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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차 한 잔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다. 장갑은 확실히 안 껴도 되고 5개월을 주야장천 입었던 제일 따뜻한 패딩도 이제는 드디어 세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계속 비가 오고 있는 걸로 봐선 내일부터는 분명 또 기온이 내려갈 것이다. 오늘의 라디에이터는 여전히 따뜻하고  서머타임도 시작되어 어제의 22시는 오늘의 23시가 되었다. 며칠 후면 내가 빌니우스에 처음 발을 디딘 그 주간이다. 그때 게디미나스 언덕에는 찢은 론리플래닛을 꽂을 수 있을 정도로 녹지 않고 얼음 결정이 되어가는 단단한 눈들이 가득했었고 어떤 날은 비가 하루 종일 내려서 호스텔 접수창구(?) 아주머니에게 우산을 빌려서 돌아다녔었다. 17년 전보단 확실히 따뜻해졌지만 날씨의 패턴은 여전히 비슷하다. 대부분의 카페들이 바깥으로 테이블을 내다 놓기 시작했다. 이제 밖에 머무르는 시간도 조금씩 길어질 것이다.

4월도 5월도 자신의 평균기온을 절대 배반하지 않을 예정이니 마치 대단한 봄이 온 것처럼 또 꼴딱 속아선 안된다. 날이 눈에 띄게 밝고 경쾌해지면 오히려 한창 추웠던 진짜 겨울의 어떤 나날들이 떠올리게 된다. 올 겨울엔 보온병과 티백을 들고 다니면서 차를 마셨다. 퇴근 후에 아이들을 데리러 갈 때까지 시간이 남을 땐 카페에 가기도 애매하여 보통 도서관으로 갔다.  사실 카페라는 곳이 최소한 한 시간 정도는 앉아 있을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가는 게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근래 트롤리버스를 거의 카페를 위한 홉온홉오프 관광버스처럼 이용하면서 그런 생각도 조금은 바뀌었다. 카페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짧을수록 어떤 커피의 인상은 진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당분없는 차 한잔으로 책냄새에 둘러싸여 숨을 한번 고르고 가는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제는 웬만해선 도서관에서 리투아니아어 책은 잘 빌리지 않는다. 기한 내에 못 읽을 가능성이 높고 대출 연장을 하려고 할 때마다 도무지 무슨 이유인지 대출카드의 비밀번호에 계속 오류가 생겨서 계속 비번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과연 정말 여전히 그렇게 대소문자를 구분하지 못하고 리투아니아어로 변환되었는지 모르고 마구 숫자 버튼을 누르며 나의 비번들을 오해하고 있는 것일까. 로그인의 세계에는 평균적으로 누군가는 계속 오류를 낸 것처럼 만들어야 대다수의 사용자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오류를 커버하며 기름칠을 한 것처럼 매끄럽게 잘 돌아가게 만드는 프로그램 언어 같은 게 있을거라고 억지를 부려본다. 그래서 요즘은 도서관에 가서 그냥 재밌어 보이는 책을 아무 곳이나 펴서 읽는다. 누군가가 읽고 제자리로 돌려놓지 않고 그냥 책수레에 놔둔 책이나 도서관측에서 나름 큐레이션 해서 표지 부분이 보이게 진열해 놓은 책들이라던가 아니면 대체로 읽어본 적 없는 러시아 소설이나 간혹 이름만 들어본 폴란드 소설에도 기웃거려 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든 책들의 시작이 궁금해지진 않는다. 물론 읽었던 곳들을 기억해 뒀다가 다시 가서 읽게 만드는 책도 있다. 그리고 또 결국 빌려오게도 된다.

물을 가득 담아 오면 차가 너무 옅어지니 물은 병의 65퍼센트 정도만 담는다. 산악영화에서 로프를 낭떨어지 아래로 늘어뜨리듯 조심히 티백이 빠지지 않게 아래로 내려준다. 그리고 우려졌다 싶으면 그걸 내부마개 바로 앞까지 바짝 잡아당긴후 마개를 잠근다. 그걸 뚜껑에 부어서 마시면 대여섯 번 정도는 부어야 한다. 400밀리 정도의 차 한 잔이면 대략 10장 정도의 책을 간혹 이런저런 딴생각도 하면서  이렇게 사진도 남겨가며 읽을 수 있다. 보온병의 원터치 마개를 아무리 꽉 잠가도 한 두 줄기의 물은 묘하게 흘러내린다. 그럴 땐 언젠가 카페에서 나에게 할당되었다가 쓰이지 못하고 나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었던 냅킨 한 장을 깐다. 그리고 물이 스며들어 젖은 냅킨은 탁자 옆의 라디에이터 위에 얹어두면 마치 다이얄 비누로 세수를 해서 뻑뻑해진 얼굴처럼 쭈글쭈글하게 바싹 마른다. 그리고 더 이상 뚜껑에 부어마실 차가 없을 때 그 바싹 마른 냅킨은 최종적으로 뚜껑의 내부를 닦으며 명을 다한다.

그나저나 스탠리 투치의 책은 언제 내 차례가 돌아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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