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1.06 <생활의 발견> 홍상수 (2002)
  2. 2012.11.05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Film2013.01.06 08:54

 

 

<생활의 발견>

 

무릎팍도사에 김상경이 출연했다.

김상경이 게스트로 출연했던 개그콘서트의 <생활의 발견>편을 떠올려보면 토크쇼 출연이 그렇게 뜬금없는것 같진 않다.

단지 <생활의 발견>속의 김상경은 속된말로 찌질했어도 수다스럽진 않았는데.

김상경의 입담에서 박중훈의 위트를 기대했던것이 사뭇 민망해졌다.

김상경 스스로는 자기가 정우성과 송강호의 중간 지점에 있는 배우같지 않냐고 되물었는데

물론 도사들은 그 중간에 이병헌이 있지 않나요 하고 받아쳤지만. 하하하.

김상경은 자신이 가진 평범하고 생활 밀착적인 캐릭터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했던것 같다.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거나 살인을 할 만한 극적인 캐릭터가 사실 그에겐 없다.

송강호는 정우성보다 분명 못생겼지만 <뱐칙왕>의 무능력한 회사원을 연기해도 그는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김상경은 검사에 의사까지 엘리트를 연기해도 그냥 그런 좋은 직업을 가진 평범한 남자 같다.

아마도 <생활의 발견> 출연후에 결정적으로 그런 캐릭터가 생겨난것 같다.

하지만 그런 캐릭터도 분명 아무나 가질 수 있는것은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가 모든 배우들의 로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가 배우들에게 궁금한 감독인것은 분명한 사실같다.

배우들은 왜 홍상수의 영화에 출연하는것일까.

이미 연기했던 배우들이 그의 독창성과 실험성을 칭찬해서?

찍기만 하면 해외영화제에 초청되는것이 분명하니깐?

그의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배우들은 촬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감독은 그 배우들에게서 어떤 영감을 얻고

자신의 모습을 일부 그들에게 투영하면서 보편성을 추출해내고 관객의 공감을 얻어낸다.

하나의 영화에서 다음 영화를 예고하는 동시에 그 이전의 또 다른 영화들을 떠올리게끔 하는 그의 영화는

어찌보면 단 한번의 결말도 없이 지금도 계속해서 방영되는 무슨 연말 연속극 비슷한것 같다.

배우들은 두세편의 터울을 두고 바뀐다.

마치 하나의 자아에 사형선고를 내리듯 첫번째 허물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결국은 또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모두 공통된 생각을 갖고 행동하는 고만고만한 등장인물들 사이에도 성숙의 정도에 따른 차이가 분명 있다.

마치 유충과 성충, 그들이 벗어놓고 떠나는 빈 껍데기 사이의 차이만큼 말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몇개의 굵직한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로드무비이다.

근데 그 로드무비는 마치 기록영화같다.

대개 영화를 찍거나 연기를 하는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작업을 끝냈거나 또 다른 작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여행을 계획한다.

마치 산란기를 맞은 물고기들을 따라 이동하는 낚시꾼들처럼, 어쩌면 등장인물 자신이 교미기에 처한 물고기들 인지도 모른다.

 갈등이나 전개 결말같은 극적인 요소가 결핍된 이 영화들은 연말 연속극이라기 보다는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같은 프로그램이나 <마이크로 코스모스>같은 다큐멘터리에 가까운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라는 거대한 곤충을 통해서 감독이 얘기하고 싶은것은 혹시 배설의 미학이 아닐까.

 

 

이런 장면은 오즈 야스지로의 다다미컷처럼 소주컷으로 불러도 문제가 없을것 같다.

의도된 만남과 술자리속에서 고기에 양파에 고추장에 이것저것 얹어져 입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상추쌈은

마치 배설직전의 의식같다.

게임에 질때마다 옷을 하나씩 벗는것처럼.

 

 

그의 영화에서 달콤한 로맨스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조그만 체구에 초록색니트를 매끈하게 빼입은 선영의 모습은 혹시? 하는 기대를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 혹시는 귀까지 빨개져서 호텔에서 카드에 서명을 하는 유부녀의 모습을 통해 역시로 바뀌지만.

유부녀의 잠자리 상대가 되었다는 열등감과 춘천에서 딴 여자와 놀아나는 그 유부녀의 교수남편에 대한 열등감까지 합해져서

경수의 집착은 극에 달하고 그 집착은 치밀하다 못해 찌질하다.

마치 달밤에 체조하듯 대낮에 술에취해서는 감까지 첨부해서 선영의 남편에게 협박편지를 쓰는것.

여주인공들이 남기는 유치한 편지들이나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명숙의 말도 또 다른 집착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괴물은 되지 말자고 말하며 쾌감을 느끼는 속물들.

그럼에도 경수는 선영과의 관계에 있어서 잠자리 이상의 어느정도의 의미부여를 원했던것 같다.

선영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자신의 학창시절과 그가 기억났다고 말했으나 실제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그의 기억속의 선영에

감상적으로 집착한다.

 

 

 

경수의 선배가 청평사로 가는 배속에서 들려주는 회전문에 얽힌 설화는 사실 좀 웃기다.

당태종의 딸을 짝사랑한 남자를 당태종이 죽였는데 그 남자가 뱀으로 환생하여 공주의 몸을 꽁꽁 감쌌단다.

도사가 그 뱀을 떨쳐버리려면 조선의 청평사로 가라고 해서 청평사로 오는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쳐서 뱀이 놀라서 도망가는데 그때 뱀이 돌아간문이 회전문이라는.

영화의 영어 제목도 'turning gate'이다.

보통 설화들은 애절하다못해 가슴 아프지만 뱀으로 까지 환생한 짝사랑남도 그렇고

그 뱀을 떨쳐버리려고 청평사까지 오는 공주도 웃기다.

웃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르는 순간의 연속이다.

마치 오래된 연인들이 결혼 전에 그러듯 경수는 선영을 끌고 보살의 집으로 들어간다.

보살은 굳이 점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만 선영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구실을 찾아보려는 경수의 의도가 눈물겹다,

마치 공주의 몸을 칭칭감고 떨어질줄 모르는 그 뱀처럼.

결국 경수는 보살에게 좋은 소리 못듣고 선영과의 관계의 어떤 당위성도 부여받지 못한다.

지갑을 가지러 간 선영은 돌아오지 않고 갑자기 천둥번개까지 치기시작한다.

그리고 선영의 집앞에서 경수는 씁쓸히 돌아선다.


<우리 선희> 리뷰 보러가기

<오!수정> 리뷰 보러가기

<밤과 낮> 리뷰 보러가기

<북촌방향> 리뷰 보러가기

<다른 나라에서> 리뷰 보러가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리뷰 보러가기

<자유의 언덕> 리뷰 보러가기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2.11.05 04:21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작년에 오랜만에 한국에 갔을때 아는이들의 집을 방문할때 마다 책 한두권씩을 빌려오곤 했다.

빌려온 정성이있으니 끝까지 읽을것 같았고 돌려줘야하니 그 핑계로 한번 더 만나겠구나 싶어서.

그때 읽은 몇권의 책 중에 김영하의 '퀴즈 쇼'라는 소설이 있었다.

작가 스스로 얘기한것처럼 한창 피씨통신이 유행하던 90년대 후반을 살아 간 작가 또래 세대를 위한 소설이었다.

나는 386세대도 아니고 작가의 또래도 아니지만 나도 분명 그 시대를 살았고 소설의 내용도 무척이나 공감이 됐다.

유니텔이나 천리안같은 피씨통신이 유행하고 번개니 정모 정팅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뛰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나의 청소년기는

386세대가 공유하고 공감하려했던 것들을 동경하며 마음속에서나마 어른이 되기를 희망했던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얼마전에 영화 <접속>을 다시 보고서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 속 등장인물과는 분명 세대가 다른데 영화가 찍어지고 상영되던 그 시대의 정서는 너무나 공감이 되는것이다.

과연 나는 그 당시 그 영화를 볼때 등장인물들의 정서를 어떤식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세월이 흘러도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주인공들과

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그들의 나이와 얼추 비슷해진 지금 내가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주인공들의 눈높이로 그 시대를 살던 이들이 느끼던 감정과 비슷한 것일까.

그렇다면 역으로 나보다 나이든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서

미래에 내가 느낄 가능성이 있는  감정들을 예측이나마 해볼 수 있는 걸까.

 

그 당시 피씨통신상에서도 굉장히 유명했던 소설이 바로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였다.

당시로써는 흔하지 않은 세로로 된 직사각형 모양의 검은 책을 나도 샀었고 읽었고 무슨 뜻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등장하는 그림 제목이나 화가들이름을 보면서 막연히 와 멋있다 라는 생각이 들게끔했던 그런 소설. 

내 기억으로는 그때 벌써 이미 영화를 제작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것 같고

피씨통신 영화 동호회에서 은근히 지지하는 분위기도 있었고

이런저런 정황상 독립영화 필 충만한 그런 영화가 되겠구나 싶었는데

그 영화를 얼마전에여 우연히 보았다.

제작년도가 2003년도다. 피씨통신하면서 처음 알게된게 97년인걸 생각하면 차이가 꽤 있다.

제작에 차질을 빚었던거거나 아니면 내 기억 전부가 잘못된것이거나 그렇겠지.

 

 

생각지도 않은 영화를 보게되니 소설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읽고나면 마치 처음 읽는 소설 같다는 느낌이 들겠지.

그럼에도 몇몇 장면들은 소설에서 읽었던 부분들과 너무 선명하게 겹쳐져서 놀랐다.

행위 예술가인 추상미와 사진 작가인 장현성이 조우하는 장면같은것.

아마도 추상미라는 배우가 가진 색깔이 너무 뚜렷하고 독보적이기때문이겠지.

 

 

탄생과 죽음은 신의 영역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을 신이라고 일컫을 수 있는걸까.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마감하려는 욕구와

하루하루를 마치 죽음이 영원히 건드릴것 같지 않은 영역으로 간주하며 사는 삶의 욕구 사이.

사람들이 지켜보는 예술행위 가운데서 서서히 죽어가는 주인공과

다시 살고싶어졌어요 라고 말하는 찰나 불의의 사고로 죽는 또 다른 등장인물.

어찌보면 죽음에 관한 세상의 모든 담론만큼 우스운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간혹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이 누군가의 인생에 끼칠 영향따위등을 상상한다.

그 순간 사람들은 현실에서 가지고 있는 상처따위를 보상받는것일지도 모른다.

자기 파괴로 누군가에게 동정심을 얻을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보면 모든게 다 과대망상일지도 모른다.

마치 레드드래곤처럼.

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기망상.

 

 

자살이란

어쩌면 모두에게 똑같이 지루하고 고독하고 갑갑한 인생을

다른 방식으로 다른 이유로 끝내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처절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을 느낀다면

그 고통이 그가 감당하기 힘든 정도의 고통이기 때문이지,

결코 그 고통이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은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려는 시도도 내 고통의 정도와 당위를 설명하려는 노력도 부질없는것은 아닐까.

자살한 사람들에게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것이었다고 말하는것은 소용없다.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미 자신의 삶을 평가절하하는데 익숙해져 있으니깐.

 

 

-왜 살아있지도 않은 꽃에 그렇게 정성들려 물을 주나요?

-살아있든 살아있지 않든 그것이 왜 중요한가요.

 

죽은후에도 죽었는지 알 수 없고 죽은 후에는 살아있었던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알 수 없는것.

과연 나의 오늘이 저 조화와 다른게 무엇인지 심히 궁금해지는 오늘이다.

그래 어쩌면 죽음에 관한 담론만큼 무의미하고 매력적인것은 없는지도 모르겠다.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노카아 보이> 사나다 아츠시 (2009)  (0) 2012.12.03
<시> 이창동 (2010)  (0) 2012.11.14
<오! 수정> 홍상수 (2000)  (0) 2012.11.12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0) 2012.11.05
<김종욱 찾기>  (0) 2012.09.11
<파수꾼>  (2) 2012.08.26
<맛있는 인생>  (0) 2012.08.26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이윤기 (2011)  (0) 2012.08.26
Posted by 영원한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