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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아이 엠 러브 I am love> Luca Guadagnino (2009)



<I am love>


제목을 보고 일부러 찾아 보았고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케빈에 대하여>를 찾아보게 되었다. 

격조있는 이탈리아 명문가의 분주한 저녁 만찬 준비로 영화는 시작되고 

만찬을 총 지휘하는 안주인, 이탈리아어를 하는 틸다 스윈튼의 모습은 다소 낯설었다.

몸에 딱 떨어지는 각 잡힌 바지 정장을 입고 절도있게 사람을 다루는 모습이었다면 

시중드는 사람 입장에선 옮기던 접시도 떨어뜨리게 하는 카리스마 였겠지만

 틸다 스윈튼은 자신이 지금까지 지어오던 모든 표정의 역사를 삭제한 듯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온전히 사랑하기는 힘든 색깔의 실들로 전혀 다른 감정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낯선 나라에서 자기만의 언어를 가진다는 것. 머릿속에 서로 다른 두개의 언어가 공존하는 것은 신기하고도 복잡한 감정이다.

가끔은 생각을 멈추고 내가 방금전에 어떤 언어로 생각을 했는지 되새김질 할 때가 있다.

내가 방금 전 맛있다고 느꼈다면 그 찰나의 순간 내가 머릿속에서 어떤 언어의 '맛있다'를 내뱉었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미묘한 순간들이 가끔 있다.

머릿속에는 각기 다른 언어의 방이 있고 시시각각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지만 아직 적합한 단어를 습득하지 못했다면

어떤 미묘하고 구체적인 감정들은 미처 방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갇히고 만다. 

그럴때면 내 감정은 가장 간략하고 가장 포괄적이고도 원시적인 형태로 남는다. 

실제 영국인인 틸다 스윈튼은 영화 속에서 이탈리아 인과 결혼한 '영어를 잘 못하는' 러시아 여인을 연기했다. 

만찬장에서 인도계 미국인과 영어를 해야 할 상황에서 그녀가 '언어의 섬'에 고립되는 장면이 있다. 

물론 그 고립은 가끔 유용하다. 사람들이 무언가에 흥분하고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할 때 한없이 관조적이 될 수 있다.

엠마가 그 고립을 어떤식으로 받아 들였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것은 이 영화에서 엠마는 혼자일때 오히려 가장 덜 고독해 보인다는 것.

러시아를 떠나온지 이미 30여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는 이미 많은 감정을 잊었고 그것에 익숙해진 상태이다.

그리고 잊혀진 감정으로 꼭꼭 채워 진 그 방 문이 열렸을때 그녀는 더 이상 이성적이기를 포기한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보고 난 후로 밀라노의 두오모는 나에게 이성과 합리의 상징이 되었지만 

밀라노 두오모를 처음 봤을때의 실제 인상은 이 성당이 무척이나 초조해 보였다는 것.

여름의 밀라노의 온도가 38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모두가 휴가를 떠난 밀라노는 텅빈 유령 도시가 된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수세기에 걸쳐 서서히 녹아 내린 촛농이 굳어 버린듯한 모양의 

이 성당은 섬세하다 못해 그로테스크하고 심지어 자극적 이기까지 했다.



너무나 많은것을 보여 주려다 결국 아무것도 보여 주지 못한 그런 중구난방격의 건축물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 만큼 많은이들의 생각과 꿈이 집약된 이 성당이 그나마 밀라노라는 차갑고 냉정한 도시를 호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나 성당이 등장하는 몇몇 장면에서 멀리 고독하게 걸어가는 엠마의 모습을 비출때

성당은 그녀가 마음껏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마음속의 기둥처럼 보였다.



엠마는 얘기를 나눌 친구가 없었던게 아니라 친구를 찾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를 싹둑 자른 딸 엘리자베타의 새로운 사랑은 엠마 자신에게 사랑에 대한 의미를 묻는 계기가 된다.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수십년을 살아 온 엠마가 모든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었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녀는 모든것을 가져 봤기 때문에 그 본질과 의미를 알고 그것을 두려움 없이 포기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고 우리를 구속하는것들은 우리가 한번도 가져본 적 없기때문에 항상 열망하는것들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풍경과 마주치며 서서히 굳어가던 감정의 근육은 조금씩 유연해진다.

산 레모를 방문한 엠마가 멀리서 마주치는 러시아 정교회. 

마치 밀라노 두오모와 대치를 이루던 <냉정과 열정사이> 속의 피렌체 두오모의 솔직함처럼

그리고 그 교회 앞으로 지나가는 안토니오의 모습을 보고 엠마의 감정은 급격히 동요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도 역시 멀리서 교회 가까이로 다가오는 엠마의 모습이 보인다.



이탈리아의 휴양 도시에 러시아 정교회라니 좀 생뚱맞다. 

어떤 경로로 러시아 교회가 세워지게 됐을까.

혹시 엠마가 그 사실을 몰랐던거라면 그녀는 이 장면에서 부터 이 모든 우연을 운명과 동일시하기 시작했을거다.

  


절친한 친구인 요리사 안토니오와 산 레모에서 레스토랑을 차릴 꿈에 부풀어 있는 큰 아들 에두아르도.

결혼을 앞뒀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않고 아버지는 그가 정말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것처럼 보이냐며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진다.

여행에서 돌아 온 엠마가 보는 티비 속에 톰 행크스가 동성연애자를 연기했던 <필라델피아>가 방영된다.

에바와 결혼을 앞둔 아들 에두아르도와 안토니오 역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을까.

쉽게 인정되지 않는 사랑들.

엘리자베타의 말처럼 '이해할 수 없는'이 아닌 '이해하려 들지 않으려 하는' 사랑

엠마와 가장 가깝게 교감하던 아들 에두아르도.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엄마.

모든 이들의 사랑이 조금씩 엇갈린다.

그 사랑을 지키려는 사람과 그냥 묵인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뒤엉키고 만다.



영화 속의 음식들은 엠마와 에두아르도의 언어이자 엠마와 안토니오 그리고 안토니오와 에두아르도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들은 마치 잃었던 미각을 되찾듯이 감정에 정직하게 반응한다.

안토니오는 언젠가 에두아르도가 자신에게 얘기한 러시아 스프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안토니오에게 그 러시아 스프를 끓여주는 엠마.



엠마가 에두아르도에게 가끔 끓여줬다는 러시아 수프 보르쉬치는 내가 아는 보르쉬치와는 정말 다르다.

아니면 리투아니아 자막이 잘못된것일수도 있다.

보르쉬치는 절인 비트무와 고기를 넣고 끓인 붉은 빛이 나는 슾인데 국물 자체가 저렇게 맑은 보르쉬치는 본적이 없다.

각종 생선을 넣고 맑은 국물이 우러나올 때까지 잘 끓여야 한다는 엠마의 그 스프가 

보르쉬치 보다는 우하라는 맑은 수프에 가까워보인다.

산 레모에서 엠마가 끓여준 스프를 안토니오는 밀라노의 만찬에서 끓인다.

그것이 엠마를 위한 요리였는지 엄마와의 추억을 회상하던 친구 에두아르도를 위한것인지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었는지 에두아르도에 대한 원망의 표현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쩌면 모든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인지도.



<케빈에 대하여>를 촬영하던 틸다 스윈튼은 이 장면을 떠올리고 데자뷰 따위를 경험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허탈하게 앉아 있는 엠마.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눈 내리던 밀라노. 햇볓이 쨍쨍 내리 쬐던 산 레모. 그리고 에두아르도의 장례식이 있던 날에는 비가 내린다.



마치 지금까지의 모습은 다 거짓이었다는 표정으로 빗속에 서있는 엠마. 

<투스카니의 태양>에서 브레마솔레를 사려고 온 다이앤 레인에게 비둘기가 똥을 싸고 날아가자 

집주인은 비둘기가 날아들다니 이것은 길조라며 다이앤 레인에게 망설임없이 집을 판다.

이 비둘기도 그 비둘기와 같은 맥락일까. 장례식을 치룬 후 마주친 비둘기라니. 

엠마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장례식을 끝난 후 엠마는 남편에게 안토니오를 사랑한다고 말해버리고  

맨발의 운동복 차림으로 도망치듯 떠나는 엠마가 엘리자베타와 마주 친 짧은 순간.

'사랑'이라는 단어는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드는 단어라고 했던 엘리자베타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랑을 갈구하는 댓가로 우리가 얻는것이 매순간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가장 나 다워 지기 위해서는 혼자가 되어 버리는 편이 낫지만 그 사실을 모른척 배반하고 우리가 선택한 사랑이라는것. 

엠마와 엘리자베타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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