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의 첫 카페. 도착 다음날 아침, 친구가 예매해둔 콘서트 표를 찾기위해 Kreuzberg 의 Kottbusser Tor 역으로 갔다. 표를 찾고 나와서 길을 걷는데 눈에 띄는 거울 재질의 입간판이 건물 안뜰을 가리키고 있었다. 베를린에 건물 중정을 널찍하게 사용하는 괜찮은 카페가 많이 숨어있다는 이야길 듣긴 했지만 첫날부터 우연히 발견하게 되서 느낌이 좋았다. 이 카페는 Voo 라는 편집샵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침이어서였는지 비교적 한가했다. 쓰레기 컨테이너와 자전거들이 일상적으로 어우러진 모습은 전형적인 베를린 주택의 뒷마당 풍경이었다. 야외에 테이블이나 의자가 신경써서 가득 준비되어 있지 않은것이 오히려 소탈하게 다가왔다. 편집샵의 옷이나 소품들의 가격이 상당했는데 구석 카페의 캐주얼함이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는 분위기를 중화시키는 느낌이 들었다. 직원 한명이 혼자 일하고 있어서 주문한 커피가 나오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옷이며 물건이며 책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물론 이런 상점들의 시크하기 그지없는 고가의 옷들은 보세옷가게나 벼룩시장에서 헐값에 구할 수 있을거라는 근거없는 기대와 함께 외면하곤 한다.
들어서서 가장 먼저 눈에 띈것은 카페와 편집샵의 미묘한 경계라고 할 수 있는 계단 근처 벽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던 잡지들이었다. 벽속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같은 시기에 잡지 표지 모델이 된 우연일뿐이겠지만 틸다 스윈튼이나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소피아 코폴라 같은 개성있는 인물들이 전부 왠지 베를린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뉴욕 출신의 소닉유스가 뭔가 베를린스럽다는 느낌에 자꾸 생각이 났던 터라 작년에 빌니우스에서 갔던 카페에서 읽은 Reader 속 킴 고든의 인터뷰가 떠오르기도 했다. (http://ashland.tistory.com/447) 베를린의 첫 커피를 마신 이 날 그 잡지속에는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가 모나리자처럼 이 방향에서도 저 방향에서도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이곳에 혼자 오게 된다면 먼저 옷들을 둘러보고 커피를 주문하고 이 잡지들중 한권을 골라 의자에 앉게 될것 같다. 우리는 커피를 주문하고 그다지 편해보이지 않는 스툴 몇개가 놓여있는 바깥으로 나갔다.
저렇게 칠이 다 벗겨진 공간이어도 좋으니(아니면 굳이 칠이 벗겨져 있기때문에) 딱 저 정도 크기의 내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 떼굴떼굴 굴러다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오만과 방종의 온상. 빛은 저 창문의 반 정도만 가로로 길게 들어오면 될것 같고 커피 머신은 2인용이면 될것 같고 책상도 필요없이 미니 싱크대가 놓인 아일랜드 하부장을 제거해서 편안한 의자 두개를 넣고 내가 가진 물건들을 다 놓으려면 직원 뒤로 보이는 저런 가구 하나면 될것 같고. 신발은 바닥에 늘어놓으면 되고 옷은 별로 있지도 않으니깐 상자 두세개에 구겨넣고 하면 벽에 거울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넓어보이는 이 공간의 반정도 되는 공간도 충분할것 같다. 어떤 도시가 좋아지면 그곳에 한번 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것처럼 마음에 드는 공간들은 그 공간이 품을법한 나의 단순한 일상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빛이 아낌없이 들어오던 그러나 그 빛을 과감히 사양하고 밖으로 나갔어도 한가득 고인 직사광선속에서 뜨겁고 차가운 커피를 마실 수 있었던 이 카페의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편집샵에서 카페로 연결되는 저 계단이 결정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베를린의 여러 카페들중에서 이만한 공간을 확보했던 카페들은 빛의 기근에 시달리던가 빛으로 충만했던 카페들은 오히려 가파른 다락방같은 광활한 2층을 가졌음에도 짓눌린듯한 느낌을 주던가 커피가 가장 싸고 맛있었던곳은 앉을 의자는 물론 걸터앉을 땅바닥도 모자라 선채로 커피를 마셔야했다. 다 가질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커피들이 약간의 결핍을 지니듯 모든 카페들이 저마다의 특성과 모자란 구석으로 꽉 채워져 있다.
친구는 아메리카노를 나는 얼음이 채워진 토닉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이 카페의 아메리카노는 내가 빌니우스에서 간혹 먹는 그 블랙커피와 거의 동일한 커피였다. 그 후 다른 카페에서 친구가 아메리카노를 몇번 마셨지만 더 이상 이런 아메리카노는 구경할 수 없었다. 물을 많이 부어 싱거울대로 싱거워진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에스프레소 두잔 보다는 좀 더 묽지만 여전히 크레마가 감도는 이 커피를 친구도 마음에 들어했다. 친구가 며칠후 다른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처음 시도하게 된 계기는 아마도 이 날 조금은 쓰고 진했던 이 아메리카노를 맛있게 마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작 토닉 에스프레소의 맛은 기억이 안난다. 그냥 차가워서 너무 좋았다는것. 좀 달게 마시고 싶어서 설탕을 섞으러 들어갈까 하다가 너무 귀찮아서 그냥 마셨다는것만 기억이 난다. 베를린의 카페들은 직원이 충분치 앉아 보이는 상황에서도 카페에서 마실 거면 주문을 받으러 갈테니 앉아서 기다리라고 하던가 카운터에서 직접 주문을 해도 친절하게 커피를 가져다 준다. 그것은 참 의외였다. 과도한 친절을 베풀지 않으면서 힘이 쫙 빠진 세련된 서비스가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에 허겁지겁 냉장고문을 열어 뭘 대접할지 발을 동동 구르는 대신 하고 있던 일을 서서히 마무리 지으며 와인병을 들고 다니며 우아하게 와인을 따라주는 여인의 여유가 느껴졌다고 할까. 사실 베를린에 있는 동안 전반적으로 마음이 편하고 여유로웠기에 설사 어떤 불친절한 서비스를 경험했더라도 나름의 개성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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