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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더 캐니언 (Gorge, 2025)-리투아니아어하는 안야 테일러 조이

 

리투아니아 병무청



지난 2월 16일은 리투아니아의 독립기념일이었다. 평소처럼 동네의 리투아니아 병무청 입대 독려 문구를 보며 귀가했다. 주거지의 크리스마스 조명들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병무청의 창가를 휘감은 노란 램프의 조명들은 쓸쓸하게 여전히 거리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날 새롭게 업로드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위플래쉬>의 마일즈 텔러와 <퀸스갬빗>의 안야 테일러 조이가 이마를 맞대고 있다. 레비(마일즈 텔러)는 특급 스나이퍼들의 서사가 늘 그렇듯 잃을 것 도 지켜야할 것도 없는 고독한 미국인 특수 요원으로 나온다. 그는 악몽을 꾼 다음날 아침 언제나 그렇듯 여자 상사의 사무실로 불려 나간다. 예상대로 국제통화기금 총재처럼 엄격하지만 우아하게 나이 든 고위 공무원 시고니 위버가 기다리고 있다. 촌각을 다투는 비밀 단체의 고위관계자들은 언제나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헤어스타일로 창밖의 마천루를 감상하며 목숨을 걸고 중대 임무를 수행해 줄 직원들을 기다리는 법이다. 30년 전만 해도 이런 인물들은 어느 정도는 매력적이었다. 미션 임파서블에서 톰 크루스를 상대하던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그 시작이다. 희대의 답정녀인 이 여성 상사들은 늘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어떤 대답을 해도 일개 직원들은 사지로 가게 되어있다. 그렇게 레비(마일즈 텔러)도 눈이 가려진 채 헬기를 타고 알 수 없는 장소에 도착해서 1년 계약제 업무를 시작한다. 
 
 

왼쪽은 내가 지킬게, 오늘쪽은 네가 지켜...

 
협곡 건너 반대편의 감시탑에도 또 한 명의 유능한 스나이퍼 드라싸(안야 테일러 조이)가 도착한다.  Drąsa는 '용기'를 뜻하는 리투아니아어이다. a 로 끝나는 여성명사이므로 여성 이름에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실제 리투아니아인이 이 단어를 이름에 사용하는 경우를 아직까진 본 적이 없지만 냉철한 스나이퍼 이미지와 결합돼서 이 영화 속에선 의외로 자연스럽고 그럴싸하게 들렸다. 
 
1년간의 임무를 끝내고 레비(마일즈텔러)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기지를 떠나는 전임자는 집에 간다는 생각에 잔뜩 부풀어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우리 모두가 그의 운명을 안다. 그는 헬기가 내려준 로프를 붙잡고 암호를 말하는 즉시 비밀보장을 위해 공중사살된다. 이쯤 되면 이들의 (국가 혹은 기관) 정체와 협곡 아래에 있다는 '텅 빈 존재'에 대한 궁금증도 커진다. 
 
 

 
 
 레비는 방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협곡으로 차례대로 차출되었던 전임자들이 남긴 의미심장한 메세지가 빼곡히 찬 벽을 발견한다. 스탈린과 루스벨트와 처칠이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사진도 함께이다. 각각의 메시지를 일종의 지령처럼 해석해 보았다.
 
'위험을 감수하고 멀리 가는 사람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 빨리 협곡 아래로 내려가라.실체를 회피하지 말라.

'만약 네가 외롭다고 느낀다면 형편없는 동반자를 가졌기 때문이다.' - 빨리 건너편 요원을 만나러 건너가라. 전통적인 적과 친구 되기를 주저하지 말라.

'참을 수 없는 현실을 제외한 모든 것이 위험한 현기증에 불과하다' - 잡생각 집어치우고 감자 보드카나 증류하라.마셔라..
 
가진 게 시간뿐인 레비(마일즈 텔러)와 드라싸(안야 테일러 조이)는 급기야 망원경을 통해 달달한 스케치북 소통을 시작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레비는 성능 좋은 와이어건으로 로프를 쏴서 반대편에 도달한다. 이들은 각자의 보드카를 나눠 마시며 (이러나저러나 러시아 보드카가 최고라는 전형적인 대사도 빠지지 않는다) 근무계약조건을 위반하며 자유롭게 왕래한다. 춤을 추자는 드라싸를 레비는 춤 못 춘다고 계속 거절하는데 정말 마일즈 텔러가 실제로 춤을 못 춰서 라라랜드에 못나온건가 순간 생각했다. 그리고 레비가 드라싸 쪽으로 이동하다 '텅 빈 사람들'의 공격을 받고 로프가 끊어지면서 이 둘은 얼떨결에 베일에 싸인 협곡으로 들어간다.
 

 
 
레비와 드라싸는 협곡 아래에서 여러 괴생명체들을 만난다. 반지의 제왕에서 호빗을 업고 산을 누볐던 엔트의 인자함이 그리울 만큼 다짜고짜 공격부터 하는 포악한 나무 인간부터 거대 개미와 진드기 식충 식물까지. 이들의 풍채와 공격 속도는 느낌상 왕좌의 게임의 화이트 워커만큼 강력해 보인다.

그리고 이 둘은 정글에 휩싸인 황폐한 실험실에서 영상 하나를 발견한다. 이곳에서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개발과 맞물려 생화학무기 실험이 진행됐었고 지진으로 실험공간이 파괴되면서 인간의 유전자가 식물, 동물, 벌레 등의 유전자와 결합하면서 돌연변이가 생겨나는 중이라고 변이 중인 제약회사 연구원이 이실직고하는 영상. 
 
'텅 빈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행운조차 누리지 못하고 빈 껍데기가 되어 협곡을 떠돌며 속삭이는 존재이다. 어쩌면 한번도 확인받을 기회조차 누르지 못하고 사장되는 진실들이다. 주인공들이 그 흉측한 돌연변이들에 맞서 싸우지만 악랄한 악당 같다기보다는 그냥 세기의 피해자로 느껴진다. 연구원이 남긴 영상을 발견하기 전까진 협곡에 갇힌 사람들이 버려진 전쟁 포로나 여러 다른 경로로 학살당한 사람들이거나 방사능 피폭 환자 일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텅 빈 사람들'은 결국 그 어떤 인류의 추모와 반성으로도 없어지지 않는 비극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극중 리투아니아 도시로 나오지만 실제 촬영지는 노르웨이나 잉글랜드 어디쯤으로 보이는 도시.

 
안야 테일러 조이의 전직 KGB요원이었던 리투아니아 아빠를 둔 리투아니아인이다. 이 두 배우가 리투아니아어를 하는 장면이 몇 군데 나온다.

드라싸가 감시탑에서 혼자 생일을 축하하며 부르는 리투아니아 생일 축하송  'Ilgiausių metų' 의 일부는

긴긴해, 오래도록 살기를~아자, 아자, 아자
Ilgiausių metų ilgiausių, ilgiausių metų ilgiausių~valio valio valio.


사실 리투아니아인들도 대개는 전 세계인이 부르는 그 생일 축하 노래의 리투아니아어 버전으로 부르며 생일 케이크 촛불을 끈다. 이 노래는 내 경험상 중장년층이 모인 생일 파티에서 각자 춤추고 즐기다가 파장 분위기에서 떼창으로 부르는데 좀 알딸딸한 상황에서 떼 지어서 부를때 그 특유의 느낌이 산다.
 
협곡에서 드라싸가 돌연변이 나무 인간을 향해 건네는 한 마디도 리투아니아어. 
 
너한테 그나마 남아있는 그 흉측한 얼굴을 잘라버리겠다!
Nupjausiu tavo šlykštaus veido. Tai kas liko 
 
그리고  극 초반에 리투아니아 도시 페르발카( Pervalka)의 묘지에서 아빠와 만나서 리투아니아 맥주 쉬비투리스를 마시며 얘기하는 장면이다. 이 아빠는 영어 억양이 섞인 꽤 긴 리투아니아어 대사를 쏟아내는데 그중 결정적인 대사가,
 
Tu ne rusė o lietuvė. 
'넌 러시아인이 아니라 리투아니아인이다' 
 
다양의 형태의 작품 속에서 리투아니아가 종종 등장해왔지만 이 영화에서는 작정하고 등장하는 느낌이 있다. 사실 드라싸가 리투아니아인 아빠의 뒤를 이어 러시아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좀 떨떠름하다. 리투아니아 인접국 벨라루스 출신이었다면 좀 더 자연스러웠을 거다. 하지만 '너는 러시아인이 아니라 리투아니아인'이라고 큰소리쳐놓고선 미국인 비밀 요원으로 나온다면 사실 그것 또한 상당히 찝찝한 설정이다. 하지만 전체 병력이 2만 명이 채 되지 않는 리투아니아가 과연 다른 국가나 기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전이든 휴전이든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힘이 센 나라들은 계획했던대로 원하던 바를 얻을거고 어디든 다음 타자가 될 수 있다. 선택의 여지없이 치고 박게 만든다음 그들이 구원투수로 나타나서 생색낼 수 있는 나라는 어디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한눈에 다 들어오는 세계 전도 속에선 잘 보이지 않지만 발트해에 접한 유럽 지도를 확대하다 보면 발트해로 삐죽 튀어나온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에서 각각 위아래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로 흔들 다리처럼 끊어질 듯 아슬하게 이어지는 사주가 보인다. 최대한 길게 늘어뜨린 지우개 반죽같기도 하다. 쿠로니안 사주는 유네스코 자연 유산으로도 지정되어 있는데 영화에 나오는 리투아니아 도시 페르발카는 이 사주에 속한 작은 도시이다.

세계대전 이야기가 나오면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발트해 연안도시가 세 곳 있다. 단치히, 쾨니히스베르크 그리고 메멜. 지금은 각각 '그단스크, 칼리닌그라드, 클라이페다'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 발트해에 닿는 관문이자 13세기부터 대대로 독일 기사단과 동프로이센의 지배를 받는 독일령이었던 이 도시들을 빼앗길까 독일은 굉장히 전전긍긍했다. 그리고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고 현재는 각각 폴란드, 러시아, 리투아니아령이 되었다. 
 

 
 
지도에서 붉은 부분은 폴란드령, 노란 부분은 리투아니아령, 중간의 보라색은 러시아땅이다. 드라싸 가 아빠와 맥주를 홀짝였던 페르발카도 보인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생뚱맞게 알 박기를 하고 있는 러시아 월경지 칼리닌그라드는 그렇다 치고 칼리닌그라드에서 연결되는 사주는 흡사 러시아가 벌린 양팔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한 짝씩 마지못해 붙잡혀 있는 형상이다.

언젠가 페르발카(Pervalka)에서 자전거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연결되는 도시 니다(Nida)에서 소나무숲에서 버섯을 따다가 엉겁결에 러시아령으로 넘어간 적이 있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가장 큰 사구의 전망대에 오르면 러시아땅이 바로 보인다. 쉽게 나지 않지만 어디에서든 나려고 하면 또 계획대로 나고 마는 것이 전쟁이라면 그나마 백 년이란 세월이 흐르는동안 배운게 있어서 민간인 학살이나 특정 부류의 절멸 같은 비문명적인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겠지 생각할뿐이다.

드라싸가 계속 리투아니아인으로 남길 바라며 리투아니아인이 드라싸의 이름처럼 용기를 잃지 않길 바라며 리투아니아인 안야 테일러 조이 덕에 영화 이야기를, 영화 핑계를 대고 리투아니아 이야기를 짧게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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