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
원하는 영화를 그때그때 찾아서 볼 수 있는 요즘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것에 감사해야한다.
오래전에 다운받아놓은 영화도 시간과 용량에 구애받지 않고 오랫동안 남겨둘 수 있는 거대한 저장공간이 보장되어있고
정말 재밌게 봤는데 절대 기억안나는 영화도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찾아낼 수 있는 검색엔진과 imdb 같은 사이트들이 있으니
마음에 드는 단역들 이름을 알아내려고 흐릿하게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을 붙잡고 씨름하지 않아도 되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 고르는 재미는 만끽할 수 없지만 연체료 걱정에 황급히 신작 비디오를 돌려줘야 할 번거로움도 없고
월요일 아침에 비디오 반납함 앞에서서 꾸역꾸역 주말 동안 빌려 본 비디오 테잎을 집어넣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것이다.
방과 후 비디오 가게에 들려 고심고심해서 영화를 고르고 새벽에는 유니텔 영퀴방에 들어가 문제를 풀고
감독 이름에 배우이름까지 수첩에 꼬박꼬박 기록하던 학창시절의 습관과 일상들은 이제는 정말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그 시절에 본 영화들은 지금 새롭게 접하는 많은 영화들에서는 느낄래야 느낄 수 없는 특유의 정취같은것을 가지고 있다.
지난 주에 본 <카페 드 플로르> 같은 영화들은 십년, 이십년 후 내 기억속에 어떤 영화로 남을까.
지금 이 순간부터 나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기로 예약되어있는 숱한 영화들은
내 뇌세포 깊숙한곳에 촘촘히 박혀있는 '나의 옛 영화'들을 밀어내고 그들을 대체할 새로운 의미가 되어갈 수 있을까?
<트레인스포팅>,<천국보다 낯선>,<빅 레보우스키>,<와호장룡>,<칼리토>,<중경삼림>...
나의 십대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지금도 좀처럼 쉽게 잊을 수 없는 그런 영화들을 밀어내고 말이다.
십대때에 특정 감독이나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보고 작정하고 영화를 찾아보았다면
이십대에는 고집이 세져서 내가 마음에 들 만한 영화들만 외곬수처럼 찾아보았고
지금은 하나의 영화를 시작점으로해서 연상되는 영화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며 찾아보는 식이다.
<중경삼림>을 다시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건 결정적으로 지난 주에 본 <카페 드 플로르>때문이었는데
조금은 다른 접근 방식이긴 했지만 지극히 감각적인 발상의 이 두 영화 모두 사랑과 이별에 대해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관념의 기저를 흔든것은 분명해보인다.
특정 등장 인물과 함께 반복적으로 흐르는 음악들, 마치 차곡차곡 잘 정리된 누군가의 사진첩을 보는 기분.
누군가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음성 사서함에 메세지를 남기고 젖은 타월과 대화하며 자신을 위로하고
어떤이들은 이별을 받아들어야하는 현실과 옛 사랑에 대한 미련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
그리고 우리는 먼발치에 앉아서 기한이 만기된 사랑에 대해 그들이 쏟아내는 자조적인 독백을 듣는다.
여자친구 메이에게 실연당하고 4월 30일이 만기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는 금성무.
여자친구 이름은 메이인데 정작 5월이 되는 순간 여자친구를 잊어야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4월 30일이 되어도 여자친구에게 연락이 없으면 여자친구가 좋아하던 파인애플을 모두 먹어버리고 그녀를 잊기로 한다.
이성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문제들에 대처하는 지극히 감상적이고 미신과도 같은 그런 의식들이있다.
옛 사랑의 편지를 태워버린다거나 영화 <파니핑크>에서처럼 사진을 찢어넣은 스프를 먹는다거나
후추도 뿌리고 케찹도 섞어가며 사다놓은 통조림을 모두 비워버린다거나
바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여자와 사랑에 빠질거라고 스스로에게 체면을 거는 방법 같은것.
이별에 대처하는 수백만가지의 방법들.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별의 슬픔을 씻어내야하는 스스로에게 주는 면죄부같은것이 아닐까?
정말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때 '아 결국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려고 그때의 헤어짐이 필요했던걸까'
라고 편한대로 생각할 수 있을만큼 우리 모두는 영리한 존재이니깐.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이었으면 좋겠다'
학창시절에 이 영화를 보고 이 대목에서 한번이라도 멈칫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파인애플 통조림을 볼때마다 자동적으로 이 장면들을 떠올리게 된다.
'개는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하는데 왜 나는 너와 슬픔을 나눌 수 없지?'
우리가 직면한 슬픔의 본질은 사랑을 나눌 대상이 없어서일까 고독을 나눌 대상이 없어서일까.
슬픔도 기쁨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없을때 그것을 고독이라고 부르는데
인간이 가장 슬플때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고독을 함께 나눌 대상이 없을때일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혼자이고 고독한 존재라는 명제아래 서로 부대끼며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야하는게 우리의 숙명일지도.
그래서 어쩌면 사막에서의 이별은 도시속에서의 이별보다 오히려 훨씬 견뎌내기 쉬울지도 모른다.
나와 그사이의 거리가 백만광년쯤은 되어 보이는 사막에서 느끼는 상실감과
뒤돌아보면 어디에서라도 마주칠것만 좁은 도시속에서 옛 사랑을 그리워해야하는것중 어떤것이 더 잔인한걸까.
마치 그녀가 돌아온것같아 시장에서 밥을 먹다말고 한 걸음에 집까지 달려와 보지만
그를 기다리는것은 물로 흥건한 바닥위를 둥둥떠다니는 슬리퍼들뿐.
'집이 감정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울면 휴지만 있으면 되는데 방이 우니 일이 커진다'
이별을 방지하는 백신도 상실의 아픔을 잊게하는 마취제도 세상엔 없다.
유통기한 없는 사랑을 꿈꾸는것도 어쩌면 평생 감기에 걸리지 않을 예방접종을 꿈꾸는것처럼 실현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른다.
<카페 드 플로르>의 캐롤의 사랑이 그랬던것처럼.
그렇다고해서 적당히 사랑할 수도 없는 우리는 어쩌면 모두 바보이다.
영화를 처음 봤던 96년도를 생각하면 중경삼림은 정말 새로운 영화였던것 같다.
내가 60년대로 돌아가서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처음 봤었더라도 아마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운전을 하며 카메라를 향해 거리낌없이 대사를 내뱉는 영화속의 장 폴 벨몽도를 바라볼때의 느낌처럼
이렇게 벽과 벽사이 혹은 문틈사이로 멀찌감치 등장인물을 세워두고 그들의 고독을 극대화하는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기법은
왕가위 영화의 세련됨과 스타일리쉬함을 모든 이들의 일상에 적용하기엔 비현실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도 영화속의 그들도 너도 나도 모두 똑같이 고독하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있어서 독보적인것 같다.
임청하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이 후덥지근하고 찐득찐득해보이는 식당을 오고가며 실연의 아픔을 희석시킨다.
마치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운동장을 돌고 더이상 흘릴 눈물이 남아있지 않을즈음 돌아와 달아난 수분을 보충하듯.
함께 울어주거나 술을 마셔주지도 않고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터놓거나 신세한탄을 하지도 않지만
손님과 종업원으로 마주하는 그 좁은 공간사이에서 그들의 감정은 쉬지않고 순환한다.
파인애플을 먹는 주인을 바라보는 개처럼 커다란 호랑이 인형처럼
고독을 이기는데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그런것들도 모두 함께.
사전속에서 수십년동안 같은 의미로 존재해왔던 단어들도 변하는 시대에 따라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고 쓰여진다.
예전같았으면 중경삼림의 임청하나 영웅본색의 주윤발을 표현할때 냉정하고 고독한 킬러같은 설명이 따랐겠지만
이 영화를 다시보고나니 임청하는 요새 유행하는 말로 정말 이보다 더'시크'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캐릭터였다는걸 느낀다.
당시에 이미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이 무협영화계의 대모에게 한참 어린 젊은이들의 사랑얘기는 그냥 애들 불장난같고
짝사랑하는 남자 집에 몰래 들어가서 청소를 하고 옛 연인을 흔적을 지우는데 열중하는 왕정문에게
마치 '넌 뭐하니 도대체. 그런건 다 쓸데없는 짓이란다.'라고 말하는듯하다.
홍콩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두시간동안 머물었던 홍콩 첵랍콕 공항의 뜨거운 열기는 아직 기억속에 선명하다.
영화를 본지 20여년이 흘러가지만 지금 홍콩에 가도 왠지 왕가위 영화속의 홍콩의 모습은 찾아낼 수 있을것 같다.
양조위가 점심을 먹는 시장통,왕정문이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올라가며 몸을 숙여서 양조위의 집을 바라보는 장면.
<화양연화>의 주인공들이 우두커니 서있는 어두운 홍콩의 골목이나 모든 등장인물들이 스치고 엇갈리는 홍콩의 편의점.
더이상 어디로 숨을 곳도 없어보이는 비좁고 빽빽한 도시속을 질주하는 숨가쁜 이민자들의 움직임은
정지와 움직임을 반복하며 마치 사진을 이어 붙인듯 짧게 끊기는 독특한 영상속에서 교묘하게 속도를 잃는다.
동업자에게 배신당하고 사랑도 잃은 그들의 꿈과 절망은 좁은 도시속에서 그렇게 돌고돈다.
서로 모르는채 스쳐 지나가는 매순간순간 우리의 감정은 공기를 매개로 서로를 감염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 비가 올지 몰라서 트렌치코트를 입고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담배를 문채 좁고 어두운 중경맨션을 배회하는 그녀.
그녀를 통해 왕가위는 어쩌면 홍콩 느와르에 대한 향수를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를 좋아하게 되지 않을거야'
영화 <히트>에서 언제 떠나야할지 몰라서 가구를 사지 않는다는 로버트 드니로 만큼이나 시크하다.
그 어떤 강력한 바이러스에도 무너지지 않을 대단한 면역력의 소유자들처럼.
사실 원래 시나리오에서 임청하는 정상에 있을때 은퇴한 여배우이고
금성무는 어떤 사건 해결을 위해 임청하의 협조를 받으러 임청하를 지겹게 쫒아다니는 경찰역이었다는데
무슨 경로로 시나리오가 바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임청하의 부분이 워낙에 강렬해서인지 그나마 분량이 짧았기에 왕정문의 에피소드와 균형을 이룰 수 있었던것 같다.
양조위를 볼때마다 느끼는데 우리나라에는 전형적인 미남은 아니지만 이런 매력을 가진 남자배우가 딱히 없는것 같다.
<접속>이나 <텔미섬띵>에서 보여준 느낌으로라면 한석규가 그나마 근접한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신하균이나 박신양같은 배우들도 이병헌이나 장동건같은 배우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다른 종류의 매력을 가진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깐 브래드피트나 조니뎁은 가지지 못한 매력을 맷딜런이나 스티븐도프 같은 배우들이 가진것처럼.
마치 세상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듯한 눈빛.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곁을 그냥 묵묵히 지키지만 매달리지 않는 자세.
그 자신이 누구를 백퍼센트 소유하려는 생각도 없고 그 누구도 그를 완전히 소유하는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끼게 하는 눈빛.
왕가위가 그려내려는 고독의 정서를 가장 잘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양조위와 장국영이다.
특히 영화 <2046>에서 장쯔이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그가 내뿜는 허무함은 정점을 찌른다.
사실 난 장쯔이가 현대물에 잘 어울리지 않는것처럼 양조위가 출연하는 시대극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장이모처럼 <영웅>같은 영화를 찍어도 현대물에서 못지 않게 섬세한 감정을 잡아낼 줄 아는 감독이라면 모를까.
중경삼림에 등장하는 네명의 배우들은 재밌게도 또래의 나이가 아니다.
한 장소에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벌어지는 두개의 이야기가 서로 관련된듯 보일뿐 사실 이들은 얽히고 섥힌 관계도 아닌것.
임청하는 영화속에서 아이들 불장난을 관조하는 듯한 말투이고
실연당한 양조위를 짝사랑하는 왕정문은 양조위보다는 한참 어려보이고
저돌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양조위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계산적이지 않고 순수해보인다.
똑같은 직업에 똑같이 실연당한 양조위와 금성무가 이별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많이 다르다.
양조위는 항상 그렇듯 냉소적이고 우울해보이고 금성무는 장난스럽지만 나름 순정적이다.
사랑과 헤어짐에 임하는 우리들의 자세도 이들 네사람의 각기다른 눈빛과 독백처럼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해간다.
양조위와 왕정문이 정지된 앵글에서 서로 다른 곳을 물끄러미 응시할때 주변 배경속의 인물들은 빠른속도로 움직인다.
아무런 대화도 나누고 있지 않지만 그들이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순간.
마치 <아비정전>에서 장국영과 장만옥이 숨죽이고 흘려보내는 그 1분의 시간처럼.
'우리는 방금 막 1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어. 넌 이 1분의 시간을 넌 영원히 기억하게될거야'
왕정문이 이름을 왕페이로 개명한것은 정말 오래된일이지만 나는 그녀를 왕정문이란 이름으로 기억하는게 훨씬 좋다.
왕정문이 주구장창 큰소리로 틀어대던 마마스앤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
말소리가 들릴지 않을 정도로 볼륨을 높혀서 양손에 길다란 집게를 들고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던 장면과
그녀가 실수로 집에 놓고간 음반을 틀어주며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말하는 양조위를 뾰로통하게 바라보는 모습.
그래서 얼마전에 10cm의 노래를 듣다가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랑은 은하수 다방문 앞에서 만나 홍차와 냉커피를 마시며 매일 똑같은 노래를 듣다가 온다네'
'이 비행기표는 오늘 날짜인데 어디로 가서 타야할지 모르겠어'
'티켓은 다시 만들면 되지.어디로 가고 싶은데?'
'상관없어. 너가 가고 싶은데로'
왕가위의 영화가 내뿜는 그 특유의 음울함은 싱그럽고 청순한 왕정문을 만나서 역설적으로 더 강렬했던것 같다.
왕가위의 영화를 볼때마다 속는 기분이 든다. 아니면 속아주는 기분으로 그의 영화를 보는걸지도. 보고나면 항상 슬프다.
우리의 감정이 이곳저곳 낯선곳으로 이민을 다니는 느낌이랄까.
시간이 흘러서 제복을 벗은 양조위와 제복을 입은 왕정문이 다시 만났을때 우리가 느끼는 두근거림과 설레임은
왠지 <2046>에서의 왕페이가 흘리는 눈물이나 양조위의 자조적인 눈빛,
<화양연화>의 어두운 홍콩의 골목길에서 서로 어쩔줄몰라하며 서성거리는 연인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것 같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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