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알지도 못하면서>
새해 다짐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되도록이면 이러진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해본것이 몇가지 있다.
단지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된다는 생각으로 정해진 시간에 자려들지 말자.
저녁을 먹었다는 이유로 야식을 피하려들지 말자. 내일 쉬는 날이어도 머리가 가려우면 그냥 감자.
뭐 이런 별 쓰잘데기없는 다짐들인데 한마디로 본능에 충실하자 그런거다.
내 자신에게만이라도 좀 덜 설명하는 생활을 해야하지 않을까 해서다.
자잘한 욕구들을 억누르기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정넘어서 또 폭풍쉐프질.
얇은 스파게티면을 삶는데에 고작 6분의 시간이 필요한데 가스렌지 앞에 서기까지 한시간을 망설이는것은 죄악이다.
마늘과 토마토가 익는 시간동안 창밖으로 대여섯대의 차가 지나갔다.
음식을 먹고 빈그릇을 치우는 시간까지 고작 15분이 걸렸다.
차라리 후회를하고 결과를 합리화하는것이 욕망을 억제하는것보다 천배는 쉽다.
쉬운 인생을 살아야겠다는것이 요지다.
한번 시작한 퍼즐은 좋든 싫든 끝을 내야한다. 별로 재미없는 퍼즐도 조금이라도 맞춰놓은게 있으면 헝클르기 쉽지 않다.
퍼즐상자에 떡하니 인쇄된 완성품을 보고나면 공허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실제로 결합된 퍼즐은 훨씬 더 멋질거라는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집착이랄까.
적어도 홍상수가 영화를 찍는 이상 나는 계속 그의 영화를 찾아볼 확률이 높다.
그의 영화세계를 완성된 퍼즐이라고 하고 개개의 영화들을 하나의 퍼즐조각이라고 한다면
그 퍼즐조각들은 이미 그 작은 조각안에 어떤 분명한 그림을 지니고 있어서 쉽게 자기 자리를 찾는 그런 조각들인것 같다.
그가 굉장히 대단한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의 영화는 결합력이 좋은 퍼즐같다.
하나를 보면 다른 하나를 봐야할것 같고 나머지들을 보지 않고 새것을 보는것이 어색하다.
우리가 홍상수에 대해 알고 있는것은 그가 영화감독이고 마치 자기이야기를 하듯 영화를 만든다는것,딱 두가지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치 본인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를 만든다는것이다.
근데 실제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알길이 없다.
단지 내가 나도 모르는데 남얘기를 어떻게 하냐는 구경남의 대사에 다시 한번 눈뜨고 속아주는것 뿐이다.
예술하는 사람들이나 글 좀 꽤나 읽는 사람들의 치부를 드러내는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이러이러할것이라는 우리의 선입견과 그들의 속물근성에 공감하며 안도하는 우리들을 대놓고 조롱한다.
항상 서로를 선배며 선생으로 부르며 받들지만 진심을 터놓을 수 있는 가까운 인간관계는 거의 없다.
함께있는동안엔 누구도 서로를 직접적으로 할퀴지 않지만 시종일관 치사하게 서로를 견제하고 억지로 칭찬한다.
너 키가 이렇게 작았니? 너 왜 이렇게 살이 쪘어? 예쁘신것 같아요. 천재구나 등등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얘기들.
내가 진짜 예뻐? 정말요? 정말로 저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세요 처럼 거짓을 진실로 확인하려는 욕구로 가득찬 얘기들 말이다.
그나마 '부러우면 지는거다'류의 영화는 안 만들어서 보기 편하다.
자기 속을 들춰 보인것 같아서 불편하다는 사람도 많지만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생각보다 단순하다는것을 느끼는 순간 보는 동안은 유쾌해진다.
찌질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우리의 구질구질함을 필요이상으로 확대해서 보여주는것 뿐이다.
우월감보다 위험한것은 열등감이니 이 사람들이 전부 위태위태해 보인다.
심각한 컴플렉스에 빠진 사람들을 대하는것처럼 어려운것은 없다.
'쟤는 지가 잘난줄 알아'라며 상대를 비꼬는것은 어쩌면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는 다른 언어일뿐이다.
열등감에 빠진 이들은 다들 뭔가 구구절절 변명하고 설명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야'라고 애써 강조하는 진실은 지금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에 의해 순간순간 급조된것이기 일쑤다.
그래도 감독은 마지막까지 사수해야할 자존심에 대해 교묘하게 역설한다.
"오로지 내가 진실로 원하는것만을 원하며 자기 생각대로 살려는 충실함. 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의 자유"
우리는 앞으로도 비슷한 그의 영화들을 보며 숱한 안도의 기회를 부여받을 것이다.
'잘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아는만큼만 안다고 해요' 라는 고순(고현정)의 말에 모두가 잠시 뜨끔하지만
고순 본인도 잘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척하는 우리의 테두리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뜬금없이 돌밭으로 돌진해서 바다로 달려가는 구경남(김태우)과
술에취해 한밤중에 풀숲으로 들어가는 <해변의 여인>의 문숙(고현정)이 전혀 다른 사람같지는 않다.
우리중에 다 알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모두는 공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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