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크 질렌할'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6.12.05 Demolition_Jean-Marc Vallée_2015 (3)
  2. 2015.11.06 [Rocky] 실베스타 스탤론의 록키를 복습하다. (3)
  3. 2015.10.07 [Southpaw] Antoine Fuqua (2015)
  4. 2014.07.06 <Enemy> Denis Villeneuve (2013)
Film2016.12.05 23:35



참으로 오랜만의 장거리 비행.  자주타는 비행기는 아니지만 비행기에 앉으면 역시 영화 목록을 가장 먼저 확인하게 된다. 제작 발표가 나왔을때부터 보고싶다 생각했었지만 결국 보지 못하고 온 장 마크 발레의 <데몰리션>이 한눈에 들어왔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http://ashland.tistory.com/170)이나 <와일드> 같은 영화로 알려지긴 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얼떨결에 접하고 푹 빠졌었던  <카페 드 플로르>(http://ashland.tistory.com/133)의 감성으로 남아있는 감독이다. 게다가 좋아하는 두 배우 제이크 질렌할과 나오미 왓츠가 함께 나와서 그들의 음울하고 매혹적이었던 어떤 영화들, 나이트크롤러나 에너미(http://ashland.tistory.com/186), 25그램 같은 영화들도 연달아 떠올랐다. 그 영화 속 그들의 표정을 끌어낸다면 난 이 영화도 좋아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맨 뒷자석에 앉았던 탓에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는 영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취침모드로 한 톤 낮아진 조명아래에서 승무원들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였다.  아이가 만지고 놀던 기내 제공 이어폰의 스펀지가 떨어져나가서 신경질적인 발성이 귀를 괴롭히긴했지만 한쪽이 망가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때만큼의 불편은 느껴지지 않았다.  와인을 마시지 않겠냐는 물음에 그러겠다고 하고 기내식으로 나온 치즈와 빵을 잘랐다. 10시간 가량되는 비행동안 나는 이 영화를 띄엄띄엄 그리고 고집스럽게 세번을 반복해서 보았다.  한편의 영화를 매끄럽게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오히려 그런 상황에 모종의 쾌감을 느끼며 그래도 보고말거야 라는 오기와 함께.  와인은 엎질러질것이 무서워 여유롭게 마실 수 없었고 잘라놓은 치즈와 빵은 얼마지나지 않아 작은컵에 섞어 담았야했지만 여행을 하고 있다는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에는 모든게 충분했다.  그야말로 하늘에 붕떠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 어떤 영화들에는 그런 장면이 있다. 깜깜한 하늘속 비행기에 주인공이 앉아 있는데 마치 그 자리만 구멍을 낸것 같은 효과를 써서 모니터가 뿜어내는 빛으로 주인공 얼굴만 환하게 비춰주는.  소리없이 영상만 봐야 했던 순간이 많았다.  진공상태에서 유영하는 사람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피사체들이 내 주위를 느리게 감싸 돌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애써 감정을 전달하려는 그런 느낌이었다. 대사 자체를 듣지 못해도 영상만으로 가슴에 묻어나는 감동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절한 배우들의 눈빛과 적당한 여백과 침묵. 그리고 그것들을 뒷받침해주는 전체적인 색감 같은것들.  정말 좋은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는 아마 소리를 들을 수 없어도 아름다운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다시 대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을때엔 마치 정말 알고싶었던 누군가의 심정을 전해 듣는것 같아 또 뭉클했다.  




 Demoliton_Jean marc vallee_2015


망가진 자판기는 초코바를 토해 내지 않고 망가진 냉장고 속에는 물이 흐른다. 기계는 고장이 나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불편을 주지만 무시하려고 하면 흐르는 물 아래에는 접시를 받쳐놓으면 되고 돈을 삼킨 자판기는 운이 없다 생각하고 뻥차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영원히 방치될 수도 있고 수리를 하려는 누군가가 나타날 수도 있다. 삐걱대는 감정도 무시할 수 있다.  타성에 젖은 사랑의 감정은 완전무결하게 보여지는 직업이나 집같은 물질적인 배경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얼마간은 유지가 된다.  돈을 줄테니 집 부수는것을 도와줄 수 있게 해달라던 깔끔한 양복 차림의 제이크 질렌할의 얼굴이 계속 떠오른다. 영화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엉망이 되어버린 어떤 물건이나 감정을 한켠에 두고  모자름 없는 어떤 완벽한 상태를 도리어 파괴하는 과정을 통해 부서져 내려앉은 감정을 재복원하려는 그의 변화를 예민하게 보여준다.  인간이나 물체에 관해 차곡차곡 싸여 성처럼 거대해진 우리의 감정이 망가진 물건을 해체해서 그 원인을 알 수 있는것처럼 어떤 파괴과 분해를 거쳐서 조사되고 이해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끝을 향해 치닫는 감정들의 아주 미세한 성분까지 알아내어 그것에 대처하는 일목요연한 처방전을 받을 수 있다면 삶은 조금 수월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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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5.11.06 06:51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찾아서 보면 완전 처음 본 듯 생소한 영화들이 있다. 제이크 질렌할이 복서로 분한 <사우스포> 를 보고 예전에 본 복서들의 영화들을 하나씩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 록키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누구라도 느꼈겠지만 사우스포의 플롯 자체가 록키를 향한 오마쥬였기때문이기도 하고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최근에 실베스타 스탤론이 록키 1,2편의 상대 복서였던 아폴로 크리드의 아들의 트레이너로 나오는 영화를 찍었다기에 더더욱 록키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우스 포는 선배 복싱 영화들과 비교하면 뭐랄까 맷집이 부족한 영화였다. 동네 복서들의 시큼한 땀냄새로 뒤범벅된 촌스러운 동네 도장의 절박함 대신 많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힌 돈 냄새로 퀴퀴한 라스베가스의 현란한 자선 경기장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던 한마디로 쨉이 안되는 영화. 록키와 비교하면 더더욱 그랬다. 실베스타 스탤론이 정말 사력을 다해 만든 이 복싱 영화의 고전은 가장 원시적이기에 진솔했고 줄거리가 단순한 만큼 아무런 불필요한 화학 첨가물이 없기에 쫄깃하다. 필요하다 싶을때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메인 테마 음악도 그렇고 매 영화마다 촌스러울 정도로 일관적인 기승전결은 신기하게도 영화에 더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다보면 주인공 록키를 진심으로 응원하고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비단 링위의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사랑과 인생 자체를 순수하게 응원하게 된다. 어른이 되어서 보는 록키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록키는 곧 일흔이 되고 영화속에서 아침 운동을 하는 록키 뒤에 따라붙어 필라델피아 시내를 뛰던 아이들은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되었겠지. 록키의 아들은 이미 오래전에 독립했고 록키가 그토록 사랑했던 애드리안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애드리안의 술고래 오빠 폴리는 미우나 고우나 여전히 록키의 조력자로 남아 있다. 물론 이 스토리도 이미 10여년전에 만들어진 록키의 완결편격인 <록키 발보아> 속의 이야기이다. 





록키1 (1976) 록키 2 (1979) 록키 3 (1982) 록키 4 (1985) 록키 5 (1990) 그리고 록키 발보아 (2006) 까지. 어떤 영화배우들이 자신이 출연한 영화 속 캐릭터를 한평생 그늘처럼 그리고 훈장처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지만 실베스타 스탤론의 록키 캐릭터만큼 고유하고 따뜻한 캐릭터는 없었던것 같다. 그것이 스탤론 자신의 이야기인지 록키라는 인물이 어딘가에 실존하고 있는지 헷갈릴 만큼 스탤론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단 한번의 인생에서 록키와 람보같은 상징적인 배역을 연기할 수 있었던 스탤론에 질투가 난다. 이만큼 질긴 생명력을 가졌던 시리즈가 있었을까. 록키가 이토록 로맨틱한 영화였는지도 새삼 느낀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인간이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이성에 대한 사랑, 부모로써 자식에게 느끼는 사랑, 동료애, 스승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다.






아폴로 크리드와의 시합에서 마지막 라운드까지 기적적으로 버텨낸 후 소감을 묻는 기자들을 무시한채 퉁퉁부은눈으로 애드리안의 이름을 울부짖는 1부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다시 말해서 무엇하리. 그리고 록키가 겪는 모든 변화와 좌절을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며 함께 묵묵히 감내해 나가는 동반자 애드리안의 모습도 요즘의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순수함이다. 요즘 세상에 그런 순수함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드라마와 영화처럼 감정을 전달하는 파급력이 높은 매체에서 조차 조금 덜 순수하고 계산적이 되는것이 요즘 같은 세상에선 오히려 당연하다는식으로 합리화하는데 익숙한 탓이다. 아버지로써의 록키의 이야기는 이렇다. 록키 5편에는 실제 스탤론의 아들이 록키의 아들로 출연했는데 필라델피아의 스타 록키 발보아라는 거대한 그늘 아래에서 느끼는 아들의 외로움과 그의 불안정한 정체성이 그려진다. 그것은 아마도 실제 스탤론이라는 유명 배우의 아들로써 겪었던 어려움을 스탤론의 입장에서 반영했던것인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록키 발보아>에서는 다시 링에 오르면서 집중 조명을 받는 아버지로 인한 부담감에 반발하는 아들이 나오는데 어두운 골목 한켠에서 아들에게 내뱉는 록키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얼마나 강한 펀치를 받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 펀치 이후의 과정이 중요한것.'  강한 경쟁자들과 겨루면서 점점 자신 스스로가 되어갔던 록키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아버지라는 거대한 경쟁자를 가진 채 살아야했던 그의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가정을 꾸리지도 못하고 동생 애드리안을 구박하며 술주정뱅이로 평생을 록키 곁에 머물었던 폴리에 대한 록키의 애정은 어떤가. 그것은 동정이었을까? 타인에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길 강요하지 않는것은 한 개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일지도. 그것도 사랑의 여러 형태중 하나일지 모르겠다. 록키가 그저 그런 동네 복서에서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와 경쟁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어쩌면 록키와 아폴로 크리드, 그들이 서로에게 느낀 순수한 의미에서의 동료애에서 비롯된것인지도 모른다. 쉬운 승부와 흥행을 위해 별볼일없는 동네 복서를 섭외해서 링 위에 서는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이지만 의외로 선전한 록키와 이기고도 진 게임을 벌이고 자괴감에 빠지는 승부욕 넘치는 캐릭터이다. 그런 그들이 다시 함께 링 위에 서고 선수와 트레이너의 관계가 되고  아폴로는 러시아 선수에 맞서 죽을 각오로 다시 링위에 오른다. 나태에 빠진 서로에게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었던 그들, 그들이 느낀 끈끈한 동료애는 그들 각자의 인생에서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것이 무엇인지를 서로 너무 잘 알았던데서 온 일종의 공감이었다. 록키만큼이나 영화사에 전무후무한 캐릭터로 남을 트레이너 할아버지 미키. 사우스 포우에서 제이크 질렌할이 포레스트 휘태이커의 도장에 찾아와서 오르던 그 긴 계단씬은 트레이너가 되어 달라는 록키의 부탁을 받아들이려 록키를 찾아와 미키가 오르던 록키의 집 계단씬에 대한 오마쥬이다. 혹독한 훈련에 험한말을 일삼으며 록키를 채찍질 하는 미키는 록키에게는 부모와 다름없다. 나이 든 미키가 오르던 긴 계단도 냉동 고기에 피 터져라 펀치를 날리고 빈속에 날달걀을 몇개씩이나 깨어넣고 새벽의 필라델피아를 누비던 록키의 절실함과 크게 다르지 않다. 뭔가를 절실히 원할때 그리고 그 욕망을 지지해줄 든든한 조력자가 있을때 인생은 한결 수월해진다. 록키의 인생은 미키로 인해 수월했고 미키의 노년은 록키로 인해 의미있었다.





록키가 회계사의 부정으로 가진 재산을 전부 잃고 옛집으로 돌아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때에도 영화는 갑자기 변한 삶으로 인한 가족의 갈등이나 생활의 어려움 따위를 구태의연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이들은 많은것을 누렸지만 그것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다. 많이 사랑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적어도 영화는 인생은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돌아 온 좁은 부엌에서 모두가 둘러 앉아 먹는 스파게티는 그 어떤 요리보다 맛있어 보였다. 그저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따뜻하게 지은 밥을 먹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으면 그걸로 족하다. 스스로를 향한 필요 이상의 동정과 나보다 나은 타인에 대한 습관적인 적대감을 덜어내면 삶은 비교적 쉽게 살아지는것일지도. 삶에 향한 록키의 담담한 위트와 유머를 본받고 싶다. 중학교때 본 클리프행어나 데몰리션맨 같은 실베스타 스탤론의 영화들이 오히려 깊게 뇌리에 남았기에  난 그가 이렇게 진솔하고 위트 넘치는 시나리오를 썼을거라곤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너무 어릴적에 본 영화속의 록키는 그저 촌스러운 트레이닝복을 입고 조깅중에 팔을 휘두르며 필라델피아 박물관 계단을 올라서서 머리 위로 손을 흔들던 그 명장면속의 그였을뿐. 비슷한 시기에 찍은 람보 시리즈속의 딱딱하고 철두철미한 비밀 병기 람보의 표정과 영어 억양을 생각해보면 록키속에서 시종일관 농담을 던지며 나사 풀린듯 느릿한 이탈리아 억양으로 연기하는 스탤론의 연기력도 반할만하다. 나는 알파치노만큼이나 실베스타 스탤론을 좋아하게 되었다.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5.10.07 04:50


 


제이크 질렌할은 잠깐 안 본 사이에 또 이렇게나 다작을 해주셨다. 차례대로 챙겨 봐야함. 요새 재미있게 보고 있는 미드 <트루 디텍티브> 시즌 2의 레이첼 맥아담스. 요즘의 그녀를 보며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엘리자베스 슈 역을 연기했더라면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자주 생각한다. 예전에 주로 로맨틱 영화 속의 전형적인 예쁜 여인들을 연기하곤 했다면 최근에 와서 강하고 개성있는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연기하려 부단히 애쓰고 있는듯. 영화 포스터에서도 느껴지지만 지금까지 함께 했던 그 어떤 상대배우들보다 두 배우가 잘 어울리는것 같기도하다. 복싱을 소재로 하는 많은 영화들은 로버트 드 니로의 <성난 황소>와 실베스타 스탤론의 <록키>와 같은 고전들에 어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다. 후광이라고 해도 좋을 그 것. 스크린 속에서 반짝이는 링은 이미 관객을 상대로한 게임에서 이 영화들에게 주어지는 어드밴티지와 같다. 성난황소나 록키와 같은 고전 영화들이 있기 때문에, 심지어 30년후의 드니로와 스탤론이 <그루지 매치>와 같은 웃픈 영화를 찍어도 야유는 커녕 더 진한 향수를 자극할 뿐인 그런 강렬한 영화들 덕택에 그와 비슷한 뭔가를 기대하며 계속해서 보게 되는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중에서도 복싱만큼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소재도 없는듯. 왜냐하면 복싱만큼 적나라한 스포츠는 없으니깐. 링 위에서 선수들은 벌거숭이가 된다. 사각의 링에 갇혀 강점도 약점도 거침없이 드러내야 한다. 드니로도 스탤론도 결코 전형적인 미남 배우가 아니었단것을 생각하면 제이크 질렌할이 연기하는 복서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영화를 위해서 적지 않은 트레이닝을 거친 듯한 느낌, 제이크 질렌할 특유의 선하고도 매력적인 입꼬리 올라가는 웃음을 볼 수 없었던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무게감 있는 연기었지만 영화 자체만 놓고 보면 결과적으로 복서 제이크 질렌할의 사우스포가 20년후의 누군가에게 록키와 라모타 만큼의 향수를 느끼게 해줄지는 의문이다.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승리하길 바라는 관객의 바램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모두가 해피엔딩을 기대하고 결국 그렇게 될거라는것을 알지만 아무런 긴장감도 없는 지나치게 예측 가능한 착한 스토리 진행도 그렇고 극의 일관적인 흐름을 깨는 몇몇 에피소드들. 예를 들어 포레스트 휘태이커가 체육관의 흑인아이의 죽음에 자책하며 오열하는 장면은 시나리오가 나쁘면 포레스트 휘태이커 같은 배우도 발연기를 할 수밖에 없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엉뚱했고 양육권을 빼앗긴 빌리 호프(제이크 질렌할)가 딸을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내뱉는 '안경은 어디갔니, 새 신발은 어디서 놨니' 같은 진부한 대사들은 불보듯 뻔하게 불행한 대상들에 그러한 인위적인 상황들을 연출해서 오히려 리얼리티를 떨어뜨리고 만다. 몇몇 장면들은 <록키>를 향한 오마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주인공들이 단골로 드나드는 싸구려 술집의 분위기도 심지어 텔레비젼 배치도 거짓말처럼 비슷하다.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도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은 그닥 달라진것 같지 않다. 빌리 호프가 포레스트 휘태이커의 체육관으로 찾아와 길고 경사진 내부 계단을 오르는 장면은 록키를 체육관에서 내친 할아버지 코치가 록키의 집에 찾아오는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계단이라는 막막한 터널을 지나면 혹시나 새로운 세상이 있을까 서로가 서로를 기회이자 마지막 희망으로 여기는 그 상황들은 이들 영화에서 항상 반복된다. 한쪽에서는 피터지는 훈련이 한쪽에서는 비정한 스포츠 비지니스가 행해진다. 타이틀 방어전이라는 복싱 특유의 메커니즘이 있다.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기 위한 노력과 가진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중 고귀한것은 어떤 것일까. 비단 챔피언 벨트에 국한된 질문은 아닐것이다.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4.07.06 04:09






이 장면을 흑백처리하면 정말 딱 70년대 B급 호러의 한 장면같다. 물론 다소 시대를 앞서간. 왜 디브이디에 수록된 메이킹 필름을 보면 빌딩 미니어쳐 위에서 실 달린 거미를 인형극처럼 조종하는 감독이 나올법한. 필요 이상의 급격한 성장을 이룬 70년대 코스모폴리탄의 처참한 말로를 그린 영웅도 기적도 드라마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깔끔한 클래식 호러 말이다. 재난 영화든 호러 영화든 그 사건의 발단은 보통 인간 스스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 결말의 중심에서 어김없이 부각되는것은 서로를 보듬고 감싸안는 인간과 인류애이고  필요에 따라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하는 모래알 같은 그런 인류애가 가장 필요로 하는것은 괴물, 몬스터, 악의 무리 같은것이다.  내 생각에 재난 영화가 던지는 메세지는 단 하나이다. 인간은 절대로 적과 함께 공존할 방법을 모색하는 종족이 아니라는 것.  그 메세지의 절정을 보여주는 최고의 영화는 바로 가레쓰 에드워즈의 저예산 SF <Monster>.  하지만 이 영화 일기가 <Monster>에 대한것은 아니고 그냥 저 장면의 공포스러움이 딱 <Monster> 식의 공포다 이거다.  진정한 에너미, 인간의 근원적인 적은 인간의 에고라는 메세지는 어쩌면 꽈고 꽈서 뒤집어 보아도 유사하다. <Shame>식의 차가움과 자조. <Monster>식의 공포와 냉소.  <아이즈 와이드 셧>의 비밀스러움과 퇴폐 <아메리칸 사이코>의 위선과 부조리를  데이비드 린치 혹은 크로넨버그를 추종하며 자란 아이가 만든 영화 같은 <Enemy>.  제이크 질렌할이 아담과 안토니, 1인 2역을 연기했지만 사실 하나의 자아를 연기했다고 해도 옳다.  찢어진 사진이나 6개월이라는 공백. 엄마와의 대화등에서 사라진 퍼즐 조각을 찾아 낼 수 있다. 아담의 제이크 질렌할이 <도니 다코> 속 도니 느낌이 들었다면 안토니의 제이크 질렌할은 <러브 앤 아더 드럭스>의 그 약장수를 닮았다. 걸친 옷과 눈빛만 조금 바뀌었을뿐인데 이토록 다른 두명이 될 수 있다니.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이의 존재를 알고났을때의 공포는 이내 상대가 가진것을 탐하는 원초적 욕망으로 탈바꿈한다.





대학 건물의 거대한 노출 콘크리트. 햇살에 무방비로 노출된 텅 빈 벤치. 빛과 어둠만이 존재하는 극도로 절제된 색감.  경이로운 대자연을 지척에 두고 콘크리트 성냥갑속에서 먹고 배설하며 살기위해 발악하는 우리들을 조곤조곤 보여줬던 <Samsara> 나 <Baraka>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와 특히나 흡사한 이 장면. 모든 이의 욕망이 범벅된 도시의 빌딩 숲과 유사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였다가 흩어지는 모래성같은 도시 아담이 안토니가 소속된 영화사를 찾아가는 개미 한마리 보이지 않는 토요일 오후의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어두운 아파트 속의 무기력한 아담의 모습은 마치 <인섬니아>의 알래스카에서 불면증을 겪는 알 파치노를 닮았다.  내부에서 충돌하는 서로 다른 두 자아를 용납할 수 있느냐의 문제.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열쇠.   인기척없는 이른 아침에 의도적으로 촬영된 듯한 비밀스러운 고요함과 선글래스 혹은 헬맷속에 숨겨지는 욕망.  제이크 질렌할 대신 마이클 패스벤더나 크리스쳔 베일이었어도 아마 잘 어울렸을거다.










Posted by 영원한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