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931) 썸네일형 리스트형 12월의 무라카미 류 12월 31일에 무심코 부엌 바닥에 흘린 밥풀을 하루 지나서 1월 1일에 밟았다고 치자. 슬리퍼에 눌어붙은 밥풀이 알아서 떨어질 리 없으니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타일 위 여기저기에 끈적한 흔적을 남긴다. 고작 식은 밥풀 하나가 정말 이렇게 끈질기게 찐득 거릴 수 있다니 탄복할 즈음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슬리퍼를 벗어서 하루 만에 4배의 크기로 짜부라진 '작년의 밥풀'을 그렇게 뜯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겨울인데 마치 지난겨울처럼 느껴지는 작년의 겨울 몇 장면을 떠올린다. 더 늦기 전에. 12월 초에 예상치 못한 책 소포를 받았다. 이웃님께서 여행중에 읽으시려고 가져간 책들을 다 읽으시고 빌니우스로 보내주신 것이다. 게다가 이 초경량 귀염뽀짝한 무라카미 류의 책은 또 너무나 의외였다. .. 지난 12월의 차 24잔. 11월 초에 친구가 보내온 어드벤트 달력. 푸카차는 클리퍼, 요기차와 함께 내가 좋아하고 즐겨 마시는 허브차인데 성분이나 성격에 있어서 서로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확고한 차이가 있어서 몇 종류씩 사놓고 번갈아가며 마신다. 보통은 그날을 정리하는 의미의 마지막 차로 자기 전에 마시곤 했는데 12월엔 주로 아침 시간에 마셨다. 이건 아마 전 날 저녁에 먹다 남은 버섯을 팬 채로 그래도 데우다가 달걀 추가해서 먹은 아침이다. 마지막달 12월이 보통 그렇지만 역시 평소보다 시간이 두 배는 빨리 흘러간 것 같다. 작년 12월엔 눈이 정말 많이 왔고 크리스마스까지 점점 어두워지는 경향에 발맞춰 유난히 몸과 마음이 정말 느리고 고요하게 점점 가라앉으며 평온해지는 상태가 되었다. 눈 덕분에 크리스마스 조명들이.. 12월의 11월 연극 회상 술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왜 마셨는지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의 빈도로 마시고 싶다. 그러려면 좀 뜸하게 마셔야 하고 어처구니없는 주종이어도 명확하면 된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술을 대하는 자세와 감성은 또 그 나름대로의 진심이 담긴 채로 나와는 다르겠지만 애주가의 영혼과 체질을 가지지 못한 나로선 딱 그 정도가 좋다. 11월의 마지막 일요일, 연극보기 전에 진 한 잔을 마셨다. 술을 정말 거의 마시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생기냐면 대략 이렇다. 드라마의 새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지난 시즌의 내용을 잠깐 되짚어 줄 때 내 기억들이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재빠르게 되감겨 들어가며 수렴될 때의 느낌이 있다. 눈앞에 놓인 한 잔의 술이 바로 이전 술의 맛과 향과 추억을 마치 방금 전에 마신 것인 양 아주 명료하.. Vilnius 173_대마를 씹는 라마 여름부터 구시가에 대마 관련 제품을 파는 상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문을 열었다. 이 가게는 원래 사탕과 초콜릿을 팔던 가게였는데 문을 닫았고 1년 넘게 비어있던 점포에 풀을 뜯고 있는 건지 뱉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귀여운 라마 간판이 걸렸다. 이 근처에 채식 식당이 있다가 문 닫은 게 생각나서 이젠 비건 레스토랑이 생기는 건가 했는데 알고 보니 대마 관련 가게. 저렇게 축 늘어진 라마를 보고 비건 레스토랑을 떠올린 것도 웃기지만 라마가 축 늘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생각하니 더 웃기다. 중앙역 과 버스 터미널을 나와 구시가로 향하는 사람들이 배낭여행자 아인슈타인 벽화를 돌면 만날 수 있는 라마, 호기심에 들어가 보니 대마 껌부터 대마 종자유, 사탕, 젤리, 봉, 파이프, 재떨이, 쟁반 등등 만화 굿.. 8월 여행 회상_쉬벤치오넬리아이 Švenčionėliai 8월 말에 빌니우스에서 한 시간 거리의 쉬벤치오넬리아이(Švenčionėliai)라는 도시로 당일 여행을 다녀왔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 2명과 가기로 했는데 그나마 좀 아는 사람이 고양이가 아파서 못 가는 바람에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가게 됐다. 잘 모르면 모르는 대로 오히려 할 말이 많아서 사실 편하다. 물 한 병과 읽을 책 한 권을 가져갔다. 물은 다 마셨고 책은 별로 읽지 못했고. 갑자기 이 여행을 회상하는 이유는 바르샤바-빌니우스 구간 기차가 12월 11일 재개통한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고 지난 주말에 연극을 보면서 백치의 므이시킨 공작이 타고 오는 기차가 아마 이 구간을 지났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 사진을 찍었던 순간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기차역 1층에 위치한 카페 벽에 바르샤바 뻬쩨르부.. Praha 몇 컷. 여행 중이신 이웃님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13년 전 프라하 사진첩을 뒤져보았다. 프라하는 사진들이 실수로 다른 폴더에 들어가 있는 건지 다녀온 곳 중 독보적으로 사진이 적다. 찍은 사진들은 충동적으로 입장한 어린이 대공원에서 일회용 카메라를 사서 친구들이랑 마구 찍은 듯한 느낌이다. 이집트 여행 때부터 많은 추억을 남겨주고 비로소 액정이 나간 쿨픽스를 다루는 게 좀 귀찮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온전한 사진 몇 장이 있어서 올려본다. 바르샤바에서 밤기차를 타고 새벽에 도착해서 며칠 그저 걷다가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베를린행 기차표를 사서 허겁지겁 떠났던 프라하. 아침이라고 하기에도 좀 이른 시간이었어서 사람이 정말 없었다. 주말이었을까. 지금이라면 여기저기 세워져 있을 전동 킥보드를 하나 집어타고 장.. Warsaw 10_바르샤바에서 술 한 잔 피에로기에 진심인 폴란드에서 그 진심의 극치를 보여줬던 바르샤바의 어떤 식당. 폴란드어로는 Pierogi라고 하는데 러시아 만두 뻴메니와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바르샤바의 어디에서든 Pierogarnia 간판을 볼수 있었다. 삐에로기 이외의 요기거리도 팔지만 어쨌든 삐에로기에 장소 접미사 arnia를 붙인 삐에로기가 주인공인 식당들이다. 이 식당의 종업원들은 알록달록 만두가 그려진 앞치마를 입고 있었고 벽에는 블루벨벳에 나오는 잘린 귀 같은 만두 장식이 붙어 있어서 그 귀를 잡고 암벽등반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날씨가 좀 추웠었나. 지나가다가 얼핏 봤는데 비좁은 공간에 손님들이 옹기종기 가득 앉아있는 것이 너무나 아늑해 보여 찜해놓고 더 걷다가 돌아가는 길에 들어갔다. 음식은 리투아니아 음식과 거의 .. Warsaw 09_바르샤바의 코페르니쿠스 도시 속의 조각들, 동상들을 좋아한다. 빌니우스 구시가에 특히나 조형물들이 많아서 으례 익숙해진 것인지 어딜 가도 늘 몇 개는 지나치게 되는 그런 것들이 사람들에게 추억의 좌표처럼 남는 것이 좀 감동적이라고 해야 할까. 간혹 이념 문제로 없어지고 옮겨지고 하는 것들도 종종 있지만 그 주위를 지나치고 약속을 잡고 걸터앉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책을 읽던 누군가의 기억은 강제로 끌어내 박멸하기 힘든 것들이다. 바르샤바에서 지냈던 숙소 근처에 코페르니쿠스 동상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쇼팽과 함께 바르샤바의 슈퍼스타였다. 바르샤바에서 아침에 집을 나설때도 온종일 신나게 걷다가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며칠간 매일 마주쳤던 코페르니쿠스. 건물에 비친 뒷모습에서 오히려 더 생동감이 느껴진다. 근데 처음엔 코.. 이전 1 ··· 9 10 11 12 13 14 15 ··· 11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