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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만추> 김태용 (2010)

 

 

휴일. 오후 12시까지 늘어지게 자도 자도 뭔가 모자른 것 같은 잠이다.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는데 사실 리투아니아에는 많은이들로 하여금 동시에 두통을 느끼게 하는 그런 날씨가 있다.

몹시 흐려서 하늘이 8층 건물 바로 코 앞까지 내려 와있는 듯한 그런 날씨.

구름이 모든이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나무들은 일제히 차라리 비를 내려줘 라고 말하고 있는것 같은 그런 날씨이다.

<만추>는 지난달 쯤에 본것 같은데 영화 파일들이 자리는 차지하는데 그렇다고 지우기에는 아쉬운 그런 영화 중 하나였다.

내가 배우라면 이런 영화에 출연할 수 있어서 행복했을것 같다.

오로지 그 배역과 그 배역을 선택한 그 배우를 위한 영화.

관객은 영화를 비평하고 비판할 선택권도 없이 옅지만 진득하게 채색된 누군가의 이야기를 눈으로 듣기만 하면 되는것이다.

한번 보고 그냥 잊어버리기에는 애써 자기 이야기를 풀어낸 주인공에게 미안해진다고 해야할까?

예를들어서 <영원한 휴가> 혹은 <파니핑크>같은 영화도 그렇고,

심지어 <히트>의 알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 역시 잊기 힘든 배우 그리고 등장인물들 중 하나이다.

그러니깐 계속해서 자꾸자꾸 반복해서 보게 된다.

혹시라도 내가 놓친 그들의 또 다른 표정이 있지 않을까 해서. 

원작인 이만희의 <만추>는 보지 못했지만 김혜자와 정동환의 <만추>는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혹시 마더에서 김혜자가 들판에서 혼자 춤추는 장면을 보고 오그라들었던 사람들에게 <만추>속의 그녀를 만나 보기를 권한다.

굳이 오그라 들 필요가 없었다는것을 깨닫게 될것이다.

드라마가 아닌 영화속의 김혜자는 항상 그런 원시적인 모습이었던것 같다.

혹시 그녀는 드라마와 다시다 광고에서 형성된 어머니의 모습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제목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즈 야스지로의 계절 시리즈도 계속 머리에 맴돈다.

그 절제와 여백의 미 같은것은 닮은 구석이 있는것 같다.

다시 한번 찾아서 봐야겠다.

 

 

나는 탕웨이가 좋더라.

영화 줄거리 상 탕웨이 역은 중국어와 영어를 하는 탕웨이가 했어야 했겠지만 습관처럼 다른 배우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저런 느낌을 주는 바바리코트를 찾다 찾다 못찾아서 직접 제작했다는 기사를 읽은적이 있는데

저 바바리코트가 저만큼 어울리는 배우를 한국에서 찾는다면 누가 있을까.

자기에게 맞는 배역을 못찾아 아직 크게 뜨지 못한것 같은 도가니의 정유미?

추상미는 요새 뭐하지?  장진영이 살아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등등등

아니 어쩌면 우리가 탕웨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것이 적어서 감정이입이 더 잘된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탕웨이의 감정이입을 도운것은 시애틀의 날씨와 저 바바리코트가 아니었을까.

버스로 변하는 시애틀의 유람선도

뜬금없이 찾아들어가는 그리스 레스토랑도

관광코스로 변하는 상가도

남은 인생에서 확실한 것이라곤 이틀 후에 돌아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다는것뿐인 여자와

낯선 여자에게 시계를 채워주고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기약하는 남자에게는

그저 낯선 풍경일 뿐 추억이 되지는 못한다.

모든 배경과 대사와 등장인물들이 공통분모를 찾지 못하고 겉도는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과거사를 무덤덤하게 풀어내는 탕웨이를 앞에두고 장난인지 진심일지 모를 말투와 표정으로 

부정과 긍정의 중국어로 응수하는 현빈.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현실을 직시하고싶은 탕웨이의 절박함이 느껴졌다.

 

 

현빈의 영어에 대해서 뭐라고 말들을 많이 했을것 같다.

하지만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극중 현빈은 영어를 굳이 잘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나름의 자기 영어로 투박하게 한 연기는 너무 좋았던것 같다.

한국내에서 워낙에 자연스럽게 영어를 들을 기회가 없는 한국인에게

미국인처럼 영어를 하지 않는 사람은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되는 현실은 사실 좀 불행하다.

사실 얼마나 많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국어의 억양을 바닥에 깔고 자신있게 자기 영어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삼순이도 시크린 가든도 제대로 보지 않아서 아직까지는 만추 한편이 현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란 드라마도 한번 보고 싶다.

배우들은 자기들이 가진 이전의 이미지를 어떤식으로든 깨어버리고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길 원하지만

관객은 오히려 배우의 이전 캐릭터의 도움으로 그 배우가 연기하고자 하는 새로운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것 같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우리는 그 배우가 연기한 배역만을 보고 살아왔으니깐.

 

 

마치 저녁식사를 주관하고 있기라도 한듯 식탁 정중앙에 떡하고 버티고 앉아있는 현빈이다.

모두가 평소에 입지 않는 옷을 차려입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엄숙해져야만하는 장례식 저녁식사.

애나와 왕징사이의 보이지 않는 긴장감과

임신한 아내와 옛사랑 애나를 동일한 시야에 둬야하는 왕징.

발꿈치에 굳은살도 없을것 같은 캐릭터. <에이 아이>의 쥬드 로가 떠올랐다.

누구보다 본능에 충실한 현빈에게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이다. 

 모두 자기자리에 앉아서 아슬아슬하게나마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황인데

남자 둘 만 남게되자 마치 시소가 가라앉듯 균형이 깨진다.

 

 

네가 그리고 내가 괜히 남의 포크를 써서 (내 인생만 결국 이렇게 된것 아니야)

라고 말하고 있는것 같다.

그렇게 나마 애나는 왕징을 원망할 수 있었다.

미안하다는 대답을 얻어내고자 함은 아니었을것이다.

어쩌면 이미 아주 오래전 남편에게서도 왕징에게서도 자신의 과거에서 떠나버린 애나이다.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회상은 더이상 살아 갈 삶이 남아있지 않을 경우에만 의미있는것 같다.

남은 인생을 의미있게 살아가려면

돌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야하고

떠나가는것을 붙잡지 말아야하나보다.

익숙하지 않은 귀걸이에 귓볼이 가려우면 그냥 귀걸이를 빼버려야 하는것처럼.

 

 

계절은 우리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변한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같은 길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남은 계절의 햇수를 바보처럼 헤아려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자리에서 기다려도 만날 수 없는 그런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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