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2015.03.10 16:20



죽을때까지 딱 한 종류의 통조림만을 먹어야 한다면 어떤 통조림을 선택할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하하하.

아마도 이 통조림이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뜨거운 밥에 얹어 먹으면 의외로 너무나 맛있는 이 통조림. 

통조림 이래봐야 가끔 토마토 소스나 스위트 콘, 파인애플 통조림 따위를 필요에 의해 사는게 전부이지만 

이 통조림은 가끔이지만 정말 먹고 싶어서 사게 된다. 

게다가 최근에 알게 된 재밌는 사실은 이 콩 통조림이 부대찌개의 중요한 재료라는것. 

예전에 서울에 살때 동네 모퉁이에 바로 부어서 끓여 먹을 수 있게끔 부대찌개 재료를 스티로폼 그릇에 포장해서 팔곤 했었는데

그때 그 그릇에 이 콩들이 들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이 통조림 콩도 처음에 따서 먹을때가 맛있지 두번째 먹을땐 맛이 좀 별로다. 모든 통조림이 그렇듯.

그래서 먹다 남은 통조림 콩으로 벌써 두번씩이나 부대찌개를 끓여먹었다. 그런가? 정말 부대찌개는 이 콩 맛인가?



그래서 오늘 통조림 통조림 하다가 생각난 영화가 바로 이 영화이다. 

이 영화하면 먼저 생각나는것도 저 두 인물 사이의 갈등의 정점인 저 매력적인 레몬 머랭 파이라기 보다는 통조림이다.

이 영화를 통해서 통조림을 뜨거운 물에 통째로 넣어 데워서 먹을 수 있다는것도 알게되었다.

가족에게 끼니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만큼 건강하지 못했던 엄마는 때때로 통조림을 데워서 식탁에 올리곤 한다.

나이 어린 꼬마의 미각은 또 얼마나 발달했던지 기특하게도 살림이 여의치 않은 엄마를 원망하는 대신 

스스로 식료품점에 들러 재료를 사서는 이런 저런 요리를 해보기도 한다. 물론 가족의 반응은 냉정하기만 하다.

자기 자신을 돌보기에도 역부족인 엄마. 그런 엄마를 간호하기에 여념이 없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누군가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결핍된 상황에서 소년은 부모의 존재속에서 그들의 부재를 느끼며 자라난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더 맛있고 환상적인 음식을 해 줄 수 있는 새 엄마가 생겼을때,

파이며 케잌이며 고기를 굽는 꿈꿔왔던 엄마가 생겼을때의 상황은 오히려 역설적이다 .

그 자신 역시도 누군가의 보살핌이 절실했던 아버지는 재혼한 부인에게 모든 관심을 쏟고

아이에게 남겨진 과제는 새 엄마보다 더 맛있는 파이를 만드는 것. 그녀보다 더 맛있는 파이를 아버지에게 대접하는것.



조니 뎁과 마찬가지로 헬레나 본 햄 카터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팀 버튼이 감독이 아닌 영화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것 같다.

팀버튼의 그 망할 상상력과 연출력속에서 이 두 배우의 얼굴과 표정은 이미 화석이 된지 오래이다.

<파이트 클럽>에서도 브래드 피트와 에드워드 노튼을 지탱했던것은 그녀였고

사실 이 영화에서도 얄밉기는 커녕 꼬마 주인공보다 오히려 더 설득력있는 인물은 그녀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머시니스트>의 제니퍼 제이슨 리의 역을 그녀가 했어도 은근히 잘 어울렸듯. 

사실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저마다의 결핍과 상처를 지니고 있고 진정한 사랑과 관심에 목말라한다.

영화가 영국 요리 평론가이자 셰프의 자전소설을 바탕으로 한 탓에 소외된 소년의 관점에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으니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한 새 엄마의 노력, 여전히 아들에게 냉담한 아버지라는 설정 모두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새 엄마의 머랭 파이 만큼 맛있는 파이를 만들기 위해 그녀와 경쟁하고 발전하는 소년과

결국 자신의 힘으로 자기 길을 개척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오히려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애정과 관심을 보여준 사람은

새 엄마였다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그녀는 그에게 무관심하지 않았기에.

<어거스트 러쉬>라는 나름 감동적인 영화에서도 유일한 실패라고 느껴졌던 이 아역배우의 캐스팅. 

그 영화 이후 선입견이 생겨서인지 이 배우가 출연한 어떤 영화를 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게 사실이다.

헬레나 본 햄 카터를 상대로 하기에도 역시 개성없는 연기였다. 

이런 캐릭터를 이렇게 설득력없는 캐릭터로 바꿔버리다니 말이다.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2.12.30 08:31

 

 

<사이드웨이 sideways>

 

세상에는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와인을 좋아하려는 사람이 많은게 확실하다.

와인이라는 녀석 자체가 그런 느낌을 준다.

마치 이유없이 그냥 친해지고 싶은 그런 친구. '나 걔랑 되게 친해'라고 자랑하고 싶어지는 친구. 

입어서 예쁜 옷도 아니고 먹어서 맛있는 음식도 아니지만

맛있게 마실 줄 알고 녀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 할 수 있을때 우리의 존재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믿게 하는 녀석.

특별히 와인을 좋아하는것은 아니지만 와인을 마실 기회는 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비싼 돈 주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와인들이 분명히 있고 세일기간이라도 겹치면 비싸다 싶던 와인도 맛 볼 기회가 있다.

차이는 모르겠다. 정말 비싼 와인을 마셔본 적이 없으니

 마셔보고 '정말 차원이 다른 맛이군'이라고 실감하지 않는 이상

오래된 와인이 항상 비싸고 맛있다는데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에서 다이앤 레인이 코르토나에 오래된 빌라를 사고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장면이 있는데,

창고에서 라벨이 전혀 붙여져 있지 않은 먼지 쌓인 수십병의 빈 와인병을 발견하는 장면이 있다.

그냥 뭐랄까 비싼 와인에 목매고 코르크 마개를 훈장처럼 수집하는 스노비즘에 코웃음치게 하는 장면이랄까.

2006년산 와인이 우연히 눈에 띄어서 한 병 샀는데 와인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때마다 2006년 산 와인을 사보기로 했다.

어쩌면 우리 두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해일지도 모르니깐.

시간이 흐를 수록 우리의 2006년산 와인은 구하기도 힘들어질거고 비싸질거다.

모르긴해도 나도 언젠가는 부쩍 비싸진 2006년산 와인을 돈아까운줄 모르고 사려고 들지 모른다.

오래되고 비싼 와인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 추억과 동갑내기 녀석이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와인병에 새겨진 네자리숫자에 시선이 꽂힌 사람들은 마트 한구석에서 자신의 옛추억을 떠올리는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라면 오래된 와인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해보는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다.

이 2006년산 와인을 쳐다보고 있으니  문득 다시보고 싶어진 영화가 있다.

알렌산더 페인의 <sideways>

 

 

내가 산드라 오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영화인

<투스카니의 태양>에도 그녀가 출연했기 때문이다.

연애 상대가 결혼을 앞둔 남자인것을 알고 헬맷으로 코가 부셔질때까지 두들켜 패는 사이드웨이의 스테파니나

동성연인에게 차이고 절망상태에서 임신한 몸을 이끌고 투스카니로 날아오는 패티의 생명력은 뭔가 닮은구석이 있다.

 

계속 저장해놓고 생각날때마다 꺼내보고 싶은 웰메이드 영화이다.

와인을 좋아하고 좋아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가이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영화일테고

그들이 쏟아내는 찬사와 온갖 메타포들이 비단 와인에만 국한된것이 아니기에 또 의미있다.

이것은 우리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와인잔속에서 부딪쳐 흘러내리며 수만가지의 색다른 질감과 빛깔을 뿜어내는 와인들처럼

인생에는 때가 되면 잊어야하는 슬픈 감정이 있고 한번도 느껴본적없는 희열의 순간이 있고 분노도 있고 실망과 절망도 있다. 

태어나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사라지는 그런 별 같은 우리의 감정말이다.

 

 

와인의 맛에도 남성적인 맛이있고 여성적인 맛이있단다.

커피에도 시큼하고 달고 쓰고 탄맛이 공존하는것처럼.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전투적인 포도들이 있고 아무데서나 막 자라지 않고 낯을 가리는 포도들도 있댄다.

이혼을 한 남자와 결혼을 하려는 남자가 있고

원하는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아는 짐승같은 남자가 있고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는 능글맞은 남자가 있다.

결혼을 앞 둔 한남자의 머릿속은 여자들과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차있고

소설가라는 이상과 중학교 영어교사라는 현실사이에서 절망하는 이혼남은 

전부인의 결혼소식과 출판될지 않을지 모를 자신의 소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지경.

한가득의 와인과 한상자의 원고를 싣고 두 남자는 부랴부랴 여행을 떠난다.

 마일즈의 엄마집에서 두 남자는 마치 숙성이 덜 된 신생와인처럼 덜 자라서 미숙한 소년의 행동을 보여준다.

여자와 자는데에만 혈안이 된 폴의 망할 욕정은 사람들이 시음 후에 쏟아부어버리는 항아리 속 와인같다.

'나는 영화배우고 난 내 육감과 기분에 따라서 행동해.도대체 넌 왜 나한테 그 육감을 모른채하라는거야.!'

넌 와인이랑 책을 그렇게 잘 알면서 도대체 왜 내 욕정은 이해하려 들지 않는거냐!'

출판이 무산된 사실을 안 무기력한 마일즈는 그 와인을 항아리채 들이켜마신다.

'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휴지에 묻은 똥자국같은 존재라고!'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존재의 이유로 직시하고 저돌적으로 행동하는 폴과

진정 원하는것과 현실사이의 괴리감을 감추고 와인에만 몰두하는 마일즈는 너무 다른 두 사람이다,

스테파니와 마야가 다른것처럼. 피노와 카베르네가 다른것처럼.

 

 

'이룬게 하나도 없어'

실패한 결혼과 무산된 출판. 과거에 대한 미련으로 새롭게 다가오는 사랑의 감정에도 솔직해 질 수 없는 마일즈.

그냥 와인 저장고에 가지런히 놓인 와인들처럼 쌓여가는 먼지와 함께 조용히 늙어가면 안되는것일까.

하긴 포도송이도 와인으로 탄생되어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데

좀더 쓸모있는 존재로 남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헛된것이라고 말하는것도 몹쓸짓이다.

 

와인에 대해 마일즈와 마야가 대화를 나누는 이 장면은 아마 많은 이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다.

피노 와인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기술적으로 술술 서술해내는 마일즈와

와인을 재배하고 세상을 떠나간 옛 사람들과 그 해의 햇살과 흘러내린 비의 역사를 고이 간직한 와인의 생명력과

숙성되고 변하고 사라지는 와인의 진화를 서정적으로 찬미하는 마야.

마치 세상의 와인들이 수천가지의 다른 방식과 이론으로 수십만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 길러지듯

마일즈와 마야는 상대의 사고방식과 인생관에 조금씩 매료된다. 

 

 

나와 함께 있었을때 행복하지 않았던 사람의 행복을 바라봐야하는것처럼 가슴아픈것이 있을까.

폴의 결혼식이 끝나고 전부인의 임신사실까지 알아버린 위.기.의 마일즈는 피로연에도 가지 않고 집으로 부랴부랴 달려와

결혼 10주년을 기다리며 고이 모셔둔 61년산 와인을 망설임없이 꺼내든다.

거의 톰이 갈라진 벽틈으로 숨어들어간 제리를 찾을때의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마치 차속에서 와인병을 꺼내들고 산기슭을 달리며 분노의 와인을 들이킬때처럼, 항아리째 와인을 퍼부울때처럼

절망의 순간에서 들이키는 와인은 우아하게 음미하고 찬미하는 와인보다는 훨씬 덜 가식적이다.

가장 솔직할때도 가장 솔직하지 않을때도 공교롭게도 마일즈는 와인을 마신다.

 

 

결국은 햄버거가게에서 콜라잔에 몰래몰래 부어 61년산 와인을 전부 마셔버리는 마일즈.

실패한 결혼과 과거에 대한 미련처럼 특별한 날과 특별한 사람을 위한 의미부여와 함께

창고에 틀어박혀 있던 와인은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다른 의미로 사라진다.

  와인 병마개를 따는 그 날이 바로 의미있는 날이 될거라는 마야의 말처럼.

집으로 돌아온 마일즈는 자동응답기를 통해 마야의 목소리를 듣는다.

 

 

마일즈가 마야가 있는 솔방을 향하는 길로 우회전을 하는것으로 영화는 우리에게 행복한 결말을 상상하라는 주문을 내린다.

하지만 아무렴 어때. 우리는 결과에 초연해져야 하는것이 아닐까.

 

영화 <봄날은 간다>의 대사가 생각났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것은 마일즈의 생각이고 스테파니의 생각이다.

 

마야가 예찬한 와인의 생명력을 우리를 둘러싼 수만가지 감정의 생명력에 견주어 본다면

우리는 변하는 사랑과 사람과 인생관과 끊임없이 화해할 필요가 있는것 같다.

와인은 어찌보면 코르크마개에 막혀 썩어가는것이 아닐까.

곰팡이 핀 치즈처럼 공기중의 수분과 열과 시간의 흐름속에서 그들은 부패해간다.

우리가 변해버린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듯 슬픔도 좌절도 그져 감내해야하는것이 인생 아닐까.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2.12.03 23:44

 

 

<호노카아 보이>속의 정지된 마을

 

리투아니아에 살면서 눈에 무뎌진지 오래이지만 그래도 첫눈은 항상 누구에게나 상징적인가보다.

'오늘 첫눈이 내렸다'라는 평서문을 머릿속에 담고 시작하는 하루.

반쪽짜리 식빵 네 조각을 펴놓고 땅콩잼 한층 딸기잼 한층 땅콩잼 한층을 발라 우유와 먹었다.

여기엔 내가 좋아하는 땅콩잼과 포도잼이 세로로 길게 섞인 그 스트라이프 잼이 없다.

사실 작년에 한국에 갔을때 그 잼을 사오려했지만 막상 서울에서 한번 먹고나니 너무 시시해보였다.

내가 그 잼을 리투아니아까지 배달해 왔을때 느낄 만족감이 그리 가치있어 보이지 않았다고 해야할까.

그 별것아닌 만족감을 충족시키는것은 어떻게 보면 그 물건을 과대평가하는것은 아닐까.

태어난곳에서 떠나와 다른 세상에 정착해서 살아간다는것.

철저한 계획에 의한 이민으로 해외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을것이고.

우연처럼 흘러들어왔다가 돌아갈 기회를 놓친사람들이 있을것이고. 

중요한것은 인생이란것이 칼로 탁하고 토막을내서 1막2막으로 정리할 수 있는 물건은 결코 아니라는것.

어떤 동기들에 일정량의 우연과 필연이 결합되어 인생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런 인생과 그 속의 일상들을 미니멀하게 최소한의 시나리오로 조용하게 풀어가는 영화들이 좋다.

우스운 습관들을 장난꾸러기처럼 의미없이 나열하고 애정을 가지고 사용하는 자기만의 단어가 있는 주인공들.

혼자있는것에 익숙하고  친구가 필요한것같지 않아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

음악으로 치면 yo la tengo나 slowdive 같은 느낌을 주는 영화들.

<천국보다 낯선>의 에바나 <반칙왕>의 임대호같은 친구들.

나에게 있어 영화를 보는 행위는 그런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내어서 더 많은 인생의 동기동창을 만들기위함이다.

 

내년이면 이곳에서의 생활도 5년째로 접어든다.

그래서 유독 외국에서의 생활을 그린 영화들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우리나라 영화속에서 그려지는 해외생활이란 아직까지 그저 너무 로맨틱하고 화려하기만하다.

본질을 보여주는데 서툴다고 해야할까.

(지난번에 홍상수의 밤과낮을 끝까지 보지 않은것은 그래서 너무 후회된다. 그의 눈에 비춰진 파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여행을 다니거나 해외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사람이라거나 으례 여유로운 사람일거라는 편견이나 일종의 피해의식같은게 있는걸까.

영화속에서 자연스러운 일상을 접하기란 쉽지않다.

해외생활을  보여주지만 오히려 그 생활에 대한 암묵적인 로망으로 가득차있다고 할까? 

몇몇 일본영화들에서 아주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을 가능케하는 그들의 경제수준은 둘째치고라도

카피와 응용, 자기화와 토착화에 능한 일본 사람들이니 뭐 당연한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그들의 감성이 우리의 그것보다 세련된것은 아닐까.

 

 

<카모메 식당>의 헬싱키나 <냉정과 열정사이>의 이탈리아.

북유럽스타일과 '로맨스인 유럽'을 기본 골격으로 했다고는 해도 영화속에서 보여지는 장면와 내러티브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마치 그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처럼.

그게 혹시 해외에서 오래 살아 본 감독이 찍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감독이 찍은 영화의 차이라면 더이상 할말은 없다.

어쩌면 감독의 로망을 내 로망인척 감정이입하며 봐야하는 영화가 불편하고 싫은건지도.

 

운좋게 보게된 영화 <호노카아 보이>

한국어로는 <하와이언 레시피>로 번역이 되었다고 한다.

하와이에 머물며 소일하는 일본청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민하고 불평불만많은 여자친구역으로 짤막하게 아오이유우가 출연한다.

극중 등장인물들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등장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별이 반짝이고 달무지개가 뜨는 보석같은 해변으로 장시간을 날아 하와이까지 여행을 오지만

얼굴이 예쁘다 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녀의 마음과 표정은 정말 화산처럼 말라 비틀어진 상태이다.

여행객의 대부분은 지겹도록 똑같은 모토로 여행을 떠난다.

화산같은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를 토대로 떠나오지만 결국은 화산만보고 돌아온다.

그 내면의 일상성을 버리지 못하고 저 아오이 유우처럼 불편함과 단조로움만 불평하다 여행을 망치는것.

산이 큰것도 죄고 길이 하나뿐인데 왜 이렇게 길을 헤매냐고 몰아붙이는것도 바로 여행자의 역설이다.

여행후에 여자친구와 헤어진 레오는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동네영화관 영사실 보조로 살아간다.

 

 

빌니우스에 살다보면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는 이곳에서 느끼는 이 정적이 과연 정당한것일까 라고 스스로에게 묻게된다.

조금 작은 도시로 가면 빌니우스는 상대적으로 대도시같다.

주말을 여름농장에서 보내고 그 조그만 도시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급 피로감을 느낀다고 한다.

나에게는 시골같은 그 도시가 아주머니에게는 문명으로의 귀환같은것인거다.

고요함이란 그렇게도 상대적인것이다.

그 지독한 정적을 레오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허심탄회하게 서술해 나간다.

 

 

심지어는 어딜가도 누구에게도 나란 존재가 필수불가결한 존재는 아니다.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절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

낯설은 상황들에 자연스럽게 대처해나가는 레오의 담담한 나레이션은

뭐랄까 비이 할머니가 양배추롤에 끼얹던 말갛고 담백한 스톡같이 들렸다고나 할까?

영화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정지된 컷들.

사용되지 않은채 그저 싸여있는것만 같은 일련의 물건들.

파도치는 바다.

사람들이 염원하는 달무지개.

많은것이 필요한 삶을 사는것은 피곤한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은 그냥 물건일뿐 그리고 자연일뿐.

 

 

하지만 그러한 정적속에서도 누군가의 일상은 세상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더이상 팝콘 기계 옆에 앉아서 낮잠을 잘 수 없게된 할아버지와

안마기를 차고 손님을 기다릴 수 없게 된 매표원의 일상이란것이 존재하고 있더라.

 

 

우연히 밀가루 배달을 왔다가 비이 할머니에게서 점심을 대접받는 레오.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는다는 레오의 말에 적적하게 사는 할머니는 매일 점심을 먹으러 오라는 호의를 배푼다.

매일매일 정성스레 차려진 할머니의 점심을 먹고  사진 한장씩을 남기는 레오.

그래도 인스턴트 라면으로 가득한 소포를 받는 기쁨은 그것과는 또 다른 가치이다.

이 폴라로이드 사진들은 너무 슬프게 보인다.

폴라로이드와 비디오카메라는 왠지 다시는 반복할 수 없는 일을 굳이 잡아두려는 미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듯 보여서 싫더라.

 

 

 유일하게 요리과정을 발랄하게 보여주는 이 양배추롤은 리투아니아식 양배추 롤과도 기본적인 레시피는 똑같은것 같다.

어떤 양배추 잎사귀는 마치 배추잎처럼 보이더라.

양배추가 무척 얖고 크고 초록빛이 나는게 훨씬 더 싶게 롤을 만들 수 있게 보인다는것.

근데 마요네즈에 크림까지 끼얹는것은 좀 많이 느끼할것 같고

리투아니아에서는 마요네즈대신 케찹을 넣어서 빨간 국물로 만들어 내는 때도 있다.

사실 일본의 여러음식들이 그렇지만 특히 카레나 돈카츠, 고로케 같은 요리들은 전부 기존의 외국요리를 응용해서 만든것인데

그래서 일본인들에게는 일종의 카레 컴플렉스 같은게 있는것같다.

영화 <텐텐>에서도 그렇지만 항상 카레에 망고잼이나 망고 처트니 같은것을 첨가해야한다는것을 강조한단 말이지.

잼이나 처트니 같은것은 또 얼마나 아시아적이지 않은것인데 말이다.

 

 

하와이에 정착한 일본 이민자들의 고요하지만 외롭고 적적하나 달달한 삶을 보여주는 영화.

평생을 사는 사람들도 한번 볼까말까한 달무지개를 보겠다고 태평양을 건너 오는 사람들.

페넬로페 크루즈에 안달하고 자신의 성적 판타지에 관대한 어느 할아버지의

병상에 누운 부인을 바라보고 앉은 뒷모습에서도

댓가없이 매일매일 진수성찬을 차리지만 질투에 불타 땅콩을 다지는 할머니에게서도

얻어지는 결론은 사람은 결국 다 똑같다는것.

단지 우리가 개개인에게 그들이 그들답기를 항상 강요하는것일뿐.

하지만 그들다워야 한다는것의 정의와 그 강요의 기준과 이유는 타당하지 않을때가 많다.

게다가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가치라는것은 때로는 본질과 너무 동떨어져있지 않은가.

 

 

 

 

 

 

 

 

 

 

 

Posted by 영원한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