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aly2013.02.22 10:06

 

이탈리아 여행의 여정을 돌이켜본다. 피사(pisa)와 루카(lucca)까지는 피렌체(firenze)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왔고

피렌체를 떠나 아레쪼(arezzo)와 코르토나를 방문했지만 결국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베네치아행 기차를 탔었던듯 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고 하지만

에트루리아인이 기반을 두었던 중부 이탈리아에서 그러니깐 투스카니의 모든길은 피렌체로 통하는듯 했다.

투스카니(tuscany)는 이탈리아어 토스카나(toscana)의 영어명칭이고 피렌체도 영어명칭은 플로렌스(florence)인데

토스카나는 무슨 가죽의류명칭 느낌이 살짝들고 플로렌스는 왠지 프랑스 지명같은데 아마 프로방스때문인가?

영어로 투스카니 발음을 들으면 항상 <투스카니의 태양>에서 산드라 오가 외치던 그 '터스까니'가 떠오른다.

다이앤레인이 여행 제안을 뿌리치자 못믿겠다는 표정으로 '투스카니라고 투스카니, 이를리 (ltaly)!'하는 그 장면.

 

 

빌니우스-밀라노 왕복티켓. 그리고 단 2주라는 시간.

그래서 로마나 시칠리아처럼 멀찌감치 떨어진 남부 이탈리아는 아예 루트에 집어 넣지 않았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로마 3주일, 나폴리 2주일 이런식으로 계획을 세워서 나중에 오는게 나아보인다.

기차를 타고 이삼십분만 달리면 같은 듯 전혀 다른 도시에 다다를 수 있었던 이탈리아.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맥락에서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 나라들도 비슷할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유독 이 세나라에 미련을 못버리는게 아닐까.

왠지 여기도 한번 가봐야 할 것 같고 저기도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은 수십개의 부스로 가득찬 박람회같은 나라.

파리와 로마 바르셀로나에 대한 로망은 이미 한 나라에 대한 로망과 다를바없이 커버렸고

그외의 작은 소도시들을 둘러보는 재미는 파리에서 얻는 감흥과는 또 다른 종류일것이다.

 

 

페루자,몬테풀치아노,산 지미냐노,시에나,볼테라... 

베네치아에 대한 '의무감'같은게 없었더라면 피렌체 주위의 더 많은 소도시들을 둘러 볼 수 있었을것을.

처음으로 운전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렌트한다면 기차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투스카니의 풍경을 즐겨가며 짧게라도 이 소도시들을 구경할 수 있을텐데.

 

 

이 풍경들은 모두 코르토나의 풍경이다.

코르토나에 가기위해 피렌체를 떠나 아레쪼행 기차에 올랐다.

아레쪼는 <인생은 아름다워>의 배경이 된 소도시인데 개인적으로 그 영화에 그다지 감동받지 못해서

아레쪼 자체에도 별다른 매력을 못느꼈다.

아레쪼에 내려서 코르토나행 기차표를 사고 출발시간까지 잠시 여행하는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인생은 아름다워>를 다시 한번 보면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을것 같다고 또 최면을 걸어보고.

 

 

아레쪼(arezzo)에서 20분정도 기차를 타면 카무치아-코르토나(camucia-cortona)역에 도착한다.

하지만 역에 내려서 바로 코르토나에 입성할 수 있는것은 아니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보면 에트루리아인과 로마인, 이탈리아의 그리스인에 대한 특성을 적은 부분이 있다.

로마가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방어에 여의치 않은 장소에 도시를 건설한 로마인의 개방성이 작용했고

바닷가에 도시를 세운 그리스인은 통상에는 능숙했지만 적의 침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고 에트루리아인은 방어에 완벽한 언덕에 도시를 세우길 좋아했고 그래서 발전가능성이 미약했기때문에

그 당시의 도시들은 지금도 여전히 중소도시로 남아있다는것이 그녀의 의견.

"열차역에 내려도 금방 시내로 적어도 구시가지로 나갈 수는 없다. 버스를 타고 능선을 따라 언덕마루까지 올라가야만

겨우 시가지에 닿을 수 있는 것이 이 도시들이다." -로마인 이야기 1권-

 

 

하물며 우리는 쏜살같이 역을 뛰쳐나와서는 멋도모르고 길을 걷기 시작했고

에트루리아인이 견고하게 쌓아올려 건설한 이 도시를 두발로 걸어 오르며 그저 웃었다.

사실 버스가 있는지도 몰랐을뿐더러 있었더라도 탈 생각은 하지 않았을거다.

 

 

론니플래닛에서 친절하게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를 인용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기초 이탈리아어 분량보다 적은 4페이지 분량이 할애된 코르토나편에 그나마 구시가지 지도가 첨부된것이 기적이었다.

지도 아래쪽에 화살표로 카무치아- 코르토나역 4.5킬로미터라는 표시를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았었다.

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 거리를 봤었더라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4.5킬로가 쉬엄쉬엄 걷기에 먼거리는 절대 아니기때문이다.

 

 

다르질링에서 이틀동안 해발 3700미터까지 올라가는 트렉킹을 했지만

넓직한 길에 거의 경사가 지지 않은데다가 천천히 올라갔기때문에 그다지 힘들지 않았었다.

늦게나마 에트루리아인의 건설철학을 알게되서 지금이야 아 그랬구나 하지만 그때는 정말 고개를 갸우뚱했던 기억이 난다.

 

 

피렌체 두오모에서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왠만한 성당의 돔은 그냥 양파,

 단어의 뉘앙스를 고려해서 상대적인 차이를 묘사하자면 심지어 '다마네기'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런 곳들이 많았지만

신에 대한 경배와 믿음을 두오모의 크기따위로 판단 할 수는 없는것이고

게다가 이 높은 언덕위에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는 두오모는 피렌체의 그것보다 훨씬 강한 중력으로

신과 인간을 연결하고 있는듯 했다.

 

 

짧은 여행에 다행히 무거운 짐도 없어서 걷기 힘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2차선도로위 간간히 지나다니는 자동차와 우리 둘 그리고 키크고 깡마른 사이프러스들.

앞으로 디딛게 될 길을 마주하면서 수시로 이미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여정.

그 찰나의 순간에 과거는 미래에 겹치고 끝없는 데자뷰를 경험하게 된다.

 

 

사실 위험하다.

이런상황에서는 최소한 차가 질주하는 역방향으로 걸어야 안전하다.

최대한 돌담에 바짝붙어서 최대한 서로 말을 아끼며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는게 좋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돌담에 바짝 붙어' 혹은 '차 온다 조심해' 뭐 이런 소리는 계속 하게 될거다.

 

 

정확한 명칭을 모르겠는데 다르질링에서 히말라야 트렉킹을 하다보면

마을이 나올 무렵에 나무들위에 형형색색의 천들이 감긴 모습을 볼 수 있다.

비수기에 트렉킹을 했어서 다른 여행자들을 거의 못만나는 상황에서 다다르는 그런 장소는

진부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정말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그 장소를 지나 조금 걷다보면 쓸쓸하게 손님을 기다리는 롯지들이 나타났고

차갑고 허한 속을 달래줄 따뜻한 티베탄 인스턴트 누들 같은것을 먹을 수 있었다.

이 첩첩산중을 통과하고나면 코르토나 전통 스파게티 같은것을 먹을 수 있는걸까?

 

 

9월말의 화창한 날씨.

무덥지도 춥지도 않은 최적의 날씨였지만 한바퀴 두바퀴씩 돌고돌아 조금씩 높아지니 쌀쌀함이 느껴졌다.

코르토나의 온도를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이탈리아의 투스카니에서 다르질링의 히말라야를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더불어 칸첸중가에서 느끼는 감동과 햇살나무라는 만화영화 속 그 얕은 언덕위에서 세원이가 느꼈던 포근함은

부피만 다를뿐 비슷한 무게의 감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전에 눈앞에 버티고 있던 성당이 이제 조금씩 점이 되어간다.

 

 

여행을 조금더 일찍와서 해바라기나 양귀비가 만개한 모습을 보았다면

굳이 높은 언덕위에 도시를 지으려했던 에트루리아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언덕위에서 바라본 사이프러스와 낮은 구릉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펜트하우스를 동경하는 현대인처럼 춥니 덥니해도 옥탑방을 낭만적이라고 여길 수 있는 로맨티스트처럼

언덕위의 전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거라고 혼잣말로 시오노 나나미에게 반박해본다.

 

 

성당은 이만큼이나 멀어졌다.

이제는 거대한 중력대신 손가락으로 톡 쳐서 밀어내면 저 아래 기차역까지 데굴데굴 굴러갈듯 나약에 보인다.

저 아래에서 그리고 이 언덕위에서 오밀조밀 성당으로 모여드는 마을주민들을 상상한다.

 

 

'이곳은 더이상 코르토나가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코르토나에 들어섰고 이제 저 멀리 트라시메노 호수(Lago di trasimeno)가 보인다.

 

 

발코니에 서있는 저 사람도 우리가 밟고 올라온 길을 걸어 자신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이라고

우리에게는 풍경이 되버린 자신을 모르고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풍경에 감탄하고 있는것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성당이 보인다.

왠지 이런 성당이 열개는 더 있을것 같다.

여행을 할때마다 비슷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트루먼 쇼>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같은 느낌.

그냥 거대한 테마파크 혹은 세트장에 들어와서 나만 모르고 모두가 아는 장소를 헤매는 느낌.

그런 생각으로 역설적이게도 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을것이고 나는 안전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코르토나.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3.02.20 09:52

 

<투스카니의 태양>

 

언제나처럼 나는 주제와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들로 이 기나긴 일기를 시작하려한다.

 블로그의 유입로그를 들춰보면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 날들이 가끔씩 있다. 

지난 주말 같은 경우에는 유입 키워드의 대부분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였다.

알고보니 작가 김영하가 공중파 토크쇼에 출연한 것.  

전세계 20여개국중 리투아니아어로도 번역된 그의 소설이 있으니

하루키같은 글로벌 작가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농후한 한국의 작가는 정말 김영하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인상적이었던것은 키보드에 손을 올리면 마치 뇌가 손가락 끝에 달린것처럼 글이 술술 써진다는 그의 말이었다. 

작가라는 이름으로 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판타지와 현실로부터 얻은 영감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해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설득력있는 메세지까지 첨부해서 전달 할 수 있는 직업 마법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속에서 일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결말까지 차분하게 이끌어가는 능력과 통찰력.

 일관성없이 중구난방하는 주인공을 들여놔도 소설을 관통하는 일관성은 필수불가결한것이니 이들에게 요구되는것은

풍부한 상상력뿐만아니라 극도의 집중력인것이다.

 

 

근데 나는 사진을 업로드해놓고 멍하니 앉아서 거의 30분째 이 장면을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손가락 끝에 뇌는 커녕 식욕을 촉진하는 혈자리가 빼곡히 박혀 자판을 두드릴때마다 음식 냄새가 흘러나오는것 같다.

중간에 갑자기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가 떠올라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 를 검색해서 듣고 왔다.

그리고 왜 미야자키하야오가 갑자기 생각났지를 생각해내는데 다시 10분이 흘러갔다.

프란시스가 마르첼로를 찾아 포지타노에 도착해서 오토바이를 타고 구불구불한 해안 도로를 달릴때 경쾌하게 흐르는 노래와

케이팝 스타에서 노래 잘한 참가자들 심사평을 할때 희망차게 흘러나오는 노래가 너무 비슷해서 검색을 해봤는데

케이팝 스타에 나온 노래가 모노노케 히메 영화음악이라는 답변이 있었다. 그래서 그 음악을 찾으러 유튜브에 간거다.

이 빵점짜리 집중력과 본인의 생각을 역추적하는 쓰잘데기없는 집요함으로 대략 40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사진 속 프란시스는 여전히 '브레마솔레'의 뒷마당에 앉아서 오후의 와인을 만끽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두고두고 곁에 둘 수 있는 친구를 찾는 과정과 다름없다.

지금부터 서두르지 않고 죽을때까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 100권을 모으는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물론 고르는 책마다 매번 감동받는 기적이 일어나거나 정말 다독을 하지 않는 이상은 어쩌면 100권도 적은량은 아닌것 같다.

책 한권의 두께가 대략 2-3센티 정도라고 하면 100권의 책을 위한 공간은 140센티미터짜리 선반 하나 혹은 두개면 충분하겠다.

영화 얘기를 하자면 구체적으로 나만의 '크라이테리언 콜렉션'을 만들고 싶다.

그런 영화들을 하나씩 하나씩 챙겨보고 까먹지 않을정도로 감상을 기록한 후에 피아노위에 쪼르륵 세워두고 싶다.

각기 다른 영화들의 주인공들을 끌어내서 한자리에 모아놓고 그들이 대화를 하는 장면을 상상하곤 한다.

그들을 좋아하는 '나'라는 관객을 매개로 그들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 사랑해가는 과정을 상상한다.

얼마전 집에 돌아오는 내내 나에게 피로감을 주는 몹쓸 것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나에게도 '힐링'이 필요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어떤식으로 나를 치유할 수 있을까.

구구절절 문맥상 앞뒤가 맞지 않는 이런 글들을 적어내려 가는것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보는것.

무엇보다도 '힐링'에 다급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이런 영화들을 다시 한번 봐주는것이다.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을 나만의 콜렉션에 집어넣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투스카니의 태양>의 프란시스도 작가다. 학생을 가르치고 문학비평도 한다.

글을 좀 쓴다 하는 사람들은 전부 비슷비슷한 길을 가는가보다.

자기 작품을 쓰고 누군가에게 글쓰는 법을 가르치며 남의 작품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 있는 사람들.

글쓰기에 필요한 어떤 기술이 있고 훈련을 거쳐서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운다는것이 미심쩍으면서도

그런 기술을 자신있게 전달할 수 있고 자신의 주관적인 의견을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는

작가라는 이름의 사람들을 한번 만나보고싶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이곳저곳을 떠돌며 정착과 떠남을 반복하면서 원하는 글을 쓰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일부 작가들의 삶.

금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해방되어 아무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듯한 그들의 삶.

한편으로는 그런 삶이 엄청난 성공에서 얻어지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안다.

돈과 물질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구조에서 자정능력을 갖추고 순환하는 그런 독립된 삶이 분명 존재하고

우리 모두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프란시스의 삶은 시간과 돈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토대위에서시작되고

마치 우연처럼 운명처럼 다가온듯한 그 새로운 삶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말랑한 심장으로 그는 토스카니의 호흡에 조금씩 익숙해져간다.

영화 속 투스카니의 풍경과 한적한 코르토나의 오래된 고택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런 장면은 시종일관 지지직거리며 내 동공에 촛점을 맞추려 애쓰는 시력 검사기 속의 풍경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스포이드로 점을 찍어놓은듯 촘촘이 피어있는 붉은 양귀비 꽃과 초코송이처럼 줄지어 서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마치 이 험난한 인생에서 너희를 구제해 줄 수 있는것은 우리뿐이라고 말하는듯 도도하고 새초롬하다.

구불구불 엉켜있는 코르토나의 좁은 골목사이로 막간을 이용해 담배를 피우던 식당 종업원이 떠오른다.

2주간의 이탈리아의 여행에서도 코르토나를 피렌체나 베네치아보다도 우선순위에 두었었다.

그만큼 영화는 인상적이었고 한번의 기차 여행으로 이 언덕위의 소도시에 닿을 수 있다는 현실은 더욱 감격스러웠다.

여행을 다녀온지 3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영화를 다시 보고나니 투스카니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하나의 풍경에서

내가 잊고 있었던 많은 자잘하고 구체적인 풍경들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다.

 

 

바람 핀 남편때문에 이혼을 하지만 캘리포니아 이혼법에 따라 오히려 자기 집을 위자료로 주고 마는 프란시스.

평생 죽을때까지 사랑하겠다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단 한순간도 사랑한적 없다고 말할때의 절망감을 아냐고 묻는 프란시스.

지은 죄를 봐서는 에이 그깟 집 먹고 떨어져라 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녀의 말처럼 'it's so surreal'이다.

가구와 집기들을 전부 내버려두고 책이 담긴 종이상자와 파란색 유리병만 달랑 들고 나와

각기 다른 절망에 허덕이는 세입자로 가득한 허름한 임대아파트에 잠시 새 둥지를 튼다.

그리고 게이 커플들과 함께 떠난 투스카니 투어에서

그녀가'브레마솔레' (태양을 갈망하다)라는 이름의 오래된 집을 충동적으로 구입할때까지

프란시스는 길을 잘못들어서 여기저기 퍼덕거리며 부딪히는 비둘기처럼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한다.

 

 

이혼 후 좌절상태에 놓인 프란시스는 자연스러운 경로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은 마치 다양한 형태의 문학적 언어로 그녀를 위로하고 그녀는 그들에게서 삶의 영감을 얻는다.

때로는 분수대에 뛰어들어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을 재연하는 이탈리아인 캐서린의 시적인 운율로

글을 쓰는 사람이면 세입자들 유언쓰는것을 도와주면 되겠다고 조언하는 아파트 임대업자의 시니컬한 블랙유머로

이미 수만명의 이혼 서류를 낭독했을 변호사의 '넌 곧 다시 행복해 질거야'라는 위로는

마치 조간 신문 한 귀퉁이에 적혀진 그렇고 그런 처세술처럼

채팅으로 바다 건너 젊은이와 사랑에 빠진 할머니와 서로 죽고 못사는 소년 소녀는 어느 낭만소설의 미사여구처럼

 그녀의 표정과 마음가짐을 조금씩 움직인다.

그녀는 더이상 이전처럼 전지전능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고 '네 작품의 등장인물은 비현실적이야'라고 비판할 여력이 더이상 없는것이다.

그녀는 그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서 연민을 느끼고 동시에 그들에게서 치유받는다.

 

 

프란시스를 보면서 문득<사이드웨이>의 마일즈가 생각났다.

똑같이 이혼을 경험하고 방황하지만 전남편과 전부인은 이미 마음 붙일 상대를 찾아 보란듯이 살아간다.

불행은 얼핏 절대자의 모습으로 순식간에 행복을 집어삼키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를 옭아매는것은 상대적인 박탈감인것.

그녀가 상속받은 수천병의 빈 와인병과 그가 차에 싣고 떠나는 한 상자의 샴페인.

그가 햄버거와 함께 들이키는 61년산 와인과 텅 빈 정원에 앉아 홀로 홀짝이는 그녀의 와인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이 영화에 집중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다이앤레인의 풍부하고도 능청스러운 표정연기와

달콤한 포도알처럼 목구멍을 넘어가는 다이앤 레인의 나레이션이다.

세상의 모든 여배우를 통틀어서 과도하지 않게 가장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배우는 그녀가 아닐까.

앤디맥도웰은 더이상 영화를 찍지 않는것 같고 샤를롯 갱스부르는 이미 모두의 뮤즈가 되어버린듯해서 배제한다.

마르첼로와 하룻밤을 보내고 침대위를 텀벙거리며 환희에 젖는 그녀와

친구의 임신소식에 레스토랑이 떠나갈듯 '곧 이모가 되요.제가 곧 이모가 된다구요'라고 능청스럽게 떠드는 그녀.

천둥번개가 휘몰아치는 어둠속에서 부엉이와 마주보고 '넌 안전해, 제발 날 놀래키지마'라고 부서질듯 애원하는 그녀.

 

 

어떤 장면에서는 문득 문득 '언페이스풀'의 그녀가 생각나서 묘한 긴장감도 느꼈다.

긴 바바리에 롱스커트를 입고 로마를 배회하는 시크한 그녀가 이탈리아인 마르첼로를 만나는 장면과

 포지타노의 해변에서 마르첼로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그녀는 숨길듯 숨기지 않으며 욕망을 드러낸다.

'언페이스풀'에서도 아마 긴 코트를 입었던 그날 갑자기 불어오는 폭풍에 상처를 입고 그 몹쓸 프랑스인을 만난다. 

낯선 프랑스 청년의 서재에 앉아서 그에게 묘한 끌림을 느끼고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책망하던 그녀의 표정.

 

 

사슴같은 슬픈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벽난로 앞에 앉아서 울먹거리며 마르티니에게 고민을 토로하는 다이앤레인의 표정은

정말 빨리 불을 그만 지피고 와서 나를 안아줘 하는 눈빛이었다

슬픔에 허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당신이 자꾸이러면 사랑에 빠져버릴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부동산 중개업자 마르티니

솔직하고도 멋진 신사인 그가 그런다.  난 한번도 부인을 배신한적이 없다고.

i've never been 'unfaithful' to my wife

대화 전개상 별다른 의도없이도 워낙에 자연스러운 단어 사용이지만

오드리 웰스가 <언페이스풀>에 출연한 다이앤레인을 생각하며 재치를 부린게 아닐까 하고 또 혼자 몹쓸 상상에 잠긴다.

적어도 다이앤레인이 파벨과 극장에서 오드리 웰스의 <조지오브정글>을 보는 장면은 몹시 센스있었으니깐.

한밤중에 일어나서는 밥먹을 사람도 없고 잠 잘 사람도 없는 이 집을 산것을 후회한다면서도

이 집에서 누군가가 결혼을 하는 상상, 가정을 꾸리는 상상을 한다는 그녀에게

이탈리아인 마르티니는 그녀를 포함해서 '힐링'이 필요한 모든이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에는 제머링(semmering)이라고 불리우느 알프스 산맥의 한 구간이 있다.

매우 험준하고 높은 지역에 위치한 빈과 베니스를 잇는 그곳에 사람들은 철로를 만들었다.

그들은 아직 기차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에 이미 철로를 만들었다.

언젠가 기차가 다닐거라는것을 알았기때문이다.'

 

 

행복한 삶을 살기위해서 사랑을 하기위해서 우리는 정말 눈이 멀어야 할 필요가 있는것일까.

예측불가능한 내일을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오늘을 재단하고

이미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며 현실을 평가절하하고 추상적인 행복에 집착하는것에 너무 익숙해진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우리는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법에 서툰것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희망을 북돋는것에 익숙하지만 막상 우리 스스로가 슬픔에 닥쳤을때 우리는 한없이 나약해진다.

덜익은 올리브처럼 쓰고 포도처럼 달콤하고 시큼한 레몬첼로처럼 끊임없이 변주되는 인생에 우리는 익숙하지 않다.

무엇이든 익숙해지는데에는 훈련이 필요하고 인생의 달고 씀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그 훈련이라는것은

그냥 '살아가는 것' 그 자체였던 것.

사람들은 행운을 가져다주는 무당벌레를 찾아 헤매지만 행복은 역설적이게도 그 본질을 망각하고 있을때 찾아온다.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 행복은 생각보다 가까운곳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것이다.

성 로렌조 상을 선물받고 폴란드인 수리공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나서

내 주변에 항상 내가 요리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었구나 하고 깨닫는 프란시스의 나레이션이 생각난다.

 

 

Posted by 영원한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