분이 있다.

짐작컨대 버그(배리 키오건)는 2000년을 전후로 출생했고 그의 부모세대는 십 대 때 브릿팝의 황금기를 누렸을거다. 콜드플레이가 혜성처럼 등장한 2000년 조차 버그의 세대에겐 너무 옛날 일이다. 부모세대의 음악 취향을 부정하며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우리는 늘 같은 음악에 머무르며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고 자조할무렵에야 다른 세대의 정서를 들여다볼 여유가 가진다. 애써 그 시간을 거스르려 하지 않아도 그런 시간은 결국 찾아온다.
전동 킥보드에 나란히 올라탄 아이들이 버그에게 왜 할아버지가 들었던 음악을 트느냐고 의아해한다. '듣다 보니 생각만큼 나쁘지 않아, 나이 들었나 봐'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런 이유로 참 재치 있다.
나는 <솔트번>에서 전라로 춤추던 배리 키오건도 <이니셰린의 밴시>(이 영화에서 그는 가정폭력을 겪다 자살하는 아일랜드 섬마을 아이로 나온다) 속의 배리 키오건도 사실 너무 작위적이다 생각했지만 이 영화의 버그는 내가 상상했던 이 배우의 캐릭터에 가장 근접했다.
솔트번의 Murder on the dancefloor 댄스 장면이 내심 오글거림을 감내하게했다면 두꺼비를 향한 송가, 그가 중심이 된 옐로우 합창 장면은 배리 키오건의 음악연기인생력을 최고치로 끌어올렸다.
베일리와 헌터, 아동 학대 상태에 놓여진 더 어린 동생들이 어떻게 자라날지를 상상하는것은 사실 좀 두렵다. 자유와 방종, 타락과 순수가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는 공간에서 이들은 부모의 실수를 더 확장해서 반복하고 완전 연소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훨훨 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날지도 모른다.
별이 너를 위해 빛나고 있다는 위안을 받은 두꺼비가 정말 귀한 것 (그것이 설령 금전으로 치환되는 가치라고 해도)을 만들어낼거라 믿는 순진함을 가진 우리라면 그런 인간의 진심과 사랑이 단 한명의 타자에게라도 왜곡없이 전달된다면 그것은 그에게 날개가 되고 별이 될 수 있을까. 버드가 베일리에게 그랬던것처럼 우리가 누군가를 힘껏 안아줄 수 있을때. 버그가 말 못하는 양서류에게 그랬던것처럼 우리가 누군가를 안은채 감동적인 노래를 불러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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