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도 많은데 <시>라는 제목을 턱하니 써놓고 눈을 감고 추억에 잠겨본다.
마지막 연합고사를 본 세대로써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입학은 대학 입학만큼이나 중요했던 이벤트였나보다.
'38년간'이라는 별로 유용해 보이지 않는 수험서를 남들 다 사니깐 나도 샀고
그래도 남들 다가는 고등학교인데 나도 별 문제없이 가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마음놓고 아무것도 안할만큼 최상위 성적도 아니었으니깐 어느정도의 긴장도 필요했다.
그 당시 명색이 수험생이었던 우리를 흥분시키고 만족시켰던것이라면
비디오 골라보기,피씨통신에서 영화퀴즈풀기따위였던것 같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아무리 회상해보아도 피씨통신 대화방만큼의 기술적인 혁신과 신선함은 경험해보지 못한것 같다.
그렇게 밤새도록 영화퀴즈방에서 영화퀴즈를 내고 풀고
마음에 맞는 사람 몇몇이서 새벽에 수다떨다 다음날에 만나 영화를 보러갔던 영화번개.
그렇게 비가 추적추적오던 어느 겨울 서울극장에서
내가 첫 영화번개를 쳐서 본 영화, 나를 극장에서 처음 울게한 영화가 바로 <초록 물고기>였다.
기나긴 서론은 단지 이 얘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이창동의 첫 영화가 다름아닌 <초록 물고기>이니깐.
<박하사탕>과 <오아시스>는 보지 못했다. 작년에<밀양>을 보았고 오늘 <시>를 보았다.
예전에 어느 외국인이 나보고 <시크릿선샤인>을 봤니? 정말 너무 힘든 영화였어 라고 물어봐서
도대체 무슨 영화를 본거야 라고 되물었던 적이있는데.
<밀양>의 영어제목이 시크릿선샤인이었다.
뭐지. 이렇게 한없이 투명하고 예쁘고, 한 치의 미세먼지도 허용할것 같지 않은 이 정제된 영화제목들은?
게다가 <시>라는 영화제목은 마치 그 단어들이 뛰쳐나온 이창동의 사전같은 느낌을 준다.
그토록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어하고 시상을 찾아 헤매고 시의 의미를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더 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시적 영감을 줄것같은 그런 단어들로 가득찬 사전.
그런데 감독은 오히려 이 아름다운 명사들을 있는 힘껏 비틀고 쥐어 짜서
우리가 한번도 들어본적도 사용해본적도 없는 전혀 다른 명사로 바꿔버리는것 같다.
우리가 동정하고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보았던 우리의 인생은
신애(전도연)의 얼굴처럼 그리고 미자(윤정희)의 얼굴처럼
눈물도 마르고 미소도 가신채 푸석푸석하기만하다.
난 이창동이 매우 잔인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네 문화센터의 시쓰기 강좌에서 강사로 나오는 시인이 그런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사과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첫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혹시라도 시상이라는것이 떠오를까 부엌 구석구석을 살피는 미자.
한참동안 사과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그런다.
아무리 그래도 사과는 보는것보다 깍아 먹는게 최고지.
돌봐주는 이 하나 없이 생활 보호 대상자로 살아가면서 오히려 돌봐야 할 사람이 둘이나 있는 할머니.
중학생 손자 뒷바라지에 중풍에 걸린 회장님 간병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혼한 딸한테는 나쁜 소식 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치매 진단을 받지만 마치 그 사실 마저도 잊어버린듯.
주변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새초롬한 자기단장에 어딜가든 누굴 만나든 스스럼없이 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강에 뛰어들어 죽은 여학생에 고통스러워한다.
딸의 이혼도 손자의 탈선도 소녀의죽음도 그러나 그녀 탓은 아니다.
글쎄. 나는 이런것들은 전부 다 거짓같다.
누군가가 경험한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은 진실이겠지만 우린 도대체 그것을 통해서 뭘 공감할 수 있는걸까.
그것을 공감한다고 말하는것은 거짓같다.
마치 한무더기의 연예인들이 나와서 질질짜면서 자신이 감내해야했던 고통을 풀어놓고
이제는 죽을때까지 아무런 실수도 고통도 닥치지 않을것처럼 자위하는것.
그것을 보면서 마치 이해하는 척 용서하는 척 구원이라도 해줄것처럼 구는 우리들.
사물을 새로이 보려는 노력, 시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보려는 노력은 모두 가식같다.
마치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셨다고, 신앙을 통해 죄를 씻었다고 말하던 <밀양>의 살인범처럼.
세상이 아름답고 좋은곳이라면
도대체 우리는 왜 사과를 백만번 천만번 들여다보여 그가 가진 다른 이면을 발견하려 애써야 하는것일까.
아무튼 난 이 영화를 보고 될대로 삐뚤어졌다.
우리 엄마도 이렇게 곱게 늙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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