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907) 썸네일형 리스트형 더 캐니언 (Gorge, 2025)-리투아니아어하는 안야 테일러 조이 지난 2월 16일은 리투아니아의 독립기념일이었다. 평소처럼 동네의 리투아니아 병무청 입대 독려 문구를 보며 귀가했다. 주거지의 크리스마스 조명들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병무청의 창가를 휘감은 노란 램프의 조명들은 쓸쓸하게 여전히 거리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날 새롭게 업로드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의 마일즈 텔러와 의 안야 테일러 조이가 이마를 맞대고 있다. 레비(마일즈 텔러)는 특급 스나이퍼들의 서사가 늘 그렇듯 잃을 것 도 지켜야할 것도 없는 고독한 미국인 특수 요원으로 나온다. 그는 악몽을 꾼 다음날 아침 언제나 그렇듯 여자 상사의 사무실로 불려 나간다. 예상대로 국제통화기금 총재처럼 엄격하지만 우아하게 나이 든 고위 공무원 시고니 위버가 기다리고 있다. 촌각을 다투는 비밀 단체의 고위관계자.. 카페의 히든트랙 바리스타가 본격적으로 커피를 내리기 전 커피잔을 세팅하기 시작하면 나는 나대로 옆으로 비켜나 투명잔에 물을 담는다. 카페인으로 연결된 우리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풍경의 전형...ㅋ 마지막 트랙이 끝난 후에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씨디 플레이어속의 디스크를 마주하고 우리는 언제 어떻게 갑자기 솟구칠지 모르는 숨겨진 사운드를 가늠하며 볼륨키를 확인하곤 했다. 빈 커피잔 옆의 반쯤 채워진 물 잔이 남기는 여지만큼 황홀한 것이 있을까. 다 마신 커피는 언제든 카페를 떠나도 되는 이유가 되지만 언제나 조금 더 우리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은 물 잔이다. 기대할 것이 많지 않았던 우리가 그토록 열광했던 것, 더 매달리게 하는 것이 언제나 히든트랙이 된다. 공연 전의 커피 산타 모자를 쓴 아저씨가 극장문을 열고 나와 배우가 몸이 안 좋아서 연극이 취소됐다고 미안해했다. 세상에 많은 공연이 있다. 감동적인 공연, 형편없는 공연, 두 번째 보는 공연, 꿈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은 공연,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공연, 절대 봐선 안된다고 말리고 싶은 공연, 그리고 취소된 공연. 이들 중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장담할 수 있는 공연은 어쩌면 오직 '취소된 공연'이 아닐까. 공연은 이렇게도 시작되고 저렇게도 끝나지만 취소된 공연은 사정이 생겨 시작되지 못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시작과 끝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소름 끼치도록 일치해서 철저하게 공중분해된 느낌이다. 그리고 관객 모두는 극장 문 앞에서 그 파편들을 한 아름씩 나눠 안고 발길을 돌린다. 어떤 포지션에서든 공연이란 놈은 역시.. 2024년의 차력 2024년의 어드벤트 차력(티캘린더)과 2025년 친구의 작품 달력. 고맙게도 3년째 이 조합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해를 맞이한다. 같은 소포 상자에 담겨있던 또 다른 친구가 전해준 동화책들. 행사에서 생긴 꽃 한 다발과 책자들, 언제나처럼 테이블 위의 잡동사니들과 함께 12월이 또 시작됐다. 11월 말에 독일 화물 수송기가 빌니우스 공항 근처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났었다. 비행기 잔해 옆으로 배송되지 못한 노란 상자들이 산산이 흩어져있고 그걸 주우러 갔던 사람들은 현장에서 잡혀가고. 그 와중에 독일에서 보낸 소포가 폴란드에서 움직이질 않는다는 친구의 문자. 어쩌면 친구가 보낸 차력이 굳이 추락한 비행기에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며 차력을 하늘로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3일 후에 .. 비 맞는 중의 에스프레소 아주 애지중지 마셔야 겨우 두세 모금 나오는 에스프레소를 테이크아웃하는 때란 사실 드물다. 뚜껑을 덮는 것은 거의 치명적으로 불가능하다. 에스프레소용 컵에 맞는 뚜껑을 가져다 놓는 카페를 아직까진 본 적이 없다. 있다고 해도 그 뚜껑을 누가 닫겠는가. 안에서 마시면 될 일이다. 오늘 아침부터 일하기 시작한 초보 바리스타에게 아주 결연하게 '어제도 내가 분명히 닫았다'며 에스프레소 뚜껑을 달라고 버티면 그게 원래부터 없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물품 창고를 다 뒤엎고 나서 매니저에게 전화를 할지도 모른다. 뭔가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우린 늘 집요하게 왜 나한텐 없는지 묻곤 하니깐. 에스프레소잔 뚜껑을 닫겠다는 불필요함은 이제 막 걷기 시작하는 아이에게 신발과 미니 신발주걱을 세.. 리투아니아어 127_탄핵 Apkalta 한국이 리투아니아 언론에 등장하는 경우는 보통 북한과 관련해서이다. 애석하게도 북한의 김정은이 또 나름 월드 스타이기에. 그래서 아마 한국의 대통령은 김정은을 뛰어넘는 인지도를 얻고 네타냐후와 푸틴, 트럼프를 밀어내고 슈퍼스타가 되고 싶었다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슈퍼스타가 되지도 못했다. 아무도 이 빌런의 서사를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모른다. 대통령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골든 라즈베리 트로피 정도...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 때문에 그나마 개인적으로 유익한 점이 있다면 리투아니아 언론에 비교적 신속하게 한국 소식이 올라와서 관련단어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는 것. 물론 BBC 등 여타 해외 유명매체들의 기사들이 재전달 되는 정도이긴 하다. 20세기에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으며 .. 리투아니아어 126_ Ausų krapštukas 면봉 22년간 씻지 못한것으로 보이는 네덜란드 베아트릭스 여왕을 위해 헌신적으로 솜방망이를 들다. Krapštukas 는 쑤신다는 의미의 동사 Krapštyti에서 나온 명사이다. 굳이 발음하자면 크랍슈투카스.그러니 귀(Ausis)를 쑤시면 면봉 아우스 크랍슈투카스 Ausų krapštukas, 이(Dantys)를 쑤시면 이쑤시개 단투 크랍슈투카스 Dantų krapštukas. Vilnius 177_두 거리의 꼭지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길은 카페 가는 길. 그 길의 모든 모퉁이와 모든 직선과 막다른 길조차, 설사 커피가 맛없다 해도 그 길은 대체로 훌륭하다. 하지만 그 길이 훌륭하지 않다면 맛없는 커피는 심각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가슴과 거리에 켜지는 등불이 따스함의 노예가 될 때, 지난여름 아낌없이 부서지던 햇살이 한 점의 거리낌도 없이 인색해질 때, 악착같이 매달려있던 나뭇잎들을 보란 듯이 털어내며 미래의 겨울에 맞설 때, 훌륭함과 자비로움으로 무장한 그 길들을 그저 걸으면 된다. 이전 1 2 3 4 5 6 7 ··· 11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