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905) 썸네일형 리스트형 리투아니아어 113_공증인 Notaras 동네 곳곳에 공증 사무실이 정말 많다. 간판에 보통 'Vilniaus m.10-asis notaro biuras 빌니우스시 10번째 공증 사무실' 이런 식으로 적혀있다. 오래전에 종로 구청 근처 공증 사무실에서 몇 가지 증명서를 영문 번역하여 공증을 받았었다. 그 서류들을 리투아니아어로 번역해서 다시 공증받은 후에야 효력이 생긴다. 지금은 인터넷에서 내려 받을 수 있는 서류도 많고 아포스티유도 발급이 되니 전에 비하면 모든 것이 엄청 간단해진 듯 보이지만 해외에 거주하면서 신분증이나 거주 관련 문서들을 준비하고 갱신하는 것은 어쨌거나 참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늘 별문제 없이 잘 진행되었으니 한편으론 고맙다. 간혹 일간지를 사서 읽는다. 주어와 목적어가 바뀌고 날짜와 장소가 바뀌고 모든.. 카페에서 5분. 이 카페는 정말 날씨가 지나치리만치 좋을 때 킥보드를 타고서 1년에 한 번 정도 간다. 자주 가지 않는 카페는 결코 아니다. 날씨가 그냥 자주 안 좋을 뿐. 대성당부터 베드로 성당 뒤쪽으로 이어지는 안타칼니스( antakalnis) 동네까지 네리스 강변을 따라 별다른 장애물 없이 쭉 타고 올라갈 때의 뻥 뚫리는 기분. 출퇴근 차량과 트롤리버스는 한결같은 매연을 내뿜고 있겠지만 곳곳의 과묵한 녹음들이 피톤치드를 분사하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동한다기보다는 놀이기구를 타는 마음으로 혼자 몰래 불량식품 먹으러 간다는 생각으로 간다. 인터넷에서 중고책을 샀는데 만나서 전해주겠다는 장소가 바로 이 근처여서 오랜만에 이 카페에 들를 생각에 그러자고 했다. 11월인데 벌써 너무 춥다. 4시에 만나기로 했는.. 리투아니아어 112_Tūris 함량 세상에 여러 종류의 즐거움이 있다. 꼭 해야 하는 일을 굳이 안 하는 것. 굳이 안 해도 되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것. 그리고 1) 평일 2) 대낮에 3) 마트의 독주코너를 4) 말끔한 정신으로 5) 어슬렁거리다 6) 구매의 목적을 창조하고 7) 세상과 나를 설득하는 것. 이들 중 제일 까다로운 즐거움은 단연 가장 후자가 아닐까 싶은데 그것이 즐거운 행위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조건이 성립되어야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쩌면 이 복잡 미묘한 즐거움을 만끽하기 시작하면 대체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질척이다 결국 모두를 힘들게 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는지도 모른다. 마치 정도를 넘겨 근본 없이 희석된 독주처럼. 꽁꽁 언 바닥에 엉겨 붙은 지난밤으로부터의 토사물처럼. 술을 선물하는것을 좋아하는데 술이든 뭐.. Vilnius 175_모든 성인들의 날 주중의 이틀이 공휴일이어서 여유롭고 차분했던 지난 한 주. 간혹 비가 내리긴 했지만 11월 들어 기온이 많이 올랐다. 하지만 어둡고 휑한 거리를 걷는 옷속의 나와 주머니 속의 손이 유난히 포근했던건 기온 그 자체의 영향때문이라기보다는 아마 갑자기 추워진 10월에 꺼내 입은 따뜻한 옷들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입은 옷이 문제지 나쁜 날씨는 없다'는 말은 천번만번 맞는 말씀이지만 '너 자신이 옷을 알맞게 잘 입으면 된다'라는 개인책임론은 결국 좋은 날씨는 없다는 것의 반증이려나. 리투아니아어 111_숫자 Skaičius 이제는 이 동네식으로 숫자 쓰기에 익숙해져서 우체국에서 한국 주소나 전화번호를 적어야 할 때라든가 가장 최근만 해도 대사관에서 주민번호 하나를 적는 데에도 약간의 내적갈등이 일어난다. 오래전에 한국에서 내가 쓰던 식으로 적자니 이제는 내 손에 익지 않아 어색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숫자를 적는 것만 같고 여기서 쓰던 대로 적자니 왠지 어떤 숫자는 오해의 여지를 남긴 채 잘못 읽힐 것만 같다. 하지만 막상 모든 숫자가 골고루 전부 포함되어 있는 페이지를 보니 숫자 하나하나가 또렷하여 크게 헷갈리거나 딱히 애매해 보이는 숫자는 없다. 주로 문제가 되던 숫자 세 개를 조합하고 보니 반갑게도 외대 앞 정류장에서 수없이 지나쳐 보낸 147번 파란색 버스가 생각난다. 리투아니아어 110_퍼즐 Delionė 1000피스짜리 중고 퍼즐 한 상자. 상자 속의 퍼즐 봉지가 뜯지 않은 상태였고 그림들이 재밌어서 다같이 하려고 샀다. 레스토랑의 번잡한 주방이 배경이라 서빙하다 넘어지는 웨이터들과 술 취한 셰프들, 애벌레 나오는 요리들 등등 비교적 분명하고 개성 있는 삽화여서 복잡한 퍼즐은 아니다. 어떤 퍼즐이든 그 완성에는 다소의 인내심이 요구되겠지만 그건 맞추기 힘든 조각을 집념을 갖고 찾아내는데 쓰이는 인내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완성되지 않은 퍼즐을 오래도록 그냥 펼쳐두고도 관조할 수 있는 체념의 인내심 같기도 하다. 눈에 띄는 조각이 보이면 설득력 있는 좌표에다가 놔두고 그냥 지나가거나 오며 가며 한 두 조각씩 맞추는 식이라면 편하고 가볍다. 퍼즐을 잘 맞추는 사람들은 확실히 눈썰미가 좋으니 그냥 전체 그림만 몇.. 2023년 10월 마지막 월요일 10월 마지막 일요일 서머타임의 종료는 아주 깊고 쫀득쫀득한 밤으로 가는 두 달 여정의 시작이다. 그 뒤로 모든 성자들과 죽은 자들을 위한 차분한 애도의 날들이 이어지고 늦춰진 한 시간으로 인해 2주일 정도 도시는 빛의 풍년을 맞는다. 이른 월요일 아침에 잠시 앉아 가는 카페. 멀리로는 보슬비 사이로 여전히 솟구치는 바닥 분수가 보이고 늘 앉는 자리 너머로는 꽃다발을 든 남자가 지나간다. 세상의 라디에이터들이 늘 따뜻했던 손처럼 가까스로 평균 온도를 획득하면 아늑해지는 것은 카페, 맛있어지는 것은 커피. 리투아니아어 109_Rytas 아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중충하고 나쁜 날씨가 결국은 가장 좋다. 눈보라가 치거나 오래된 나무가 꺾일 만큼 험악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좀 어둡고 축축하고 춥고 더 나빠지지도 그렇다고 더 좋아질 것 같지도 않은 그런 날씨에 왠지 마음이 기운다. 모범적이고 우등한 날씨들이 모두 하교한 후 혼자 남아 나머지 공부를 하는 중인 듯한 그런 느낌의 날씨 말이다. 신기하게도 그런 날씨에 휩싸여있을 때면 정말 찬란하고 따스하고 너무 분명해서 똑 부러졌던 날을 몸이 먼저 기억해 낸다. 그 순간엔 과거의 날씨도 현재의 날씨도 동등해진다. 어떤 것들은 온몸이 기억한다. 이전 1 ··· 5 6 7 8 9 10 11 ··· 11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