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토요일이면 처음으로 아기와 함께 부활절을 보내러 시어머니댁에 내려간다. 리투아니아에서 부활절을 보내는것도 벌써 9번째. 여행 당시 처음으로 시어머니와 만났던 때가 부활절이었던것까지 계산하면 10번째 부활절이다. 부활절 달걀은 벌써 8번을 삶았다. '올해에는 염색하지 말까? 그냥 삶기만 하면 편하긴 할텐데. 에이 그래도 색칠해야지 부활절인데. 염색약 어디갔지? 분명히 작년에 염색하고 이 서랍속에 넣어 놨었는데? ' 신기하게도 거의 매년 반복되는 대화들이다. 매년 김장철이 되어 욕실 가득 크고 작은 대야를 늘어 놓으시고 배추를 절이시는 엄마를 보며 했던 생각은 정말 자주 돌아오는 김장철 같은데 따지고보면 살아있는 동안 최대치로 계산해봐도 서른즈음 부터 일흔즈음까지 고작 40번정도라는것. 물론 김장의 규모와 의미를 놓고 생각해보면 끓는 물 부어서 마시기만 하면 되는 40잔의 커피와 비교 할 수 있겠냐마는 40이라는 숫자의 절대적인 크기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끌고 밀며 마치 영원할 듯 여기고 살아가는 그 시간이 우리 생각만큼 길지도 아득하지도 않게 느껴진다.
부활절 달걀 삶기도 나에게는 같은 맥락으로 다가왔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나면 습관적으로 새 달력을 넘겨 확인해보는 부활절 연휴. 부활절이 지나 따뜻한 봄이 되고 싱그러운 여름이 지나 다시금 매몰차게 시작되는 리투아니아의 긴 겨울의 초입에 또 다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연휴 그리고 또 부활절. 마치 계속 끌어 당기다보면 언젠가 끝을 보이는 실 덩어리처럼 닳아서 없어질때까지 우리가 굴리고 또 굴리는 인생의 바퀴. 내게는 몇번의 달걀 삶기가 남아 있을까. 혹시 달걀을 삶지 않는 다면 그 해는 내 인생에서 달걀을 삶지 않은 어느 해로 기억 될 수 있을까. 가까운 미래에 내 아이와 함께 삶게 될지도 모를 달걀. 혹은 언젠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그 아이의 아이들과도 삶게 될지 모를 달걀. 모든 반복되는 행위들은 흘러가는 시간에 맞춰 조금씩 다른 빛깔의 의미를 지닌다. 새해를 훌쩍 넘긴 지금이지만 부활한 예수처럼 마치 다시 새해를 맞이하는 기분이 든다. 그것이 아마 매년 어떤 달걀이 탄생할까 기대하며 못이기는척 또 염색을 시작하게 되는 이유일것이다.
리투아니아 생활을 적어내려가지만 내가 경험하는 전통과 일상들을 결코 모든 리투아니아인들의 그것으로 일반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달걀을 염색하지 않는 가정도 많으며 부활절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도 음식을 먹는 방법도 각양각색일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후식으로 먹을 젤리도 올려놓고 버터나 식초에 절인 토마토, 샐러드 같은 간단한 것들을 부활절 아침 식탁에 올린다.
여러해가 지나면서 명절 식탁은 간소해지고 또 간소해졌다. 빌니우스에서 올라오는 우리를 생각해서 이런 저런 음식을 많이 준비하셨던 시어머니셨지만 남기는 음식도 많아지고 상할것을 염려해서 먹어야 하는 음식은 맛이 없게 마련이니 이제는 그때 그때 무엇을 먹을지를 상의해서 조금씩만 준비하게 된다.
부활절 달걀은 텅 빈 무덤, 예수의 부활을 의미한다. 일부 지역에서 달걀을 붉은색으로 염색하는것은 예수가 흘린 피를 상징하는것이라고 한다. 사실 정말 키치스럽기 그지 없는것들이지만 부활절 즈음의 이런 마트 풍경 역시도 부활절의 일부이다. 달걀을 염색하거나 삶는 풍습 대신에 플라스틱 달걀이나 달걀 모양의 초콜릿으로 편리하게 장식을 하기도 하는데 초콜릿 달걀 곁에 항상 붙어 다니는것이 부활절 토끼이다. 부활절 토끼도 역시 초콜릿이지만 사실 초콜릿을 가장한 초콜릿맛 밀가루 같은 느낌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선물로 받으면 은근히 기분이 좋다. -.-
부활절 아침에 저 부활절 토끼가 남겨 놓고 간 부활절 달걀을 찾는 놀이도 할 수 있다. 지푸라기가 깔린 바구니에 달걀을 넣어서 집안 어딘가에 숨겨 놓으면 찾는 놀이. 그리고 달걀 깨트리기 놀이도 하는데 한 사람이 달걀의 뾰족한 부분으로 다른 사람의 뭉툭한 부분을 쳐서 깨지지 않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이다.
뭔가 조금 무시무시하지만 언젠가 내 아이도 사달라고 조를 수 있는 물건들. 킨더 초콜릿이면 꽤 맛있을것 같기도 한데 하나에 3유로가 넘는다니 부활절 바가지가 아닐 수 없다.
부활절 기간에 지인을 방문하는데 삶은 달걀이 없다면 이런 초콜릿 상자를 가져가도 상관없다. 보고만 있어도 입에서 녹을것 같은 페레로 로쉐이다.
리투아니아에서 맞는 열번째 부활절을 기념해서 지금까지 달걀을 삶으며 찍어둔 사진을 다시 한번 정리 해보았다. 리투아니아에서 부활절만 되면 어김없이 받는 질문중의 하나가 한국에서 부활절에 달걀을 색칠하냐는 것이다. 어릴적에 교회에 다닌 나는 셀로판 종이로 포장된 달걀을 선물로 받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보통은 삶은 달걀에 싸인펜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셀로판 종이로 포장을 한다고 대답하지만 요즘의 교회 풍경은 어떤지 모르겠다. 부활절을 보내는 크리스쳔이라면 한번쯤 해 볼만한 달걀 염색이 아닌가 싶다.
달걀 염색을 하는데에 필요한 재료들이다. 언젠가 감자도 삶고 스파게티면도 삶으며 헌신했겠지만 이제는 오직 달걀 염색에만 사용되는, 일년에 한번만 부엌에 빼꼼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귀중한 냄비이다
염료로 망가질 걱정 하지 않아도 되는 막쓰는 냄비를 준비한다. 그리고 실. 신지 않는 스타킹. 양파 껍질. 가위 그리고 달걀.
어느해에는 검정 스타킹 대신 분홍색 줄무늬 스타킹을 어디서 구해 놓으신 시어머니.
아주 선명하게는 아니지만 실제 달걀 표면에 줄무늬가 흐릿하게 염색이 되어 나왔었다.
우리는 매년 대략 20개의 달걀을 삶고 연휴가 끝나면 직장으로 가져가서 염색한 달걀을 교환하기도 한다. 달걀 염색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지만 양파 껍질을 넣고 삶아내는것이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인듯 하다.
촛농을 이용하여 삶은 달걀에 무늬를 넣는 방법도 있고, 스프용 작은 파스타들이나 나뭇잎들을 스타킹 속에 넣어서 삶기도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넣지 않거나 양파 껍질만 넣어서 염색한다.
염색 효과를 최대화하려면 하얀 달걀이 더 좋다고 한다. 그래서 부활절이 다가올때쯤 마트 한가운데 흰 달걀이 가득한 유로 팔렛이 놓여지곤 한다. 달걀 10알이 한국에서는 얼마일까. 리투아니아에서는 1.5유로 정도이다. 참고로 리투아니아에서 달걀을 살때에는 S/M/L 으로 크기가 표시되니 눈여겨 봐야한다.
우선 짤막하게 자른 스타킹에 달걀을 깨지지 않게 잘 넣는다. 스타킹은 아무리 버리는 스타킹이라도 깨끗하게 세탁하는게 좋다. 발냄새 나는 스타킹에 달걀을 넣을 순 없으니깐. 스타킹이 너무 길면 달걀을 넣었을때 아래로 푹 떨어져서 삶기도 전에 깨질 위험이 있다. 신축성이 있기때문에 달걀을 넣어서 최대한 잡아 당겨 실을 묶을 여유가 있을 정도의 크기로 잘라준다.
달걀과 함께 적당한 양의 양파 껍질을 넣는다. 양파 껍질을 원하는 모양대로 잘라서 조심스럽게 달걀 표면을 감싸도록 넣는다면 원하는 무늬를 얻을 수도 있다. 꼭 스타킹안에 달걀을 전부 넣을 필요는 없다. 여기서부터는 각자의 상상력에 달려있다. 꼭 크리스챤이 아니어도 아이들과 같이 하면 참 좋을 놀이이다.
양파 껍질을 넣었다면 최대한 스타킹을 당겨서 실로 묶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파 껍질이 움직일테고 염색 효과도 제대로 볼 수 없을테니깐.
실로 묶는 과정이 제일 번거로운데 그래서 아예 묶을 실을 왕창 잘라 놓는것이 편하다.
자르고 묶고 자르고 묶고
자 이제 삶기만 하면 된다. 염색용 냄비와 염료 준비.
가끔 달걀 상자에 야속하게 붙어 있는 달걀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부활하기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다음 부활절을 기약.
시할머니가 살아 계실때 사용하던 염색약이 들어있는 상자란다. 상자에 적혀있는것은 리투아니아어는 아니고 러시아어다. 손에 닿기만해도 뭔가 손이 부식될것 같은 염료들인데 먹는 달걀을 삶는데 써도 될까싶지만 달걀 염색용으로 나오는 염료들로 안전하다.
많이 넣을 필요는 없고 원한다면 여러개를 섞어도 된다. 그냥 염색 가루만 봤을때는 전부 검은색으로 염색될것 같은 느낌이다. 간혹 달걀 껍질을 벗겨보면 염색약이 흘러 들어가서 색이 변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먹어도 상관없다. 아까운 달걀 버리지 마시길.
염색약이 손에 묻으면 잘 지워지지 않으니 장갑을 꼭 낀다.
주변에 변색될 위험이 있는 물건은 그래서 미리미리 치우는것이 좋다.
염색약을 투척하자마자 시큼한 냄새가 난다.
색깔만 봐서는 붉은 색인데 과연 어떤 색으로 염색될까. 양파스프 끓이는 비주얼이지만 절대 먹으면 안된다.
그리고 차곡차곡 달걀을 넣는다. 다양한 색을 기대한다면 절반의 달걀만 넣고 다른 염색약을 풀어서 또 끓이면 된다.
되도록이면 완숙으로 삶아서 조심스럽게 건져낸다.
달걀을 건져내고 다른 염색약을 넣어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전부 건져낸 달걀.
이제부터 제일 보람있는 작업이다. 우선 달걀이 깨지지 않게 냄비 바닥에 대고 스타킹을 잘라낸다.
달걀 껍질이 잘 벗겨지도록 찬물에 헹궈준다.
붙어있던 양파 껍질도 스타킹들도 전부 걷어낸다.
어두운 염색약을 사용해서 껍질이 붙은 부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검정색으로 염색이 되었다. 양파 껍질이 만들어낸 모양들이 제법 신기하다.
붓으로 그리려고 하면 참 그리기 쉽지 않은 그림이 아닐까. 우연의 결과물이 신기해서 보고 또 보지만 결국은 깨져서 입 속으로 들어가고 말 달걀들. 달걀이 썩지만 않는다면 매년 가장 예쁜 달걀을 골라서 선반위에 진열해 놓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근데 오래된 삶은 달걀이 깨지면 그 냄새가 정말 지독하다고 한다. 교회 다니시는 한국의 엄마에게 색칠한 달걀을 보내고 싶다 멋모르고 말했던적이 있는데 남편이 극구 말렸던것이 기억난다.ㅋㅋ
무늬가 거의 비슷비슷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차이점도 보이고 각자 좋아하는 구석을 발견할 수 있다. 지구과학책에 등장할것 같은 행성의 모습이다.
그 해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달걀은 클림트의 키스 그림과 사뭇 비슷했던 달걀이었다. 홍차를 담는 작은 차 통인데. 어쩌면 클림트의 그림이 그려진 차 상자가 있었기에 연결지을 수 있었던것일지도 모르겠다.
2006년 처음으로 리투아니아에 왔을때의 부활절. 그때는 초대 받은 손님이었기에 이미 다 차려진 부활절 식탁에 앉았었다. 옛 사진을 찾아서보니 곱게 색칠된 달걀이 담긴 큰 접시는 내가 지금 화분 받침대로 쓰고 있네. 저 날 먹은 음식들은 삶은 달걀을 제외하고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다. 한꺼번에 이 음식 저 음식을 다 같이 맛보는 나를 보고 시어머니께서 참 신기해하셨다고 훗날 말씀하셨다. 단색으로 색칠된 달걀은 그냥 염색약만 넣고 바로 삶았음이 보인다. 남편은 빌니우스에서 공부중이었으니 아마 부활절 전날 달걀 염색하라고 시킬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프훗.
그 날 점심을 먹고 공터에 나가서 했던 게임. 나무 판대기에 색칠한 달걀을 굴려서 이미 굴러간 달걀을 맞혀서 움직이는 게임이다. 10년전 사진속의 조카는 거의 190 센티에 육박하게 자라서 올해 성년이 된다.
몇번째 부활절 즈음 내 아이와도 달걀 굴리기 놀이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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