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2013.07.01 02:57

 

 

<텐텐 轉轉>

 

하얼빈에서 1년반정도 기숙사 생활을 한것말고는 혼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자취생활에 대한 로망같은게 있다. 자취생활에 어떤 환상을 가지고 무턱대고 동경한다기 보다는 누군가에겐 불가피했지만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생활에 대한 일종의 호기심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갈 곳 없이 방황하다 얼떨결에 정착해버린듯한 <바그다드 카페>의 장기투숙자들은 엄밀히 말하면 하숙생들이고 <미술관 옆 동물원>의 춘희도 <천국보다 낯선>의 윌리도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도 <영원한 휴가>의 앨리도 <소년, 소녀를 만다나>의 소년과 소녀도 결국은 근본적으로 자취생들이 아닌가.  물질적 풍요와 안정적 삶과는 동떨어진, 혹은 그것들과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을때에만 오히려 구겨진 신발 뒤축을 뚫고 나오는 듯한 특유의 자유와 의도된 고독. 그리고 그 모든것을 향한 흑백의 냉소들에 철부지 같은 동경을 품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는 짧은 시간 만끽했던 기숙사 생활과 간간히 떠났던 여행에서 머물던 싸구려 호스텔에서의 기억으로나마 그들이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그 기분에 1제곱미터만큼의 공통분모라도 가졌을거라 위로 삼을 뿐이다.


 

 

언제나 늘상 이런 작은 공간을 보면 생각나는 어떤 소설. 카뮈의 소설  <행복한 죽음>에서 메르소가 프라하의 싸구려 여인숙에 앉아있던 장면이 떠올라 책을 꺼내 인용해보자면 이렇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그 한심한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게 그의 유일한 재산인 셈이었으니 그 방을 넘어서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회색 바탕에 커다란 노란 꽃들이 그려진 구역질나는 양탄자에는 뗏국의 지도가 끈적거리는 가난의 세계를 그려놓고 있었다.' 그래도 카뮈의 뫼르소는 여행이라도 떠날 여력이 있었다. 여행은 커녕 집세 내기도 힘든 내 영화 속 주인공들을 생각하면 좀 가련하지만. 어쨌든  자취라는 놈의 유전자 지도는 모르긴해도 그때 메르소가 독대한 양탄자속의 뗏국의 지도와 비슷한 놈일지도 모른다. 후미야(오다기리 죠)가 널부러져있는 다다미방 어딘가에 펼쳐져있을 곰팡이의 지도처럼.

 

 


<건축학 개론>의 압서방파 선배처럼 부모님이 얻어준 원룸에서 희희낙락하는 고급스러운 자취생활은 일종의 돌연변이이고 우리는 보통 이런 모습의 자취생들에 익숙하다. 독립의 개념이 아직은 미미한 우리나라에서 서울 출신학생들이 보통은 부모님과 함께 살며 통학하는것처럼 도쿄에 사는 도쿄 태생의 젊은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데 졸업을 앞둔 취업 준비생 후미야는 도쿄에서 나고 자랐지만 마땅히 의지할 사람없이 혼자서 살아간다. 어릴때 놀이동산에 갔다거나 가족끼리 삥둘러서 저녁을 먹는다거나 하는 평범하고도 살가운 추억이 없는 후미야. 그리고 빚을 돌려 받아야겠다고 갑자기 들이닥친 아버지 또래의 이 남자에게 양말을 입에 물린다.

 


 

이 남자는 밀린 빚을 대신 받으러 다니는 용역직원일까 아니면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인걸까. 호모 영감한테 40번만 몸을 팔면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위협처럼 후미야는 수단과 방법 안가리고 돈을 구하러 다녀야 할까?  '삼색치약을 사면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것만 같았다.'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너무나 진지한 후미야의 독백. 후쿠하라 (미우라 토모카즈)가 들이닥치기 전까지만해도 후미야는 이 삼색치약에라도 의지할 여유가 있었다.


 


 

엉덩이에 뭉개져 뿜어져나온 치약. 방금까지 삼색치약을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후미야는 궁지에 몰렸다. 이 첫 장면에서부터 미키 사토시라는 감독도 코엔 형제 만큼이나 재치있는 감독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일안에 빚을 갚아야하는 최후의 통첩을 받았지만 고작 오락실에 가거나 학생들에게 모금함 수입이나 묻는 대책없는 후미야. 영화의 배경이 일본이 아닌 한국이었어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인것 같다. 대학 졸업생들에게 번번한 일자리도 보장하지 못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학교 못가는 아이들을 후원하는 정부와 학자금 대출로 궁지에 몰린 젊은이들의 취직 실패는 온전히 개인의 능력탓으로 돌리는 사회. 후미야는 늘상 어벙한 표정으로 웃고는 있지만 다리위에서 후쿠하라를 기다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장면에서 그의 불안한 미래와 암담한 현실을 느껴진다.


 

 


함께 팔짱끼고 다닐 여자친구도 최악의 상황에서 의지하고 손벌릴수 있는 부모도 없고 취직을 해서 돈을 벌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야하는 평범한 미래에 한발짝 내딪는것이 이렇게 어려울수가. 리어커 가득 파지를 싣고 경찰관들을 졸졸따라가는 구부정한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후미야는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인생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을 느낀다.


 

 


역 앞에서 우연히 주은 코인락커의 열쇠에 삼색치약에서 내동댕이쳐진 희망을 다시 걸어보는 후미야. 소원을 빌면서 한쪽 눈을 그려넣고 소원이 이루어졌을때 남은 한쪽 눈을 그려넣어야 한다는 달마인형. 후미야가 역무원의 눈치를 보며 코인락커의 열쇠를 돌릴때에 코엔 형제의 <그 남자 거기 없었다>의 에드 크레인의 대사가 떠올랐다. '항상 마지막 열쇠를 돌리지 않아서 내 인생이 요모양 요꼴인걸까?' 그리고 열쇠를 돌리고 나서 에드 크레인의 인생은 꼬일대로 꼬이기 시작했다. 코인 락커의 열쇠를 돌리고 달마 인형이 가득 든 가방을 발견한 후미야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이 영화가 뻔한 스릴러물이라면 달마인형속에 누군가가 마약이라도 꽁꽁 숨겨놓았을지도.


 

 


하지만 후미야에게 닥칠 행운은 우리 모두가 예상할 수 있을만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후쿠하라는 그와 함께 도쿄의 구석구석을 산책하며 목적지까지 함께 가주는 조건으로 후미야에게 백만엔을 제시하고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후미야는 장난같은 제안에 의아해 하면서도 후쿠하라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자식이 없는 후쿠하라와 친부모에게 버림받고 양부모 밑에서 자란 후미야. 그들은 도쿄에서 각자에게 의미있는 장소들을 차례대로 방문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며 서로에 관해 조금씩 알아간다.


 

 

 '추억이 담긴 곳의 절반은 무인주차장으로 변해버렸어' 산책을 해야 성질이 풀리는 아버지 때문에 어린시절 집에서 산책을 '성질'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후쿠하라. 후쿠하라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걷던 도쿄의 거리를 회상하고 후쿠하라 가 들려주는 자잘한 에피소드들은 부모와 함께 화목하게 살아본 적이 없는 후미야에게는 낯설기만하다. 후쿠하라에게 도쿄는 나이가 들어서도 함께 걷기로 한 젊은시절 아내와의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이 꿈꾸던것과는 다르게 변해버렸다. 자식이 있었더라면 많은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말하는 후쿠하라. 다 먹고난 꼬치를 후미야의 자켓에 던져 붙인다거나 신사에서 아무렇게나 물을 끼얹거나 엉덩이를 걷어차는등의 행동은  어린 아들과 장난치는 아버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짧은시간 도쿄 곳곳을 걸으면서 후쿠하라와 후미야는 서로에게서 부모 자식간의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도쿄에서 살아보지 못한 나에게도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영화 속 깨알같은 농담들과 에피소드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유머러스한 이런저런 법칙들. 그러면서도 짙게 깔린 음울한 분위기 미키 사토시의 자전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감났다.

 

 


특히 후미야가 자신과 호텔까지 같이 갔던 여자가 후쿠하라의 아내가 아니었단 사실을 알고 안도하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장면. 이 영화를 좋아하는 계기가 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뭐랄까. 미키 사토시는 아주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자신의 기억과 습관들을  마치 가장 친한친구에게 웃긴 이야기를 해주듯 자연스럽게 꺼낸다. 


 

 


옷걸리를 머리에 끼면 머리가 자동적으로 돌아간다거나  라코스떼 양말의 악어를 잘라서 폴로셔츠에 붙여 선물했는데 선물하자마자 떨어져서 망신을 당한 어린시절 기억이나  


 

 


'꿈이 뭐였니?'

'내각대신이요'

할때 다 익은 홍시가 민망하게 떨어진다거나


 

 


왜 여자 직장인들이 전부 지갑을 같은 방향으로 들고 신호를 기다리는지


 

 


왜 이런 아저씨들은 난로 옆에 모여서 전부 비슷한 자리를 만지고 있는지


 

 


이런 동네 시계방은 도대체 장사가 되는지 뭘 팔아서 먹고 사는지 누구나 한번쯤 궁금해했지만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은 물음들을 실제 주인에게 물어보는 웃지못할 장면들을 연출해낸다.


 

 



한편으로는 답답하고 고지식한 일본인들의 모습을 풍자하며 독특한 웃음거리를 만들어 내는데 후쿠하라가 거리를 걷다가 교회에서 라벨의 '죽은 왕비를 위한 파반느'가 흘러나오자 멈춰서서 지휘를 하는데 자전거를 타고가던 아주머니가 자전거 전용도로에서 음악에 심취해 있는 그에게 경적을 울리며 비켜주길 기다리는 장면이다. 후쿠하라는 고지식한 아줌마에게 호통을 치고 결국 아주머니는 전용 도로에서 벗어나 자전거를 타고가다 자동차에 부딪혀 넘어지지만 정해진 규칙에 따라 운전한 자동차 운전자만 화를 낼 수 있을뿐. 엄격한 질서와 규칙에 익숙한 만큼 융통성없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뭘 먹어도 꼭 마요네즈를 뿌려먹는 사람이 있다니깐 하는 장면도 그렇고


 


 

며칠째 결근하는 직원집에 찾아가는길에 우연히 드라마 엑스트라를 하게 되는 후쿠하라 아내의 직장 동료들. 동료 걱정은 오간데없고 배우의 일거수 일투족에나 관심을 가지고맛집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줄과 '신주쿠 엄마'라는 도사 앞에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손님 행렬.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닌데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나 맛집이나 유행에 민감한것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가보다.  


 

 


가짜하객 노릇을 하다 알게된 여자집에 잠깐 그림을 봐러 가주는 장면도 그렇고 혈연으로 맺어진 끈끈한 유대감 대신 겉치레와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적인 인간관계가 지배하는 도시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아내의 외도를 알고 홧김에 다투다 아내를 죽여버린 후쿠하라. 그의 도쿄산보의 최종목적은 카스미가세키의 경찰서로 자수를 하러가는것이다.  추억을 공유하던 유일한 대상이었던 아내가 죽고 그는 마치 기억의 성지순례를 하듯 도쿄를 걷는다.

 

 

 


후미야의 기억을 찾아 떠나는 부분에선 약간의 판타지가 가미된다.  이런부분에선 여러모로 <반칙왕>의 김지운식 유머가 떠올랐다.


 

 


코스프레에 연령제한은 없다는 할아버지가 사물함에서 물건을 훔치고 옥상에서 뛰어내려 오토바이를 타고 달아난다거나

 


 


엠프를 가방처럼 메고 도시 한복판에서 전자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을 후미야가 따라가는 장면이나


 

 

피아노 분말 얘기가 나오는 만화를 읽으며 실없이 웃는다거나  이 모든것은 가족과 함께 했던 기억대신 후미야가 자신의 유년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장치일 수도 있다.


 


 

가짜 하객으로 참여했을때 가짜 부인 역할을 했던 마키코의 집을 방문한 후쿠하라와 후미야.

후미야와 마키코가 장보러 간 사이 마루에 누워서 잠이 드는데

혼자가 된 후쿠하라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에 잠이 깨고 아무리 애를 써도 문은 닫히지 않고 벌어진다.

이것도 혼자 사는 마키코 집의 남편의 부재를 보여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후쿠하라와 후미야가 실제 아주 오래전에 헤어진 부자지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깐 해봤고

후쿠하라와 마키코가 실제 부부이고 후미야와 여동생을 낳은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건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정말 너무 행복해보이겠다라는 우리의 기대와 바램일뿐.

그들의 말처럼 현실과 이상은 다르니깐.



 

 


후쿠하라가 죽기전에 먹고 싶다고 한 요리는 카레였다. 카레를 끓이던 마키코는 처트니가 떨어진것을 알고 후미야에게 마트 심부름을 시키는데. 저녁에 카레를 먹는다는것을 알고부터 후미야는 우울해진다. 후쿠하라가 경찰서로 자수하러가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것을 눈치챈것. 가장 재밌는 프로도 끝나버린 일요일 저녁의 가장 우울한 시간. 그 이름모를 불안감. 후미야는 카레를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는데 대충 카레가 매워서 그렇다고 둘러댄다. 그리고 후쿠하라는 다 이해한다는듯한 표정으로 후미야를 쳐다본다. 나도 밥을 먹는데 슬픈 생각이 떠올라서 당황하며 눈물을 훔치며 밥을 먹었던적이 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그 눈물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보통 보고도 못본척 먹던 밥을 계속 먹는다.


 

 


카레를 한번 만들면 보통 한 솥은 끓이는데 그렇게 끓인 카레를 먹을때마다 이 영화를 보았다.  물론 아직 처트니는 한번도 안 넣어봤고 오늘 묽은 딸기잼을 넣어봤는데 달짝찌근한게 실제로 맛이 더 풍부해진것 같다. 카레를 하도 휘저었더니 손에서도 달콤한 카레 냄새가 난다. 후미야도 어쩌면 그 날 카레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따뜻한 가정에서 자랐으니 후미야의 기분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식이라도 있었으면 아내와의 관계가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푸념하는 후쿠하라를 보고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들었다. 자식이 없는 부부의 삶은 정말 무료하고 허무해질까?


 

 

이 영화를 보고나서 예전에 애기하마의 꿈을 꿨다.

 조그만 세숫대야에서 물을 마시며 고개를 돌려서 나를 처량하게 쳐다보고 있었던것.

나는 그 물고기들과 하마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야하는 상황이었는데

혹시라도 검역에 걸려서 동물 반입이 안되면 어쩌지 고민하는 상황이었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난 그때부터 동물로 태어나면 뭐로 태어나고 싶냐는 질문에 애기하마라고 대답한다.

그 하마랑 비행기를 같이 탔는지 미처 꿈을 꾸지 못해서 그냥 마음에 빚을 진 기분이다.

애기하마는 보통 3살이면 부모에게서 독립을 하고 큰 하마들처럼 몇십마리씩 무리를 지어 살기보다는

암컷과 수컷 한쌍씩 혹은 한마리씩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고 한다.

심히 내가 원하는 삶이다.

동물원에 앉아서 애기하마를 바라보며 마키코는 애기하마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애기하마의 삶은 후쿠하라와 후미야 마키코의 삶처럼 외롭고 적적한 삶일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영화여서 오늘 몹시 시시콜콜하게 텐텐일기를 썼다.

이곳의 일요일 저녁이 그다지 우울하지 않아 다행이다.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2.12.03 23:44

 

 

<호노카아 보이>속의 정지된 마을

 

리투아니아에 살면서 눈에 무뎌진지 오래이지만 그래도 첫눈은 항상 누구에게나 상징적인가보다.

'오늘 첫눈이 내렸다'라는 평서문을 머릿속에 담고 시작하는 하루.

반쪽짜리 식빵 네 조각을 펴놓고 땅콩잼 한층 딸기잼 한층 땅콩잼 한층을 발라 우유와 먹었다.

여기엔 내가 좋아하는 땅콩잼과 포도잼이 세로로 길게 섞인 그 스트라이프 잼이 없다.

사실 작년에 한국에 갔을때 그 잼을 사오려했지만 막상 서울에서 한번 먹고나니 너무 시시해보였다.

내가 그 잼을 리투아니아까지 배달해 왔을때 느낄 만족감이 그리 가치있어 보이지 않았다고 해야할까.

그 별것아닌 만족감을 충족시키는것은 어떻게 보면 그 물건을 과대평가하는것은 아닐까.

태어난곳에서 떠나와 다른 세상에 정착해서 살아간다는것.

철저한 계획에 의한 이민으로 해외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을것이고.

우연처럼 흘러들어왔다가 돌아갈 기회를 놓친사람들이 있을것이고. 

중요한것은 인생이란것이 칼로 탁하고 토막을내서 1막2막으로 정리할 수 있는 물건은 결코 아니라는것.

어떤 동기들에 일정량의 우연과 필연이 결합되어 인생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런 인생과 그 속의 일상들을 미니멀하게 최소한의 시나리오로 조용하게 풀어가는 영화들이 좋다.

우스운 습관들을 장난꾸러기처럼 의미없이 나열하고 애정을 가지고 사용하는 자기만의 단어가 있는 주인공들.

혼자있는것에 익숙하고  친구가 필요한것같지 않아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

음악으로 치면 yo la tengo나 slowdive 같은 느낌을 주는 영화들.

<천국보다 낯선>의 에바나 <반칙왕>의 임대호같은 친구들.

나에게 있어 영화를 보는 행위는 그런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내어서 더 많은 인생의 동기동창을 만들기위함이다.

 

내년이면 이곳에서의 생활도 5년째로 접어든다.

그래서 유독 외국에서의 생활을 그린 영화들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우리나라 영화속에서 그려지는 해외생활이란 아직까지 그저 너무 로맨틱하고 화려하기만하다.

본질을 보여주는데 서툴다고 해야할까.

(지난번에 홍상수의 밤과낮을 끝까지 보지 않은것은 그래서 너무 후회된다. 그의 눈에 비춰진 파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여행을 다니거나 해외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사람이라거나 으례 여유로운 사람일거라는 편견이나 일종의 피해의식같은게 있는걸까.

영화속에서 자연스러운 일상을 접하기란 쉽지않다.

해외생활을  보여주지만 오히려 그 생활에 대한 암묵적인 로망으로 가득차있다고 할까? 

몇몇 일본영화들에서 아주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을 가능케하는 그들의 경제수준은 둘째치고라도

카피와 응용, 자기화와 토착화에 능한 일본 사람들이니 뭐 당연한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그들의 감성이 우리의 그것보다 세련된것은 아닐까.

 

 

<카모메 식당>의 헬싱키나 <냉정과 열정사이>의 이탈리아.

북유럽스타일과 '로맨스인 유럽'을 기본 골격으로 했다고는 해도 영화속에서 보여지는 장면와 내러티브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마치 그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처럼.

그게 혹시 해외에서 오래 살아 본 감독이 찍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감독이 찍은 영화의 차이라면 더이상 할말은 없다.

어쩌면 감독의 로망을 내 로망인척 감정이입하며 봐야하는 영화가 불편하고 싫은건지도.

 

운좋게 보게된 영화 <호노카아 보이>

한국어로는 <하와이언 레시피>로 번역이 되었다고 한다.

하와이에 머물며 소일하는 일본청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민하고 불평불만많은 여자친구역으로 짤막하게 아오이유우가 출연한다.

극중 등장인물들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등장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별이 반짝이고 달무지개가 뜨는 보석같은 해변으로 장시간을 날아 하와이까지 여행을 오지만

얼굴이 예쁘다 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녀의 마음과 표정은 정말 화산처럼 말라 비틀어진 상태이다.

여행객의 대부분은 지겹도록 똑같은 모토로 여행을 떠난다.

화산같은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를 토대로 떠나오지만 결국은 화산만보고 돌아온다.

그 내면의 일상성을 버리지 못하고 저 아오이 유우처럼 불편함과 단조로움만 불평하다 여행을 망치는것.

산이 큰것도 죄고 길이 하나뿐인데 왜 이렇게 길을 헤매냐고 몰아붙이는것도 바로 여행자의 역설이다.

여행후에 여자친구와 헤어진 레오는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동네영화관 영사실 보조로 살아간다.

 

 

빌니우스에 살다보면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는 이곳에서 느끼는 이 정적이 과연 정당한것일까 라고 스스로에게 묻게된다.

조금 작은 도시로 가면 빌니우스는 상대적으로 대도시같다.

주말을 여름농장에서 보내고 그 조그만 도시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급 피로감을 느낀다고 한다.

나에게는 시골같은 그 도시가 아주머니에게는 문명으로의 귀환같은것인거다.

고요함이란 그렇게도 상대적인것이다.

그 지독한 정적을 레오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허심탄회하게 서술해 나간다.

 

 

심지어는 어딜가도 누구에게도 나란 존재가 필수불가결한 존재는 아니다.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절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

낯설은 상황들에 자연스럽게 대처해나가는 레오의 담담한 나레이션은

뭐랄까 비이 할머니가 양배추롤에 끼얹던 말갛고 담백한 스톡같이 들렸다고나 할까?

영화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정지된 컷들.

사용되지 않은채 그저 싸여있는것만 같은 일련의 물건들.

파도치는 바다.

사람들이 염원하는 달무지개.

많은것이 필요한 삶을 사는것은 피곤한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은 그냥 물건일뿐 그리고 자연일뿐.

 

 

하지만 그러한 정적속에서도 누군가의 일상은 세상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더이상 팝콘 기계 옆에 앉아서 낮잠을 잘 수 없게된 할아버지와

안마기를 차고 손님을 기다릴 수 없게 된 매표원의 일상이란것이 존재하고 있더라.

 

 

우연히 밀가루 배달을 왔다가 비이 할머니에게서 점심을 대접받는 레오.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는다는 레오의 말에 적적하게 사는 할머니는 매일 점심을 먹으러 오라는 호의를 배푼다.

매일매일 정성스레 차려진 할머니의 점심을 먹고  사진 한장씩을 남기는 레오.

그래도 인스턴트 라면으로 가득한 소포를 받는 기쁨은 그것과는 또 다른 가치이다.

이 폴라로이드 사진들은 너무 슬프게 보인다.

폴라로이드와 비디오카메라는 왠지 다시는 반복할 수 없는 일을 굳이 잡아두려는 미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듯 보여서 싫더라.

 

 

 유일하게 요리과정을 발랄하게 보여주는 이 양배추롤은 리투아니아식 양배추 롤과도 기본적인 레시피는 똑같은것 같다.

어떤 양배추 잎사귀는 마치 배추잎처럼 보이더라.

양배추가 무척 얖고 크고 초록빛이 나는게 훨씬 더 싶게 롤을 만들 수 있게 보인다는것.

근데 마요네즈에 크림까지 끼얹는것은 좀 많이 느끼할것 같고

리투아니아에서는 마요네즈대신 케찹을 넣어서 빨간 국물로 만들어 내는 때도 있다.

사실 일본의 여러음식들이 그렇지만 특히 카레나 돈카츠, 고로케 같은 요리들은 전부 기존의 외국요리를 응용해서 만든것인데

그래서 일본인들에게는 일종의 카레 컴플렉스 같은게 있는것같다.

영화 <텐텐>에서도 그렇지만 항상 카레에 망고잼이나 망고 처트니 같은것을 첨가해야한다는것을 강조한단 말이지.

잼이나 처트니 같은것은 또 얼마나 아시아적이지 않은것인데 말이다.

 

 

하와이에 정착한 일본 이민자들의 고요하지만 외롭고 적적하나 달달한 삶을 보여주는 영화.

평생을 사는 사람들도 한번 볼까말까한 달무지개를 보겠다고 태평양을 건너 오는 사람들.

페넬로페 크루즈에 안달하고 자신의 성적 판타지에 관대한 어느 할아버지의

병상에 누운 부인을 바라보고 앉은 뒷모습에서도

댓가없이 매일매일 진수성찬을 차리지만 질투에 불타 땅콩을 다지는 할머니에게서도

얻어지는 결론은 사람은 결국 다 똑같다는것.

단지 우리가 개개인에게 그들이 그들답기를 항상 강요하는것일뿐.

하지만 그들다워야 한다는것의 정의와 그 강요의 기준과 이유는 타당하지 않을때가 많다.

게다가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가치라는것은 때로는 본질과 너무 동떨어져있지 않은가.

 

 

 

 

 

 

 

 

 

 

 

Posted by 영원한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