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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완소 달걀 영화들 매해 여름이 되면 자동적으로 꺼내 들게 되는 헤밍웨이의 수필이 있다. 2년 전 여름 빌니우스로 여행 오셨던 이웃님이 남겨 주고 가셨는데 작년이랑 올해 고작 다시 읽었을 뿐이라 매년 읽는 책이라고 하는 게 웃기지만 뭐 어제 막 크로스핏 시작한 사람이 '요즘 나 매일 크로스핏 하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거니깐... 책을 읽다 보면 헤밍웨이가 연필 깎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마로니에가 만져질 것도 같고 파리의 책방과 카페를 들쑤시고 다니는 젊은 헤밍웨이의 100년 전 허기가 내 위장을 숙주로 리플레이되는 것도 같다. 30년이 지나는 동안 선택되고 강화되며 생존한 청춘의 기억들에 그때는 없었을 통찰과 회한을 더해 끄적일 때 작가는 행복하면서도 슬펐을 것 같다. 사실 헤밍웨이를 통해 듣..
리투아니아어 122_6월 Birželis 재밌는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마크 러팔로 - 지금 뭐가 지나간 거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 6월 6월 1일이면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는 것과 똑같은 어조로 여름의 시작을 축복한다. 일제히 방학이 시작되고 사람들은 휴가를 준비하고 떠들썩한 하지 축제가 지나고 나면 폭주하던 6월이 끝이 나는데 7월에도 8월에도 여름은 지속되겠지만 여름의 시작과 절정 그리고 그 종료의 이미지가 오묘하게 공존하는 달은 6월이다. 시작과 동시에 끝이났다기 보다는 시작이 마무리된 느낌이랄까.
적절한 시기 2 몇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벽낙서 반경이 줄어들어드는 것이 눈에 보여 옛 낙서들을 지울 겸 페인트칠을 한다. 혹시 몰라 벽 하나는 아직 남겨둔다.
Warsaw 17_반나절의 바르샤바 바르샤바는 나에게 '알지만 모르는 곳'이고 알고 싶은 동시에 잘 모르고 싶은 곳 이기도하다. 알고 싶은 마음을 아주 낮은 고도로 유지하고 있고 그런 마음이 들면 웬만해선 그냥 갈 수 있는 곳이다. 늘 그런 생각으로 가면 그곳은 영원히 영영 모르는 곳이자 항상 가고 싶은 곳으로 남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있다. 모르는 동안엔 모든 것이 다소 더 아름답다. 좋아하는 상태보다는 좋아함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항상 더 우아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단념할 수 있는 것은 휴지심에 반쯤 붙어있는 마지막 휴지 한 칸뿐이었으면 좋겠다. 바르샤바는 그냥 그곳으로 이동하는 것 자체에 어떤 즐거움이 있다. 한없이 폐쇄적인 이 도시가 나에게 늘 열려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냥 지나치기엔 뭔가 아쉬운 위치, 애매모호하면서..
리투아니아어 121_속옷 Apatinis trikotažas 6년 전 우주피스의 아트 인큐베이터 구역에 있었던 전시물인데 지금도 있는진 모르겠다. 컴퓨터가 무거워져서 불필요한 사진들을 추려내고 있는데 없어진 것 아니면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라 균형잡기가 몹시 애매하다.
리투아니아어 120_ 장화 Botai 여전히 기온이 변덕스럽긴 하지만 한겨울옷은 벗을 수 있는 날씨가 되었다. 겨울 부츠들을 깊숙이 집어넣으면서 봄가을 장화들을 앞으로 꺼냈다. 그네 아래에 파헤쳐진 물 웅덩이도 포석들이 사라져 군데군데 물이 고인 거리에서도 천방지축으로 놀도록 놔두려면 확실히 장화들이 좋다. 겨울엔 아직 라디에이터가 작동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다음날이면 마르지만 난방시즌이 끝나면 젖은 운동화를 말릴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일정연령까지 아이들의 신발치수는 매해 달라지지만 철저히 계절용품이라 몇 번만 신을 뿐인 장화는 매번 새것을 사기가 애매하다. 그걸 잘 아는 사람들은 장화를 서로서로 물려준다. 그러니 집에는 과거와 미래의 장화들이 뒤섞인다. 이미 작아진 것부터 줄을 세우고 나니 세르게이 도블라토프의 여행가방 중의 기가막힌 문단이..
노란 정거장 카페에서 자주 가는 카페의 좋아하는 자리. 딱히 아늑하지 않은지 거의 항상 비어있다. 우유 거품 가득 올라간 커피잔을 들고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는 사람들, 반쯤 시작된 수다와 함께 카페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 따뜻하게 포옹한 채로 주문 차례를 기다리는 연인들, 빈자리를 못 찾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 모든 주문을 처리하고 숨을 돌리는 바리스타까지. 그 모두로부터의 각기 다른 호흡과 생명력이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자리이다. 한 달에 두어 번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고 이곳에서 시작을 읽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반쯤은 고정된 일상이 있다. 이제는 짧은 시간에 작은 커피와 고밀도의 휴식을 취한 후 가볍게 일어나는 것에 익숙해져서인지 푹 늘어지고 싶은 구석진 곳의 포근한 자리보단 이런 자리가 편하..
Past lives 와 After sun 킬리언 머피의 BAFTA 수상 소감 중에 화면에 잡힌 배우 유태오가 반가워서 잠시 써 내려가는 글. 지난 12월에 카페에 갔는데 게시판에 꽂힌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 포스터가 보였다. 이 영화는 지난가을에 빌니우스에서 개봉을 해서 가서 보았는데 극장 상영이 끝나고 꽤 지난 최근까지도 영화 포스터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해성(유태오)과 노라(그레타리)가 테이블 지지대를 사이에 두고 오묘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것이 그들이 떨어져 있었던 시간과 공간 같아 묘했다. 늘 이 영화를 생각하면 덩달아 떠오르는 것은 샤를롯 웰스의 애프터 선이다. 얼추 1년의 차이를 두고 등장한 이 두 편의 영화가 함께 생각나는 것은 우연은 아니다. 감독들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것. 굳이 더 들어가면 여성 감독이라는 것. 그리고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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