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중에 유통되며 현역으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유로 동전에 '희귀하다'는 수식을 다는 게 좀 웃기지만 어쨌든 산마리노의 동전이 독일 독수리 동전이나 아일랜드 하프 동전보단 보기 힘든 동전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얼마 전 산과 성탑이 그려진 산마리노 동전이 또 굴러들어 왔다.
일전에 이미 산마리노 사람들이 남겨놓은 성탑에 대한 아주 장황한 애정을 늘어놓은 적이 있기에 그냥 그 동전이 유난히 많이 풀렸나 보다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생김새가 사뭇 다르다. 오래전에 내게 증명사진 한 장을 남기고 사라진 그 아는 동전은 뭔가 명산의 아련함 속에서 삐죽 튀어나온 성채들이 되려 나를 조망하고 있다는 선한 인상을 주었는데 이 동전은 기념품 가게의 못난이 마그넷처럼 좀 우락부락하달까.

50 센트라고 생각했던 그 동전은 알고 보니 20센트 동전이었고 산마리노인들은 50센트 동전에도 또다시 티타노 산과 세 개의 탑을 고스란히 그려 넣었다. 이들은 이 유적을 정말 사랑하나 보다.
이 동전의 모습은 완만한 티타노산 기슭을 지그재그로 가로지르던 등산객들이 저 멀리 나타난 성채를 보자마자 기쁨에 겨운 나머지 쿨픽스 950 정도 화소의 카메라 줌을 당기고 당기고 또 당겨서 찍은 사진 같다. 그러니 피사체의 크기는 정정당당하게 커졌지만 화질은 포기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그 기세에 나 또한 가세해서 줌을 당겼으니.
어쩌면 산마리노 조폐공사 직원들은 산과 성탑을 좀 자세하게 표현하자는 파와 추상적으로 표현하자는 파로 격렬하게 나뉘었었나 보다. '거봐, 아무리 봐도 별로잖니'라는 결론이 나자마자 퀵을 불러 경쟁에서 밀린 2차 도안을 조폐국으로 보낸 듯이.
50센트 속 해발 700미터 남짓한 티타노산의 산세는 등반자들이 쉴 새 없이 내리꽂은 피켈 자국을 간직한 알프스의 설산처럼 뜬금없이 험준해 보인다. 탑 위의 깃발들은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온 북서풍과 아드리아해에서 불어오는 짭조름한 해풍에 맞서 펄럭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쌀쌀한 기운마저 감돈다. 따스한 느낌으로 충만했던 지난번 산마리노와는 다르게.

동전을 보며 영화 <글래디에이터 2>와 <리턴>을 생각했는데 전자는 콜로세움을 활보하던 당대의 러셀 크로우를 잊지 못한 리들리 스콧이 질척거리며 야심 차게 만들었지만 덴젤 워싱턴과 폴 메스칼, 페드로 파스칼이 합세했어도 러셀 크로우와 호아퀸 피닉스의 카리스마를 딱히 소환하지 못했고
후자는 오디세우스의 귀환에 관한 영화인데 줄리엣 비노쉬가 랄프 파인즈를 기다리며 다소 신경질적으로 풀메이크업 상태로 베틀을 돌리고 천신만고 끝에 집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당당하게 활시위를 당기지만 마냥 못 미덥고 텔레마코스는 4학년 학급에 앉아있는 6학년 같았다.
그런데 때마침 수중에 들어온 산마리노 동전에 대해서는 티타노 산세에 딴지를 거는 것 말고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 그래서 과연 검투사의 현역시절과 오디세우스의 시대의 산마리노에는 누가 살았을까.
사실 산마리노는 석공 마리누스가 서기 301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는데 로마는 진작에 제국이 되어 연이어 걸출한 폭군과 생명력없는 황제들을 배출하며 몰락으로 가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글래디에이터가 와신상담하던 영화 속 2세기의 산마리노는 리미니 같은 도시에서 그나마 가까우니 로마의 식민 도시 사이의 산중턱에서 여전히 아무도 모르게 미래의 산마리노인 만을 위하여 평화롭게 존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좀 더 오래 전의 한니발의 이동 경로를 생각하면 코르토나 정상에서 보였던 트라메시노호수가 그나마 산마리노에서 가까운 지점인데 바다에 가까우니 좀 눈독을 들였을 수도 있겠으나 가까스로 승자가 된 한니발이 저기까지 구태야 귀찮게 뭐 하러 가나 싶어서 바로 남하했는지도 모른다.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을 코끼리까지 대동하고 고집스럽게 넘은 그에게 티타노산은 아마도 동네 언덕처럼 시시하게 보였을지도.
로마가 트로이 전쟁까지 끌어와서 그들의 후손의 후손의 후손을 건국의 아버지로 만들고 받든 것이 기원전 8세기인 것을 생각하면 산마리노의 탄생일인 서기 4세기는 상대적으로 너무나 최근의 일이다. 게다가 기원전 12세기에 이 섬 저 섬을 유랑했다던 오디세우스의 모습을 마지못해 떠올리자니 석공이 세웠다는 산마리노의 설화는 빼도 박도 못하는 팩트처럼 다가올 만큼 근현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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