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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여름, Vasara, Лето

2022


새 학년이 시작되는 9월 1일은 가을의 시작이다. 단지 달 앞의 숫자가 바뀔 뿐인데 어제의 여름이 보란 듯이 지난여름으로 재빨리 치환되는 것을 보면서 늘 생각한다. 방금 끌어올린 그물 속에서 아직은 상처 나지 않은 채 팔딱거리는 이 여름의 기억들을 어떻게 하면 영원으로 지속시킬 수 있을까. 아직은 8월일 때 느긋하게 회상하고 싶었던 여름인데 가을이 급히 들이닥칠 것을 알았으면서도 또 늦어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라는 느낌이 유난히 그득했던 지난여름. 여름, Vasara. Лето.

타인의 기억을 열처리하고 통조림해서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감정 하나를 남겨준다는 것. 어떤 음악들. 노래하는 사람들. 어떤 영화들. 그들에겐 왕관을 씌워줘야 한다.

8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히페르볼레 Hiperbolė라는 리투아니아 밴드가 있다. 통일된 복장에 덥수룩한 헤어 스타일. 어디서든 만나면 합주를 해줄 것 같은 친숙함과 다소 촌스러운 기운이 조금 민망하기도 하지만 듣고 있으면 그냥 경쾌해지는 청량하고 정직한 목소리. 그들도 그런 추억의 왕관을 쓰고 있다.

절여온 고기를 샤슬릭 꼬치에 꽂던 사람, 감자칩 봉지를 부스럭거리던 사람, 이미 해먹에 돌돌 말려 술을 홀짝여야 할때만 머리를 들던 사람, 늦은 밤 아무도 먹지 않을 감자와 고구마를 전투적으로 포일에 싸서 모닥불에 쑤셔 넣던 친구 등 우리 모두 이미 새까매져 뻥 뚫린 구멍 같은 자정 언저리의 호수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호수 근처의 캠핑장은 군데군데 놓여있는 통나무 탁자를 기준으로 자연스레 널찍하게 구역이 갈리는데 저기 옆쪽으로부터 비틀비틀 술에 취한 여자가 걸어와 묻는다. '쩌기 옆쪽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음악이 너무 시끄럽다는데 여기도 그렇나요?'

숲과 호수에 가득 들어찬 정적에 비하면 음악소리가 경박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괜찮았다. 흘러나오던 음악은 히페르볼레의 메들리였고 모두가 Vasara 여름이라는 노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 이 노래를 정말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듣자마자 후렴구가 귀에 쏙 박혔다. 생활 속에서 대화 속에서 Vasara라는 단어가 유독 힘을 갖는 순간 우리 집에서는 이 후렴구를 부르는 농담같은 의식이 있다.

Vasara, Vasara, Jūra atnešė man, Gintarą lyg tava ašarą.
여름, 여름, 바다가 나에게 가져다 준 호박이 너의 눈물 같아.

발트해의 짧은 여름, 반짝이는 모래 알 속에서 누군가가 환호하며 집어서 꺼내 주기를 물끄러미 기다리고 있는 듯한 노란 호박 파편들이 너의 눈물 같다니. 그러니 바다에 가면 많은 이들이 그 눈물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린다고 생각했던 시간들. 한 여름밤은 그렇게 히페르볼레의 여름으로 채워졌다.

호수에 뛰어들던 아이를 보고 있을땐 영화 여름 Лето 의 한 장면이 떠올렸다. 술과 음악으로 흥건한 여름밤, 입고 있던 옷을 훌러 훌렁 벗어던지며 물속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던 80년대의 러시아의 젊은이들. 짧고 강렬하여 아쉽기만 한 여름이 만들어내는 장면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어디나 비슷하구나 느낀다. 이 근방 동네들이라면 더더욱.

빅토르 초이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주파르크의 마이크 나우멘코가 기타를 치며 부르던 노래도 Лето, 여름이다. 키노의 노래 중엔 여름은 곧 끝난다 Кончится лето 라는 노래도 있다. 전자는 말랑말랑하고 후자는 거칠지만 하나 같이 끝을 예감하고 있다는 것. '버터 바른 부분이 바닥을 향하고 있는 샌드위치'와 '동전처럼 닳고 닳은 바지' 를 닮은 세상을 읊조리던 이들이 등진 여름이 그저 구슬프게 다가온다.

촌스러운 벽지 곳곳에 붙어있는 다른 세상의 다른 앨범 커버들과 오이 단지가 놓여있는 공동주택의 풍경, 툭 분질러 먹는 못생긴 토마토, 오래된 아파트의 더러운 층계참, 지금도 변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대화방식, 해야 할 것에 관한 열망으로 가득 차서 사소한 것들에 대한 불평을 불허했던 이들의 삶과 자유까지. 아주 불우했던 시대에 대한 우회적인 묘사들을 보고 있으면 딱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지금의 시대는 지금의 여름은 어떤 식으로 묘사될까 궁금해진다.

언제까지나 남아있을듯 늑장을 부리면서도 드라마틱하게 자취를 감추는 여름의 태양. 가을이 여름을 집어삼키는 그 불친절한 모습은 기다리는 사람 아랑곳하지 않고 점심시간 푯말과 함께 야멸차게 사라지는 키오스크 직원 같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이 즈음의 모습은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옷차림이 매우 적절하게 바뀐다는 것이다. 마치 여름은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마치 모든것이 한 편의 연극이었던 것처럼. 때맞춰 찾아온 손님에게 말없이 방석을 내어주고 입고 있던 옷을 여밀 뿐이다.


Hiperbolė - Vasara


Зоопарк - Лето


Кино - Кончится Лет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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