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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마지막 월요일 10월 마지막 일요일 서머타임의 종료는 아주 깊고 쫀득쫀득한 밤으로 가는 두 달 여정의 시작이다. 그 뒤로 모든 성자들과 죽은 자들을 위한 차분한 애도의 날들이 이어지고 늦춰진 한 시간으로 인해 2주일 정도 도시는 빛의 풍년을 맞는다. 이른 월요일 아침에 잠시 앉아 가는 카페. 멀리로는 보슬비 사이로 여전히 솟구치는 바닥 분수가 보이고 늘 앉는 자리 너머로는 꽃다발을 든 남자가 지나간다. 세상의 라디에이터들이 늘 따뜻했던 손처럼 가까스로 평균 온도를 획득하면 아늑해지는 것은 카페, 맛있어지는 것은 커피.
리투아니아어 109_Rytas 아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중충하고 나쁜 날씨가 결국은 가장 좋다. 눈보라가 치거나 오래된 나무가 꺾일 만큼 험악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좀 어둡고 축축하고 춥고 더 나빠지지도 그렇다고 더 좋아질 것 같지도 않은 그런 날씨에 왠지 마음이 기운다. 모범적이고 우등한 날씨들이 모두 하교한 후 혼자 남아 나머지 공부를 하는 중인 듯한 그런 느낌의 날씨 말이다. 신기하게도 그런 날씨에 휩싸여있을 때면 정말 찬란하고 따스하고 너무 분명해서 똑 부러졌던 날을 몸이 먼저 기억해 낸다. 그 순간엔 과거의 날씨도 현재의 날씨도 동등해진다. 어떤 것들은 온몸이 기억한다.
리투아니아어 108_개구기 Lūpų plėtiklis. 우리 집 패밀리 닥터가 있는 폴리클리니카의 수많은 진료실 창밖으로는 대략 이런 흐릿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간호사가 전화기 너머의 퇴직자 할머니에게 그 약은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라고 마음껏 호통칠 때, 진료 예약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진료 가능한 날짜가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 겨우 찾아낸 미지의 날짜가 보란 듯이 나의 스케줄과 맞지 않아 간호사가 한숨 쉬며 다시 다음 페이지를 클릭할 때, 의사가 나의 피검사 결과를 출력하고자 노력하지만 때마침 말을 듣지 않는 프린터기를 공개적으로 의아해할 때,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시간을 저당 잡는 가운데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의 오래된 지붕에 집중할 수 있는 소품 같은 순간이다. 그런데 이 오래된 건물이 여러모로 병원 기능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집 근처로 내년 즈음에..
이탈리아 2센트 동전 - 토리노의 몰레 안토넬리아나, 몰록과 비체린 뭔가 아련하고 신비로운 동전 속의 이것은 거뜬히 10원짜리 속의 다보탑과 자매결연을 맺을 수 있을듯한 모습이다. 마트에서 라임 3킬로를 사면서 거슬러 받았고 AAA 사이즈 에너자이져를 사는데 쓰이며 어딘가로 영영 떠나버린 이것. 넌 널 위해 살거라. 그 옛날 화산 폭발로 사라졌거나 오스만 투르크에서 박살 냈거나 왠지 왕좌의 게임의 피의 결혼식 같은 대량살상이 이곳의 돔 아래에서 벌어졌을 것만 같다. 어쩌면 정어리를 잡던 시칠리아의 소년 어부가 가라앉은 배에서 발견한 명문가의 도장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를 때에 이런 생각을 한다. 한껏 줌을 당겨 간직하는 동전들의 모습은 대체로 평면적이지만 햇살을 받는 동전은 시시각각 다른 인상을 자아낸다. 이 동전의 첫 인상은 인상파 화가가 그린 풍경화 같았다. 번잡..
리투아니아어 107_캐슈넛 Anakardžių riešutai 여름에 바다에서 주운 돌이 너무 캐슈넛처럼 생겨서 찍어놓았었다. 색상도 실제론 흡사하다. 이것은 남의 것을 탐내는 사람을 혼쭐 내기 좋은 욕망의 돌로써 먹어도 모르겠지 하고 손대는 순간 이를 크게 다칠 수 있음.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엌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놓았다. 리에슈타이 Riešutai는 넛에 해당하는 단어이고 캐슈넛을 보통 '아나카르지우'라고 하는데 리투아니아 생활 초기엔 헷갈려서 '아나르카지우'라고 읽곤 했다. 그러다가 이것이 혹시 검(Kardas)과 생김새가 비슷해서 중간에 저런 단어가 들어갔나 연결 짓다 보니 결국 제대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는데 캐슈나무의 학명이 Anakardium이고 kardium은 심장을 뜻한다고 한다.
리투아니아어 106_아코디언 Armonika 아르모니카. 얼핏 보면 하모니카를 뜻하는 이 단어는 사실은 아코디언이다. Ar와 Monika 가 합쳐지면 모니카야?라는 뜻이 되니 얼핏 모니카라는 여자에 대한 어떤 물음처럼도 들린다. 지난여름 동네 고목의 갈라진 틈 사이에 끼워져 있던 아코디언을 갈구하는 사람이 남긴 쪽지인데 지금쯤 구해서 연주하고 있으려나. 아슬아슬 떨어지려는 찰나여서 틈 속으로 잘 넣어 주었다.
Egypt 12_함께 오르는 사막 이집트의 시와에서 남쪽으로 아부심벨 신전이 있는 룩소르까지 가는 동안에는 모래사막부터 백사막과 흑사막이 차례로 펼쳐진다. 투어 차량들이 줄지어 있을 거라 예상하지도 않았지만 깃발 하나를 꽂은 채 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바이크를 움직이는 일본인 한 명을 본 것 말고는 대체로 싱겁고 척박했던 도로 풍경. 그렇다고 다카르랠리처럼 쫙쫙 뻗어나갈 수도 없는 것이 사막 투어 차량들의 운명이다. 예정된 시간과 할당된 끼니와 사막의 추위와 하늘의 별들에 대해 지불된 돈이 있으니. 룩소르까지 기차를 타고 곧바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소수인원을 모아 차량을 대절하면 운전기사가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짧게는 하루 길게는 나흘에 걸쳐서 사막을 이동할 수 있다. 그때 이집션 운전사를 제외한 우리는 5명이었다. 그중 두 명은 이탈리..
폴란드 19_발견 바르샤바에 있는 동안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첫째로 나의 컨버스 운동화 밑창으로 물이 줄줄 새고 있었다는 것. 둘째는 올리비에 샐러드에는 새우가 들어간다는 것 (인줄 알았으나 원래는 안들어가는 것으로 판명됨) 셋째는 캐리어를 올려 놓는 러기지랙이라는것이 있다는것을 모르고 그 위에 앉음. 넷째는 힌칼리 꼭지는 먹지 않고 버린다는 것. *식당 테이블에 놓인 힌칼리 제대로 먹는 방법에 따르면 꼭지 채로 잡고 아랫부분을 깨물어 속에 든 육즙을 다 빨아 먹고 힌칼리 본체를 깨물어 먹은 후 너무나 맛있어 감탄한 나머지 한 접시 더 주문하는게 룰이다. 하지만 저 그루지야의 국룰을 숙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뜨거워서 결국 손을 쓰지 못하고 국물은 숟가락에 받아 먹고 만두는 칼로 잘라 먹어서 내 마음속의 카프카스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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