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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huania

리투아니아의 늪(Pelkė)과 미국의 장갑차(Šarvuotis)

M88 Hercules (구글출처)

 
 
빌니우스에서 47.5km 정도 떨어진 곳에 파브라데(Pabradė)라는 도시가 있다. 벨라루스 국경까지 10km 떨어진 이 도시에는 리투아니아의 군사 훈련장이 있다. 칼리닌그라드의 국경도시 키바르타이(Kyvartai)와 함께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이다.     

지난 수요일 이 파브라데의 늪지대에 70톤 규모의 미국 장갑차가 빠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미군 4명도 함께 실종됐다. 나토 가입국인 리투아니아에는 1000명가량의 미군 병력이 순환 주둔한다. 이런 장갑차는 전투에 나가는 기갑장비들이 어딘가에 빠지거나 파괴됐을 때 끌어내거나 작동에 문제가 생겨 고쳐야 할 때 투입되는 장비이다. 궤도나 엔진 등만 보면 전차 장비와 흡사하지만 공격용 무기는 탑재되지 않았고 대신 크레인 같은 장비들이 있어서 전투 장비들의 회수를 돕는다. 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가장 큰 장갑차 회수 차량인 M88 Hercules 자체가 늪에 빠져버렸다는 것이 한편으론 아이러니했다.  
 
사람은 보통 이름을 지을때 어떤 사람으로 자라났으면 하는 마음에서 미래지향적 발상으로 이름을 짓지만 사실 도시 이름은 도시의 지형이나 역사를 반영하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어떤 리투아니아의 도시 이름을 들으면 상상하고 추측하게 되는 자연환경이나 과거의 장면들이 있다. 그런 경향은 작은 지방 도시나 시골 마을로 갈수록 더 짙어진다.
 
파브라데 Pabradė라는 도시 이름을 들었을 때 Pabraidyti라는 리투아니아어 동사가 생각났다. 얕은 수심의 물이 흐르는 곳에서 바지를 동동 말아 올려 접고 발을 담그고 잠시나마 물살을 느끼며 걷는 동작, 헤엄까지는 아니지만 공원 산책 중에 시내가 있으면 잠깐 아이들의 양말을 벗겨 '잠깐 발에 물 좀 담그고 놀래?'라는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동사이다. 이 도시가 이 단어와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장갑차 사건이 일어난 지형을 보니 역설적으로 절대 그렇게 발을 담가서는 안 되는 지형이라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걸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미국 장갑차가 빠진 곳은 정확하게 늪이지만 늪이 위치한 포장되지 않은 숲 지형은 지난 세월의 전쟁들에서 서유럽에서 러시아를 향했던 수많은 탱크와 말과 대포들이 곤욕을 치른 지형이기도 하다. 심지어 저런 물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비와 눈으로 뻘로 변해버린 숲에 빠져 옴짝 달짝할 수 없었던 희생양들을 떠올리게 한다. 

 

구조 작업 (Delfi 출처)

 
 
장갑차 인양을 위해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미군이 참여했고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준설기 두대와 굴착기등이 동원됐다. 60톤 규모의 장갑차를 덮고 있는 흙과 수초들과 물들을 퍼내면서 장갑차가 인양되었을 경우 그 무게를 지탱해야 할 주변 지반을 튼튼하게 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됐다. 어떤 경로로 장갑차가 물에 빠지게 됐는지는 여전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장갑차 회수 장비들은 전투 장비들에 비해 시야 확보가 어렵고 60톤이 넘는 장갑차였다면 사람이 탈출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빠져들었을 거라는 의견이 많다. 일반적으로 가라앉는 차들은 수압으로 인해 문을 열기가 힘든데 식물들과 흙으로 가득한 늪지대라 더욱 어려웠을 거다. 이 M88 장갑차를 인양하는데 또 다른 M88 장갑차 두대가 동원됐다. 
 

Pabradė 사고 현장 (Delfi 출처)

 

사실 처음에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나토 사무총장이 미군 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를 했다가 정정했고 사건이 발생한 지점은 벨라루스에서 고작 5킬로미터 떨어진데다가 군사 훈련 중인 직업 군인들이 그런 늪지대의 위험성을 몰랐을 리도 없고 해서 여러 소문들이 많았는데 6일에 걸친 작업 끝에 월요일에 장갑차가 인양됐고 이어서 실종된 미군들의 시신 4 구도 발견되었다. 주말에는 빌니우스 대성당에서 이들 실종된 미군을 기리는 특별 미사가 있었다. 사실 이 사건이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이 입은 불필요한 손실처럼 확대되면 리투아니아 국방에도 좋지 않을 거라는 우려가 많다. 특히 미국의 정책이 자국 이익 우선 주의로 흘러가고 유럽은 유럽끼리 알아서 잘 살라는 기조로 흘러가면 이 사고가 미군 철수의 명분을 제공할 수도 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의 늪에 빠진 장갑차가 혹시 미래의 어떤 중요한 사건의 발단이 되거나 맥거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력을 펴보기에도 리투아니아는 너무 작은 나라인 걸까 정작 미국에서는 큰 반응이 없다. 한편으로는 사망한 미군들이 자원병들이고 백인이 아니어서 딱히 이슈를 만들지 않는 걸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리투아니아가 백방으로 미군 구조에 힘썼기 때문에 앞으로의 미군 주둔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어떤 각도에서 봐도 자주국방이 불가능한 리투아니아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리투아니아를 지키려 짧은 시간 주둔했다가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중이다. 그 내막이야 어찌 됐든 젊은 군인들이 생명을 잃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리투아니아의 습지 (구글출처)

 
 
'Pelkė nemėgsta atiduoti to, ką pasiima.'
'늪은 자신이 가져가는 것을 되돌려주는걸 좋아하지 않는다.' 
 
장갑차가 인양되기 전 인터뷰에서 리투아니아 국무총리가 내뱉은 말을 직역한 건데 일어난 사건은 분명 비극적이지만 늪의 특성을 한 번에 정리해 주는 문장이라 굉장히 큰 인상을 받았다. 정치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 한번 가져가면 되돌려주지 않고 결국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는 늪, 죽은듯한 적막 속에 휩싸여있지만 빨려 들어오는 것들과 함께 계속 성장하고 자존하는 곳이다. 
 
리투아니아인들은 리투아니아 이런 지형에 익숙하다. 지속적으로 비가 오고 한밤중에 폭우가 내리는 경우가 많아서 하루사이에 엉망이 된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가다가 바퀴가 빠져버리는 것은 정말 흔한 일이다. 이런 습지는 리투아니아 전체 면적의 10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  

 

리투아니아의 습지 (구글출처)

 
 
리투아니아에서는 늪지형은 보통 Pelkė, 오랫동안 분해되지 않고 쌓이는 식물층이 두터워진 상태로 생겨나는 이탄습지는 Dupynas, 물이 잠겨있는 보통의 습지는 대개 Šlapynė라고 구분해서 쓴다. 조금 음산한 느낌을 주고 영화에서 본 늪의 정취를 가장 많이 풍기는 장소들은 간혹 Liūnas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도시를 벗어나 조금만 숲으로 들어가도 크든 작든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들로 이 개념 모두 굉장히 흔하게 쓰인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늪지대인데 저런 골칫거리를 만드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늪지대를 포함한 습지를 보존하고 지키려는 이유는 뭘까. 

 

리투아니아의 습지 (구글출처)

 
 
이들은 완전히 독립적인 생태계이다.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물과 육지가 한 장소에 존재하는 아주 독특한 장소이다.  비가 많이 오지만 여름이 시원한 리투아니아에는 증발보다는 축적되는 수분이 많아서 습지 형성이 쉽다. 나무를 베지 않고 숲을 보호하는 것 이상으로 습지를 보호하는 것이 지구 환경에 중요한 것은 이런 지형이 단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선 발견하기 힘든 희귀 식물들과 미생물들이 많이 서식해서 학술적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의 서늘한 기후에서 수분양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탄습지나 늪 지형에서는 산소공급이 적어 죽어서도 분해속도가 느린 식물들이 계속 쌓여서 온실 가스를 비롯한 유해화학물질들을 분해하는 탄소 저장고 역할을 한다. 느리게 분해되는 식물들이 쌓이고 쌓여서 두터운 층을 만들어 되는 것이 이탄이다. 이탄은 탄소 함유량이 석탄에 비해 적고 지표면에서 캘수있다. 하지만 이탄채굴은 전 세계적으로 늪 보호를 위해 금지하고 있다. 얼핏 쓸모없는 습지로 보여서 인위적으로 메우거나 파괴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생태학적으로 중요해서 보존하고 있다.  
 
습지의 물을 제거하고 메우게 되면 이산화탄소와 질소 산화물같은 온실 가스들이 대기 중으로 방출된다. 생물 다양성의 상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이탄이 말라버리면 물을 저장하는 능력을 잃기 때문에 비가 와도 그 물을 흡수하지 못하고 다른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양의 물을 유지하는 능력도 잃게 되므로 결국 습지는 사라지게 된다. 이탄에 불이 붙는 화재 위험도 있다. 리투아니아 곳곳의 작은 도랑 같은 것 하나를 덮는다고 해서 무슨 영향일까 싶지만 그런 일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무시 못할 면적일 거다.
 
장갑차와 인명 구조를 위해 불가피한 작업이었지만 구조 작업으로 일부 파괴된 파브리데의 늪지대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이미 많다. 아무리 좋은 의미라고 해도 인간의 개입은 자연에 큰 생채기를 남기고 또 그렇게 파괴된 자연이 결국 인간의 취한 적절한 조치로만 회복된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아이한테 장갑차가 늪에 빠진 사고 소식을 알려줬다니 장갑차를 '아르마딜로'로 이해했다. 찾아보니 아르마딜로는 리투아니아어로 Šarvuotiniai라고 한다. 장갑차에서 아르마딜로까지 별로 멀지 않다... 결국 각자 중요한 것들에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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