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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106_아코디언 Armonika 아르모니카. 얼핏 보면 하모니카를 뜻하는 이 단어는 사실은 아코디언이다. Ar와 Monika 가 합쳐지면 모니카야?라는 뜻이 되니 얼핏 모니카라는 여자에 대한 어떤 물음처럼도 들린다. 지난여름 동네 고목의 갈라진 틈 사이에 끼워져 있던 아코디언을 갈구하는 사람이 남긴 쪽지인데 지금쯤 구해서 연주하고 있으려나. 아슬아슬 떨어지려는 찰나여서 틈 속으로 잘 넣어 주었다.
Egypt 12_함께 오르는 사막 이집트의 시와에서 남쪽으로 아부심벨 신전이 있는 룩소르까지 가는 동안에는 모래사막부터 백사막과 흑사막이 차례로 펼쳐진다. 투어 차량들이 줄지어 있을 거라 예상하지도 않았지만 깃발 하나를 꽂은 채 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바이크를 움직이는 일본인 한 명을 본 것 말고는 대체로 싱겁고 척박했던 도로 풍경. 그렇다고 다카르랠리처럼 쫙쫙 뻗어나갈 수도 없는 것이 사막 투어 차량들의 운명이다. 예정된 시간과 할당된 끼니와 사막의 추위와 하늘의 별들에 대해 지불된 돈이 있으니. 룩소르까지 기차를 타고 곧바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소수인원을 모아 차량을 대절하면 운전기사가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짧게는 하루 길게는 나흘에 걸쳐서 사막을 이동할 수 있다. 그때 이집션 운전사를 제외한 우리는 5명이었다. 그중 두 명은 이탈리..
바르샤바의 기마상 지난번 바르샤바에서 코페르니쿠스 동상이 진하게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아마 먼발치에서 그가 보이면 이제 집에 다 왔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노비쉬비아트 거리 근처의 24시간 주류 상점들이 존재감을 발휘하는 시각에 동상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학생들도 귀여웠다. 그래서인지 코페르니쿠스의 자리는 갈 곳 없는 취객들을 품는 공간처럼 각인되었었는데 이번에 보니 그는 의외로 큰 거리 입구에 꽤 의미 있고 고상한 자태로 앉아있었다. 화창한 정오에 사람들은 그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동상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아이들 틈에서 코페르니쿠스는 단연 인자한 셀럽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바르샤바. 도착하자마자 비가 내린다. 운동화 밑창으로 물이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가랑비에도 운동화 흠뻑 젖을 수 있구나 ..
바르샤바의 유료 화장실 바르샤바 구시가의 좁고 한산했던 골목. 검고 둥근 것을 보면 엘피판이 먼저 생각나는지라 먼발치에서 봤을 때 저것은 화장실이 아닐 것이다, 저것은 예전에 화장실이었던 곳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쓰는, 이상한 명칭을 가져다 붙인다면 조금은 더 힙해보일거라는 강박이 있는 세상의 많은 클럽 중 하나일 것이다. 생각하며 다가갔다. 하지만 이곳은 마블 영웅들이 화장실에 앉아있는 컬러 포스터들과 모나리자가 거짓말처럼 두루마지 휴지에 둘러싸인 그림들로 장식된 진짜 유료 화장실이었다. 그런데 건물 색감과 번듯했던 문 때문이었는지 이 장면에선 베를린에서 지나쳤던 한자 스튜디오가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결국 이 화장실은 순전히 나의 억지로 아주 음악적인 화장실로 뇌리에 남는다.바르샤바에서 간혹 음악을 들었다. 텔레비전에서..
늦여름의 노란 자두 푸르고 빨간 자두는 마트에 팔지만 신호등 사탕 만한 이 노란 야생 자두는 오며 가며 걸어 다니다 바짓가랑이에 쓱쓱 닦아 먹을 수 있는 빌니우스 거리의 과실수 중 하나이다. 구시가의 지름길을 찾아 남의 집 마당을 지나다 보면 꼭 한 그루 정도는 있어서 잔뜩 떨어져 있는 자두를 보면 아 8월이구나 하고 봄이 되어 모든 나무들 중 가장 먼저 꽃을 피우면 아 이것이 자두꽃이었지 한다. 그리고 겨울이 되어 앙상해지면 지난봄의 초입과 8월의 자두를 회상하는 것이다. 지난달에 동료가 바람이 불어 마당에 노랑 자두가 많이 떨어졌는데 그걸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주겠다고 했다. 20년 넘게 그 집에 사는 친구가 자두의 용도를 모를 일이 없다. 이제는 다 귀찮아서 자두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다. 며칠 후에..
바르샤바의 피아노 상점 1년전 우리는 스타인웨인의 상점을 지나며 힘겹게 피아노를 운반해서 사라지는 성실한 도둑에 관한 농담을 했었다. 오래된 농담이 거짓말처럼 떠오를때 난 그것이 일상의 성공이라 느낀다. 인생이란 결국 자잘한 농담들의 집합이라는 것.
바르샤바행 감자트럭 1년 만에 가는 바르샤바. 바르샤바를 몇 번 갔어도 항상 오후 11시 넘어 야간버스를 탔던지라 딱히 바깥 풍경을 본 적이 없다. 이번엔 처음으로 아침 7시 버스를 타고 가는데 우선 야간 버스보다 한산했고 자리를 옮겨 가장 뒷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졸며 갈 수 있었다. 국경을 지나고도 한참 숲과 들판을 낀 풍경은 그 어디와도 비슷하다. 그렇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감자를 잔뜩 실은 트럭이 지나간다. 높이 쌓아 올린 것은 아니지만 굴러 떨어지지 않는것이 신기하다. 리투아니아 친구들에겐 유머 한토막을 보낸다. 폴란드인도 감자먹으니 충분히 친구 될 수 있다고.
India 12_시킴에서 만난 아이 9월 들어 의외로 따뜻한 날씨가 계속된다. 26도 남짓한 온도지만 9월의 최고 온도 기록을 깼다고도 한다. 9월 1일이 되면 꽤나 드라마틱하게 날씨가 추워진다. 물론 그것도 결국은 정해진 수순이니 그 바뀐 날씨는 놀라울 것이 없는데 추위를 납득할 수 있을 때의 더위는 딱히 반가운 존재는 아니다. 의외의 더위에 맞서는 가장 즐거운 방법은 그저 의외의 추위를 회상하는 것. 내 생애 가장 의외로 추웠던 시기라면 다르질링에서 트레킹을 했을때.  이집트 사막에서도 단체 사막 투어를 온 사람들이 넘겨준 담요가 아니었으면 아마 얼어 죽었을 거다. 트레킹 지역의 숙소들은 딱 보기엔 아늑했으나 모두가 잠든 밤엔 사정없이 매서워졌다. 겨울이어도 난방이 딱히 되지 않는데다 부족한 조명. 밤이 되면 바깥의 바람 소리 외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