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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huania

리투아니아 크리스마스 이브 쿠키- 쿠치우카이 Kūčiukai

 

2023년을 마무리하는 쿠치우카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리투아니아 마트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크리스마스이브 과자 '쿠치우카이' (Kūčiukai). 크리스마스이브를 뜻하는 kūčios라는 단어에  -(i) ukas라는 지소체어미를 덧붙이면 그 즉시 귀엽고 작고 소중하고 따뜻한 느낌의 단어가 된다. 그런 조그맣고 앙증맞은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므로 복수 어미를 써서  Kūčiukai라고 부른다.

딱 7g짜리 이스트+따뜻한물 200ml +설탕 60g 잘섞기.

이 시기에 마트에 수북이 쌓인 이들을 보면 순간 그 모습이 너무 친숙하여 마치 일 년 내내 마트에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나면 미처 다 팔리지 못한 쿠치우카이들은 한편으로 밀려난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사라진다. 어김없이 자기 할 일을 다하고 축제 전의 산만했던 분위기에서 한발 물러서서 또 다른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긴 휴식에 들어가는 쿠치우카스들.  

양귀비씨 (aguonų sėklos) 50g 추가

쿠치우카이 만들기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양귀비씨앗이다.

Marija čičirkienė "Raudoni laukai"

리투아니아에서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온통 빨갛게 물든 벌판을 봤다면 그곳이 양귀비가 자라는 곳이다.

Romualdas Rakauskas "Spalvoti laukai"

붉은 양귀비 벌판은 리투아니아 풍경 사진의 단골 소재이다. 많은 클래식 사진작가들이 붉은 양귀비 벌판 사진을 남긴다. 양귀비에도 마약용 양귀비와 관상용 양귀비가 구분되기 때문에 관상용 양귀비가 아니라면  양귀비 재배는 리투아니아에서도 법적 제재를 받는다. 영화 비치에서 얼떨결에 대마밭에 발을 들여놓은 디카프리오 일행을 수색하던 원주민을 떠올리면 여전히 좀 오싹한데 리투아니아의 새빨간 관상용 양귀비 벌판을 하루종일 헤집고 다닌다고 해도 벌판 주인에게 총질을 당하는 비극은 아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벌판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양귀비들. 저 양귀비 가지를 흔들면 양귀비 씨앗들이 경쾌한 소리를 낸다.


둥글고 딱딱한 양귀비 씨앗 주머니의 입구는 너무 아늑하고 비밀스럽고 씨앗들은 바깥세상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쏟아져 나와버린 것 같다. 사글사글거리는 소리도 들리는듯하다.

작은 양귀비들

그 소리는 곤봉 모양의 남아메리카 악기 마라카스 소리나 메밀껍질을 좀 엉성하게 채운 메밀베개 흔들 때 소리와도 비슷하다. 줄기가 여리여리하고 세게 흔들면 씨들이 빠져나오기도 해서 리투아니아에서는 악기로 사용하지는 않고 장식용으로 꽂아 놓거나 살살 씨를 털어 먹기도 한다.  

소금(druskos) 2g 추가

이스트를 풀어놓은 따뜻한 물에서 익숙한 냄새가 난다. 검은깨가 앙증맞게 박혀있는 쫀득한 흰색 증편 냄새이다.

밀가루 450 g 추가

밀가루 450g 이 사실 상당한 양인데 명절 내내 큰 그릇에 담아두고 오며 가며 먹는 가벼운 과자이기 때문에 한가득 만들어도 별로 부담되지 않는다. 신기한 건 이런 음식들이 아무리 맛있어도 음식에 함께 담겨서 대대로 전해지는 깊은 정서 때문인지 명절이 지나고 나면 먹고 싶단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 아무 곳에도 안 팔면 집에서도 충분히 만들어먹을 수 있지만 아무 데도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아 그런 생각이 사전에 차단되는 것도 같다.


손바닥에서 까끌까끌한 양귀비 씨의 질감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온다. 손에 안 묻을 때까지 열심히 반죽한다.

기름을 바른 그릇에 넣고 1시간정도 숙성하기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간혹 빵 반죽을 숙성시킬 때 큰 법랑대야 같은데 넣어서 욕실로 가져간다. 크지 않은 건식 욕실은 보통 화장실과 분리되어 있고 뱀처럼 꼬불꼬불한 형태로 벽에 붙어있는 라디에이터가 있어서 집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다. 우리 집은 욕실이 그리 따뜻하지가 않아서 그냥 방안의 라디에이터 근처에 놔뒀다.

한 시간 후

많이 부풀어 올랐다. 오후 5시였으나 이미 밤이 된 듯 어둡다. 생각해 보니 12월 22일은 절기상 동지.

8mm 정도의 두께로 밀기

시중에 나와있는 쿠치우카스 들은 보통 칸쵸 크기이다. 이것을 그냥 집어 먹기도 하지만 양귀비 씨 우유에 시리얼처럼 부어서 먹기 때문에 너무 부드러우면 사정없이 풀어져서 조금 딱딱한 것이 좋다.

피자커터로 자르기

집에서 만들면 좋은 것은 원하는 크기로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 빵집에서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하여 파는 쿠치우카스 들은 아주 작다. 한국에서 키즈카페에 갔을 때 인상 깊었던 편백나무방의 편백나무칩 정도의 크기이고 레고 사람의 머리 크기와도 비슷하다.

하나씩 뜯어서 옮겨담기

피자커터 사용하는 것을 재밌어하여 최대한 이리저리 밀어서 작은 크기로 만든다. 쿠치우카이가 작으면 작을수록 손바닥 안에 더 많이 담기고 그릇에 담았을 때도 더 수북해 보인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서로 직접 구운 쿠치우카이나 먹을 것들을 소분하여 나누기도 한다. 더 작을수록 더 많은 사람과 나눌 수 있으니 작은 쿠치우카이는 따뜻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예전에 친척언니가 보내준 달고나용 모양틀은 쿠키 굽기에 탁월한 도구이다. 특히 생강쿠키처럼 반죽이 질지 않을 경우 더 그렇다. 오븐 트레이가 하나뿐인데 반죽양이 많아서 세 번에 나눠서 굽는다.


피자커터가 지나갈 때마다 뽀드득 양귀비 씨앗이 부서지는 귀여운 소리가 난다. 숲 속에서 마이크가 딸린 녹음기를 들고 배회하던 우울한 유지태를 불러서 이 소리를 녹음해달라고 하고 싶을 만큼이다.

180도에서 8-10분 정도 굽기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딱딱해지기 때문에 오래 구울 필요는 없다. 쿠치우카이는 사실 굉장히 친숙한 맛이다. 어쩌면 심심하고 단조로운 맛이라서 쉽게 질리지 않는 건빵이나 동물 과자랑 비슷하다.

크리스마스 이브 식탁에 당당히 올라가는 쿠치우카이

예전에 한국에서 양귀비 씨앗이 마약류로 분류되어 금지식품인걸 모르고 몇 번 소포로 보낸 적이 있다. 이 디저트용 양귀비 씨앗들이 환각 작용을 일으키려면 몇 킬로를 입안에 털어 넣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이후론 보내지 않는다. 편백나무칩 같은 쿠치우카스 들을 한가득 담아서 명절 쇠러 왔다.


늦은 아침을 먹은 후부터 이브 식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했던 오늘 하루,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식탁은 그것의 풍성함과는 상관없이 방금 시작된 겨울 명절의 절정이다. 저녁을 다 먹은 후 양귀비씨앗 우유와 쿠치우카이를 디저트처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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