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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119_당절임과일 Cukatos 이 색감은 가히 팬톤의 올해의 색상 담당 부서직원들이 철야를 해도 구현해 낼 수 없을 영롱함과 말끔함이다. 초록 자몽을 좋아하는데 아쉽게도 잘 안 판다. 껍질 두께도 적당하고 포멜로와 주홍 자몽의 바람직함만 딱 섞어놓은 맛이다. 오랜만에 눈에 띄어 설탕에 절이려고 비슷한 놈들을 하나씩 전부 들고 왔던 어떤 겨울날. 여러색을 섞으면 훨씬 예쁘고 맛있다. 설탕물에 끓여서 굳힌 과일 껍질이나 과육들을 가리켜 리투아니아에서는 쭈카토스(Cukatos)라고 부른다. 절인 귤류의 껍질이면 간혹 캔디드 필 Cukuruotos žievelės라고도 쓰지만 쭈카토스라고 하면 대체로 통한다. 특히 겨울이 되면 su cukatomis라는 설명이 붙은 빵들이 많이 나온다. su는 '~와 함께', '~ 을 포함한'에 쓰이는 5 ..
Vilnius 176_계단에서 화양연화(花樣年華). 하얼빈의 대학 신입생 환영회를 장식한 현수막에 또렷하게 적혀있던 네 글자. 눈물겹게 아름다운 치파오들을 입은 장만옥과 공허한 눈빛의 양조위가 애잔하게 스치던 어두운 골목길이 이 성어에 대한 이전의 반사적 인상이었다면 언젠가부터는 똘망똘망 총기어린 중국인 동기들의 눈초리가 더해져서 몇 가지 참 다르면서도 공통된 묘한 감상들에 사로잡히곤 한다. 꽃 같이 아름다워 타오르는 시절, 거짓이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가장 완전한 순수함으로 충만했던 한 때, 손에 잡힐 듯 말 듯 일시적인 꿈같지만 아주 깊게 뿌리내려 역설적으로 남은 인생을 전부 지탱하고도 남는 시간이 있다면 아마 그것이다. 지나고 나면 마디마디 채워가는 이 삶도 그저 하나의 덩어리 진 시간으로 남을 뿐이겠지만 삶의 어떤 한 토막에..
지난 시즌의 테킬라. 올해 볼 연극 공연들을 예매하고 나니 지난 시즌의 테킬라들이 떠올라서 회상한다. 작년 2월에 구시가의 청년 극장에서 연극 '아연' (https://ashland.tistory.com/1258)을 봤었다. 손님이 몰리기 직전의 한산한 멕시코 식당에서 공연에 대한 설렘을 안고 간단한 타코 한 조각에 테킬라 한 잔을 마셨다. 그날의 테킬라가 진정 너무 맛있었기에 그 이후로 일종의 테킬라 한 잔의 전통이 생겼다. 어떤 테킬라를 마주하든 친구와 그날의 테킬라를 회상하고 분석하며 감탄했다. 딸려 나온 자몽에는 시나몬과 케이언페퍼를 비롯한 각종 매콤한 가루가 뿌려져 있었고 호세 페르난도 알레한드로가 할머니 찬장에서 꺼내준 듯한 저 호리호리한 잔은 밀집된 향에 코를 박고 작은 양을 나눠마시기에 완벽한 구조였다. 무엇보..
리투아니아어 118_비율과 관계 Santykis 마들렌의 핵심은 모든 재료들이 동등한 비율로 들어간다는 것. 적어도 내가 가진 레시피에서는 그렇다. 물론 반죽에 이것저것 추가하고 위에 부어서 바르고 뿌리고 한다면 그런 단순한 공식은 성립되지 않겠지만 그저 수더분한 마들렌을 원한다면 모든 재료의 양은 1이란 숫자로 통일된다. 홍두깨 선생님이 하니한테 지어주던 흰 밥도 쌀과 물의 비율은 아마 1이었을 거다. 리투아니아어 단어 Santykis는 비율의 뜻도 있지만 재밌게도 '관계'의 의미도 가진다.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 노사관계 등등 합쳐져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관계가 추구하는 최종적인 이상이라면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는 이 모든 재료들이 동등한 비율로 합쳐져서 달콤한 마들렌이라는 공동의 목표에 도달하며 부풀어 오르는 모습에는 좀 벅차오르는 지점이 ..
리투아니아어 117_고기분쇄기 Mėsmalė 그런 물건들이 있다. 딱히 실용적이지 않지만 버리기엔 무척 애매해진 것, 꺼낼 때마다 오래된 이웃들과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 카다시안들이 사용하지 않는 이상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을 것,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편리하게 잊는 것, 그 생애와 본적을 알고 싶어 절로 거꾸로 들어 밑바닥을 보게 하는 것, 한때는 모두에게 새로웠던 것, 대체 가능하다는 이유로 별안간 폄하되는 것, 잊으려고 마음먹으면 걷잡을 수 없이 소멸되는 것. 그게 뭐 물건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지난 크리스마스 휴가동안 파네베지에 있으면서 소련 시절의 오래된 고기분쇄기로 커피를 갈아 마셨다. 바닥에 쓰여진 대로라면 러시아어로 먀싸루프까Мясорувка, 리투아니아어로는 메스말레 Mėsmalė 라고 한다. 탁자에 고정시키고 손수 돌..
리투아니아어 116_목록 Sąrašas 마트에 가서 바구니를 집으려고 보니 옆바구니에 남겨진 쪽지 한 장이 보인다. 그래서 그 바구니를 집었다. 이 쇼핑 리스트의 주인은 이 식품들을 전부 샀을까. 필기체를 썼고 복수를 잘 썼고 찍어야 할 곳에 점을 잘 찍었다. 긴 단어는 적당히 줄였고 파프리카에서는 망설였다. 대체로 자주 반복되는 기본 식품들을 사러 아주 일상적으로 마트에 왔다. 냉장고에 항시 있어야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서 목록을 작성했을거다. 가령 이것은 어른 아이 다같이 오랜만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는 토요일 오전을 위한 리스트 같다. Pirkinių sąrašas - 쇼핑 리스트 Pienas 2 vnt - 우유 두개 Graik.jogurtas - 그릭 요거트 Užtepėlė - 스프레드 Duona Batonas - 빵. ..
2023년 12월의 반려차들 반갑고 고맙게도 친구가 보내준 차력 (어드벤트 티 캘린더를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 매일매일 짧게나마 기록한 12월의 반려차들. 12월이 되었다.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 생각보다 일찍 갑자기 큰 눈이 와서 급하게 아이들 방수되는 겨울부츠와 옷을 장만하느라 허둥댔다. 해가 더할수록 뭔가를 미리 준비하기보단 코 앞에 닥쳤을 때 해치우는 것에 크나큰 쾌감을 느끼게 되었다. 12월 1일 오늘은 유치원에 초대되어 나뭇가지와 상록수들의 잎사귀를 엮어 어드벤트 리스를 만들었다. 오래전에 리가를 처음 여행할 때 중앙역 근처 대형 마트에서 이 회사의 50그램짜리 딸기향 홍차를 샀었다. 커다란 딸기 두 개가 그려진 귀여운 빨간 틴케이스였는데 그것이 아마 내 돈 주고 산 첫 차가 아니었는지. 부엌에 놔두고 양념통으로 쓰..
리투아니아어 115_고고학자 Archeologas 내가 처음 도착했던 2006년의 모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파네베지 버스 터미널. 17년 동안 나도 바뀌고 기후도 바뀌고 대통령도 바뀌고 화폐단위도 바뀌었지만 역내의 긴 나무 의자나 간판이라도 부분적으로 바뀔만한데 모든것이 소름 끼칠 만큼 그대로이다. 이 버스역에 들어서면 같은 해 겨울 들렀던 러시아의 이르쿠츠크 버스터미널이 늘 떠오른다. 짐을 맡겨놓는 Bagažinė는 역내의 꿈꿈한 흐라녜니에, 체부렉이나 감자전 같은 주로 튀긴 음식들을 파는 Valgykla는 스탈로바야와 그저 똑같다. 다를 이유가 없는것이 맞다. 러시아 대도시의 역 규모는 리투아니아와 비교할 수도 없지만 이르쿠츠크는 상대적으로 소도시인지 그 오밀조밀 아는 사람끼리 부대끼는듯했던 인상을 종종 파네베지에서 느낀다. 파네베지는 얼마 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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