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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lnius 175_모든 성인들의 날 주중의 이틀이 공휴일이어서 여유롭고 차분했던 지난 한 주. 간혹 비가 내리긴 했지만 11월 들어 기온이 많이 올랐다. 하지만 어둡고 휑한 거리를 걷는 옷속의 나와 주머니 속의 손이 유난히 포근했던건 기온 그 자체의 영향때문이라기보다는 아마 갑자기 추워진 10월에 꺼내 입은 따뜻한 옷들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입은 옷이 문제지 나쁜 날씨는 없다'는 말은 천번만번 맞는 말씀이지만 '너 자신이 옷을 알맞게 잘 입으면 된다'라는 개인책임론은 결국 좋은 날씨는 없다는 것의 반증이려나.
리투아니아어 111_숫자 Skaičius 이제는 이 동네식으로 숫자 쓰기에 익숙해져서 우체국에서 한국 주소나 전화번호를 적어야 할 때라든가 가장 최근만 해도 대사관에서 주민번호 하나를 적는 데에도 약간의 내적갈등이 일어난다. 오래전에 한국에서 내가 쓰던 식으로 적자니 이제는 내 손에 익지 않아 어색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숫자를 적는 것만 같고 여기서 쓰던 대로 적자니 왠지 어떤 숫자는 오해의 여지를 남긴 채 잘못 읽힐 것만 같다. 하지만 막상 모든 숫자가 골고루 전부 포함되어 있는 페이지를 보니 숫자 하나하나가 또렷하여 크게 헷갈리거나 딱히 애매해 보이는 숫자는 없다. 주로 문제가 되던 숫자 세 개를 조합하고 보니 반갑게도 외대 앞 정류장에서 수없이 지나쳐 보낸 147번 파란색 버스가 생각난다.
리투아니아어 110_퍼즐 Delionė 1000피스짜리 중고 퍼즐 한 상자. 상자 속의 퍼즐 봉지가 뜯지 않은 상태였고 그림들이 재밌어서 다같이 하려고 샀다. 레스토랑의 번잡한 주방이 배경이라 서빙하다 넘어지는 웨이터들과 술 취한 셰프들, 애벌레 나오는 요리들 등등 비교적 분명하고 개성 있는 삽화여서 복잡한 퍼즐은 아니다. 어떤 퍼즐이든 그 완성에는 다소의 인내심이 요구되겠지만 그건 맞추기 힘든 조각을 집념을 갖고 찾아내는데 쓰이는 인내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완성되지 않은 퍼즐을 오래도록 그냥 펼쳐두고도 관조할 수 있는 체념의 인내심 같기도 하다. 눈에 띄는 조각이 보이면 설득력 있는 좌표에다가 놔두고 그냥 지나가거나 오며 가며 한 두 조각씩 맞추는 식이라면 편하고 가볍다. 퍼즐을 잘 맞추는 사람들은 확실히 눈썰미가 좋으니 그냥 전체 그림만 몇..
2023년 10월 마지막 월요일 10월 마지막 일요일 서머타임의 종료는 아주 깊고 쫀득쫀득한 밤으로 가는 두 달 여정의 시작이다. 그 뒤로 모든 성자들과 죽은 자들을 위한 차분한 애도의 날들이 이어지고 늦춰진 한 시간으로 인해 2주일 정도 도시는 빛의 풍년을 맞는다. 이른 월요일 아침에 잠시 앉아 가는 카페. 멀리로는 보슬비 사이로 여전히 솟구치는 바닥 분수가 보이고 늘 앉는 자리 너머로는 꽃다발을 든 남자가 지나간다. 세상의 라디에이터들이 늘 따뜻했던 손처럼 가까스로 평균 온도를 획득하면 아늑해지는 것은 카페, 맛있어지는 것은 커피.
리투아니아어 109_Rytas 아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중충하고 나쁜 날씨가 결국은 가장 좋다. 눈보라가 치거나 오래된 나무가 꺾일 만큼 험악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좀 어둡고 축축하고 춥고 더 나빠지지도 그렇다고 더 좋아질 것 같지도 않은 그런 날씨에 왠지 마음이 기운다. 모범적이고 우등한 날씨들이 모두 하교한 후 혼자 남아 나머지 공부를 하는 중인 듯한 그런 느낌의 날씨 말이다. 신기하게도 그런 날씨에 휩싸여있을 때면 정말 찬란하고 따스하고 너무 분명해서 똑 부러졌던 날을 몸이 먼저 기억해 낸다. 그 순간엔 과거의 날씨도 현재의 날씨도 동등해진다. 어떤 것들은 온몸이 기억한다.
리투아니아어 108_개구기 Lūpų plėtiklis. 우리 집 패밀리 닥터가 있는 폴리클리니카의 수많은 진료실 창밖으로는 대략 이런 흐릿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간호사가 전화기 너머의 퇴직자 할머니에게 그 약은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라고 마음껏 호통칠 때, 진료 예약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진료 가능한 날짜가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 겨우 찾아낸 미지의 날짜가 보란 듯이 나의 스케줄과 맞지 않아 간호사가 한숨 쉬며 다시 다음 페이지를 클릭할 때, 의사가 나의 피검사 결과를 출력하고자 노력하지만 때마침 말을 듣지 않는 프린터기를 공개적으로 의아해할 때,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시간을 저당 잡는 가운데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의 오래된 지붕에 집중할 수 있는 소품 같은 순간이다. 그런데 이 오래된 건물이 여러모로 병원 기능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집 근처로 내년 즈음에..
이탈리아 2센트 동전 - 토리노의 몰레 안토넬리아나, 몰록과 비체린 뭔가 아련하고 신비로운 동전 속의 이것은 거뜬히 10원짜리 속의 다보탑과 자매결연을 맺을 수 있을듯한 모습이다. 마트에서 라임 3킬로를 사면서 거슬러 받았고 AAA 사이즈 에너자이져를 사는데 쓰이며 어딘가로 영영 떠나버린 이것. 넌 널 위해 살거라. 그 옛날 화산 폭발로 사라졌거나 오스만 투르크에서 박살 냈거나 왠지 왕좌의 게임의 피의 결혼식 같은 대량살상이 이곳의 돔 아래에서 벌어졌을 것만 같다. 어쩌면 정어리를 잡던 시칠리아의 소년 어부가 가라앉은 배에서 발견한 명문가의 도장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를 때에 이런 생각을 한다. 한껏 줌을 당겨 간직하는 동전들의 모습은 대체로 평면적이지만 햇살을 받는 동전은 시시각각 다른 인상을 자아낸다. 이 동전의 첫 인상은 인상파 화가가 그린 풍경화 같았다. 번잡..
리투아니아어 107_캐슈넛 Anakardžių riešutai 여름에 바다에서 주운 돌이 너무 캐슈넛처럼 생겨서 찍어놓았었다. 색상도 실제론 흡사하다. 이것은 남의 것을 탐내는 사람을 혼쭐 내기 좋은 욕망의 돌로써 먹어도 모르겠지 하고 손대는 순간 이를 크게 다칠 수 있음.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엌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놓았다. 리에슈타이 Riešutai는 넛에 해당하는 단어이고 캐슈넛을 보통 '아나카르지우'라고 하는데 리투아니아 생활 초기엔 헷갈려서 '아나르카지우'라고 읽곤 했다. 그러다가 이것이 혹시 검(Kardas)과 생김새가 비슷해서 중간에 저런 단어가 들어갔나 연결 짓다 보니 결국 제대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는데 캐슈나무의 학명이 Anakardium이고 kardium은 심장을 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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