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과 12일 열리는 나토 회의로 빌니우스는 바쁘다. 리투아니아어에서도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설악산 정상에도 나토 정상 회의에도 동일 단어인 비루슈네 Viršūnė 를 사용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는 복수2격을 써서 '정상들의 만남 Viršūnių susitikimas'이 된다. 100여 대가 넘는 비행기가 결항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공항과 회의장 주위, 구시가에는 자동차는 물론 자전거도 운행 금지이고 대통령궁이 있는 구시가 중심은 회의 당일 보행 금지 구역이 된다. 당장 9일부터 구시가는 주차금지구역이 되었다. 구시가 주민들은 최소한 다른 구역에 무료로 주차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버스나 트롤리버스는 빌니우스 전역에서 4일간 무료 운행이다.
빌니우스의 일부 지역 주민들에겐 건물 옥상에 군병력이 배치된다는 문자가 발송되었다. 리투아니아군과 동맹군을 합쳐 대략 3000여명의 군인들이 이 기간 동안 코무날카가 가득 들어선 지역을 중심으로 보초를 서는 것이다. 갑자기 허트록커나 스파이게임 같은 영화들이 떠오른다. 2년여에 걸쳐 부지런히 심은 묘목들은 꽤 자라서 7월의 여름에 그럴싸한 그늘을 만들어 낸다. 구시가의 공원에 남아있던 친러 성향 작가의 동상은 결승선에 밀어넣는 스케이트 날처럼 가까스로 철거되었다. 빌니우스의 명물인 오래된 트롤리버스는 아무도 못보게 꽁꽁 숨겨서 회의 기간 찾아보기 힘들거란 소리도 나온다.
뜬금없이 국민학교때 장학사 오던 날이 생각난다. 페츄니아와 사루비아가 심어진 화단을 가꾸고 집에서 꿰매온 도톰한 걸레를 쥐고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 왁스로 마루바닥을 광내고 나서 삐걱거리는 걸상에 앉으면 열려진 뒷문으로 소리없이 들어와 수업을 참관하고 스르르 사라지곤했던 장학사. 장학사의 눈초리에도 초연하게 수업해야했던 선생님들처럼 빌니우스 공무원들도 잔뜩 긴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월요일부터 3일간 차량 진입이 불가능한 구시가에 가장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식당이나 카페들은 식자재 배달을 주말 전에 모두 완료해야 했다. 5일치 재료를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신선도 때문에라도 위험부담이 크다. 빌니우스는 자전거 배달이 월등히 많은데 자전거 운행도 킥보드도 금지되므로 구시가내에서는 배달도 직접 수령만 가능하다. 코로나 이후 이곳도 매출의 배달 비중이 월등히 높아졌으니 많은 식당이 아예 영업시간을 줄였다. 기업들도 다음 주 수요일까지는 재택근무를 권장한다.
리투아니아처럼 작은 나라에 나토 회의라니 빌니우스는 러시아 제국으로 부터의 독립 이후 105년이란 기간 동안 가장 크고 역사적인 행사를 앞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00년 전과는 사뭇 다른 내용의 나라가 되었지만 한편으론 리투아니아가 100년 전과 다름없이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위험하고 민감하고 연약한 위치에 놓여있는지도 여실히 보여준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에 완전히 결박당한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역외 영토인 칼리닌그라드와 국경의 절반을 맞대고 있다. 국방비는 늘어만 가고 누구든 주둔해 주십사 군사 기지나 주둔 병력을 위한 시설에 막대한 투자가 들어간다. 나토 회의 전에 독일군과 리투아니아 폴란드군이 참여하는 대규모 군사 훈련이 있었다. 30여 개국의 정상이 모이는 이틀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빌니우스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노골적으로 대만에 우호를 표시한 리투아니아는 잃을 것이 너무 많은 강대국들을 대신해 기꺼이 정치적 실험쥐가 되기도 한다. 세계대전 시기에 리투아니아를 놓고 독일과 폴란드 러시아가 힘겨루기를 했던 시기를 생각하면 지금은 마치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유로 유럽이 하나가 되어 러시아에 맞서는 정의롭고 꽤나 납득 가는 상황처럼 보이지만 나토는 왜 가입국이 늘면 늘수록 더 불안하고 초조한 집단처럼 보이는걸까. 미국 대통령의 빌니우스 대학 연설 일정도 잡혀있다는데 대학 정원 어딘가에 어떤 미국인이 왔었다는 현판이 걸릴거라는것 말고는 장담할 것은 딱히 없는 것 같다. 누가 와서 우리는 강하고 우리는 하나라며 물심양면 등을 토닥이며 도와주면 뭐 하랴. 결국 지구상 어디에도 그 땅 위에 뿌리내린 작은 사람들의 운명은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구원되지 않을 것이며 더 분명한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심지어 나토 회의며 차량 운행 금지 따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구시가를 향해 유유히 차를 몰거라는 것. 바다는 보다 잔잔해졌고 바닷물도 따뜻해졌고 결국은 그 무엇에도 아랑곳없이 여름은 언제나처럼 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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