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절을 앞두고 리투아니아 어린이들은 유치원으로 완숙 달걀을 가져간다. 적신 휴지에 물감을 묻힌 후 그 위에 달걀을 굴리면 나름 부활절 달걀이 만들어지나 보다. 점토로 만든 둥지 속에 봄기운을 받아 기지개를 켜며 돋아나기 시작한 여린 풀잎들 몇 가닥을 집어넣고 색칠한 달걀을 얹는다. 그렇게 손바닥만 한 세상에도 나름의 봄이 깃든다.

추운 겨울 뒤에 따뜻한 봄이 찾아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계절이 바뀌는 순간에만 작동하는 그 명민한 감각은 살아있다는 단 하나의 명백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실 만끽 할 수 없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그 벅찬 사실을 내가 매 순간 절절하게 느끼고 감사하며 살고 있나 하면 애석하게도 딱히 그런 것 같진 않다.
부활절은 고통을 겪고 죽음을 맞이했다 다시 살아난 누군가를 축복하는 기간이지만 매년 어김없이 돌아와서 일상이 되어버리는 이 시끌벅적한 축제 속에서 되돌아보게 되는 것은 오히려 여전히 살아서 팔딱거리는 당연하고도 무심한 이토록 작은 내 개인적인 삶이다.

부활절을 향하는 긴 여정 속에는 많은 솔깃한 날들이 있다.
화요일은 기름져야 하고 수요일엔 작년부터 고이 모셔둔 종려나뭇가지를 태운다.
40일간의 사순절에 진입하는 것은 마치 길고 긴 지방 도로를 타는 느낌이다. 톨게이트도 없고 휴게소도 없고 왠지 아무 데서나 잠깐 서서 노상방뇨해도 될 것 같고 간혹 제한 속도를 위반해도 별 탈 없을 것 같다. 고기도 먹을 수 없고 절인 청어만 주야장천 먹어야 했던 사순절은 이제 없다. 모든 변칙을 허용하는 절제의 3부 능선을 넘으며 종려주일에 다다른다.

종려주일에는 종려나뭇가지를 나눈다. 그걸 일 년 후에 어느 수요일에 태우면 또 사순절이 시작되는 거다. 사순절의 절정에는 고난주간이 기다리고 있다. 폭식과 절식의 끝에 남는 것은 고난.
부활절의 시작은 체감상 사순절의 마지막주인 이 고난주간부터이다. 그리고 또다시 우리는 성스러운 금요일에 이른다. 이 네버엔딩 스토리 속에서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진다.

그렇게 크고 작은 의미부여와 함께 다다른 부활절 풍경은 그럼에도 조금은 익살스럽고 시시콜콜하다.
달걀 염색에 필요한 양파 껍질을 미리 모아두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마트에서는 쓰레기장으로 달려가던 양파 껍질을 가까스로 멈춰 세워 봉지에 담는다. 대형 양계장들이 부활절즈음에 대방출하는 흰 달걀들은 마트 매대에서 순식간에 사라진다. 예수님은 매년 어김없이 텔레비전속의 소화제 광고와 함께 부활한다. 정교 성당 벽에 이콘을 기계로 프린트하는 장면을 본다. 부활절 특집 퀴즈쇼의 왕중왕전에는 부활절의 기원에 관한 기출문제들이 속출한다. 콜롬비아 수도원 어딘가에서 두사부일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부활절을 보내도 전통이란 것은 나라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고 집집마다 다르다. 소나무가 지천에 있던 강원도 큰집에서 송편을 찔 때 두툼하게 솔잎을 까는 게 너무나 당연했듯이. 리투아니아 그런 전통이 있었다면 아마 마트에서 솔잎을 팔았을 거다.
명절동안 티비에선 유럽 각국의 다른 부활절 풍습을 내보낸다. 폴란드에서는 부활절 다음날을 '축축한 월요일'이라고 칭하며 서로에게 물을 뿌린다고 한다. '함께 있을 땐 우린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라는 영화 카피를 그즈음에 떠올린다. 늘 함께여서 항상 두려웠고 결코 친구가 되지 못한 곳이 유럽 대륙이란 것을 생각하면 웃기다.
달걀을 염색하고 달걀 부딪치기를 하고 달걀을 숨기고 달걀을 굴리면서 명절은 가파르게 지나간다. 부활절은 놀랍게도 내년에도 돌아온다. 단 살아있어야 맞이할 수 있다. 명절에 도달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래서 경이로운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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