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화요일은 리투아니아의 우즈가베네스(Užgavėnės) 였다. 우즈가베네스가 뭐냐면 사순절 전야, 팬케이크를 왕창 먹는 날, 스웨덴에서는 셈라를 먹는 날. 기름진 화요일 (Fat tuesday) 참회의 화요일 (Shrove tuesday), 마슬레니차, 마르디그라, 페티스다겐... 독어, 핀란드어, 스페인어 등등의 말로도 다 있을 거다.
한국 달력이 생겨서 벽에 걸었다. 음력 날짜와 24절기가 적혀있어서 너무 좋다. 부모님은 아직 음력 생일을 지내시니깐 1년에 한 번 인터넷에서 음력 날짜를 확인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이게 은근히 일이고 그마저도 때를 놓친다.

한국 종이 달력이 생겨서 또 좋은 점은 어제도 먹고 일주일전에도 먹은 그 팬케이크를 '작정하고 왕창 먹는 화요일'이 언제인지 계산하기 쉬워졌다는 것. 가장 간단한 계산 방법은 1) 부활절에서 거꾸로 7주를 세고 그 주의 화요일을 찾는 법. 2) 부활절부터 그냥 거꾸로 47일을 세는 법.
부활절 표시가 안된 한국 달력이라면 먼저 춘분을 찾는다.(3월 20일) 그리고 춘분 다음에 첫 보름달이 뜨는 날을 찾는다.(4월12일) 그러고 나서 돌아오는 첫 번째 일요일이 올해의 부활절이다.(4월 20일) 그리고 그 부활절부터 거꾸로 47일을 세면 기름진 화요일(3월 4일), 그 다음 날인 재의 수요일(3월 5일)에는 지난해의 종려나뭇가지를 태운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린다. 이날부터 40일간의 사순절이 시작된다. 40일간의 사순절이 끝나면 부활절이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이날 팬케익을 만들어서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져간다. 전날 전부 구워놓고 다음날 아침에 속을 채워넣고 싸서 살짝 구워서 가져간다. 올해는 다진고기랑 치즈를 넣어 네모로 접고 단팥 만들어놓은 게 있어서 연유랑 섞어서 길쭉하게 말았다. 그냥 반으로 접어도 되고 부채꼴로 접기도 한다. 원하는 것을 넣고 접으면 된다. 그냥 설탕이랑 곱게 간 견과만 뿌려도 맛있다. 견과가 다 뭐냐. 설탕만 뿌려도 된다.

브뤼겔이 그려낸 풍경은 역시나 흥겹다. 러시아의 마슬레니차 풍경을 담은 그림들은 온 사방이 눈으로 뒤덮여있는데 확실히 서유럽 나라들은 동유럽이나 러시아보다는 기후가 온화하긴 한가보다. 월리를 찾아라처럼 브뤼겔의 그림 속에서 팬케이크를 굽는 여인을 찾아보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작 더미와 구부정한 포즈의 저기 저 여인, 그녀의 손에 쥐어진 긴 손잡이의 네모진 철판은 분명 팬케이크를 위한 것이리.

저렇게 큰 팬을 가진 17세기 여인이 조금 부럽다. 나도 팬 두개로 동시에 굽지만 반죽이 얇아서 금새 구워져도 앞뒤로 뒤집기를 계속 반복하다 보면 팬이 3개여도 좋겠단 생각을 가끔 한다. 야밤에 한데 모여 기름 냄새를 맡고 있는 지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뭔가 감정이입이 되면서 왜 굳이 야밤인가 싶다가도 만약 이날이 1667년의 기름진 화요일 밤이라 생각하면 나름 납득이 간다. 동이에 잔뜩 남은 반죽, 그래도 한 번에 6장씩이나 구울 수 있으니 당신은 금세 구울 거예요.

사순절 전야(Накануне поста) 라는 체홉의 단편에는 40일간의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날 밤의 웃픈 풍경이 그려진다. '팬케이크 먹고 배불러서 공부가 안되는 것도 당연하지' 라며 분수 계산에 애를 먹는 아들을 격려하는 아빠, 너무 졸려서 잔다는 아들에게 무슨 소리냐며 더 먹어야 한다고 정색하는 엄마, 배가 이미 충분히 부름에도 불구하고 사순절 전에 최대한 먹어놔야 한다는 강박에 젖어 식탁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생동감 있다.
사실 가급적 육류를 제한하는 절식에 가깝지 사순절이라고 해서 완전히 엄격한 단식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니 사순절 전날 꾸역꾸역 채워진 위장이 40일 동안 포만감을 유지해줄 것도 아닌데 아 그 화요일 좀 더 먹어야 하는 건데.. 그 잼이랑 햄.. 그 팬케이크.. 그리고 그때 배부르다고 그냥 싱크대로 부어버린 그 차 한 모금... 하고 혹시 후회할까 두려워하며 식탁을 떠나지 못했을 서민들의 모습은 재밌다. 청어 손질 제대로 못한다고 두들겨 맞는 고아 방카를 생각하면 배불러서 더는 못 먹겠다는 소년은 얼마나 풍요로운가.

18세기의 여인들도 팬케이크를 굽는다. 뜯어진 바닥 타일에도 불구하고 17세기보다 훨씬 쾌적해진 부엌. 구운 팬케익을 양념도 없이 그냥 집어먹는 아이는 좀 눈치를 보는것 같고 엄마는 웃고는 있지만 뭔가 이를 악물고 바라보는 것 같고, 팬케익을 굽는 사람은 남편처럼 보이는데 구운 팬케익을 바닥에 저렇게 놔두다니 저기가 식당이고 21세기 위생국에서 감사 나오면 저런 건 얄짤없다. 그래도 아빠의 반죽 항아리는 거의 바닥을 보이는 것 같다. 입을 앙다물고 마지막 스퍼트를 내고 있다. 구워 놓은 팬케이크는 사실 별로 많아 보이지 않는데 아마 아이가 굽는 족족 먹어버렸는지도.











그리고 기름 냄새나는 왁자지껄한 팬케이크 풍경을 지나서 이제는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이다.
요란했던 사육제와 사순절 전야를 지나 피곤한 일상 끝에 홀연히 앉아 있는 광대. 사순절에 앞서 음식을 배터지게 먹은듯한 포만감은 그에게서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팬케이크 반죽이 담긴 항아리 대신에 그의 옆에는 아마도 물이 담긴 주전자가 놓여져있다. 회반죽이 벗겨진 차가운 성당 지하에서 이제 곧 자리를 옮겨갈 따뜻한 빛을 만끽하며 잠깐 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가 이날부터 40일을 세면 부활절이 된다.
실제로 기름진 화요일과 재의 수요일을 지나면서 이번 주 빌니우스는 드라마틱하게 따뜻했다. 주말에는 큰 장터가 열렸는데 늘 이시기는 그 장터를 맘편히 거닐기엔 너무 추웠는데 이번엔 공원 벤치에 앉아있을만큼 해가 나고 따뜻했다.
사실상 매일매일이 축제이고 풍요롭고 과한 세상이다. 이 풍족함을 종종 망각하는것에 대한 참회와 절제를 40일만 할게 아니라 365일 해야할텐데 부활절 티비에는 변함없이 소화제 광고가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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