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오스카 시상식이 열리기 전의 12월과 1월은 그해에 개봉된 따끈따끈한 수작들을 의식적으로 챙겨볼 수 있는 신나고 즐거운 시기이다. 게다가 올해는 한국 영화가 본상에 노미네이트되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같이 후보에 오른 다른 작품들을 감상하는것이 훨씬 더 재밌었다. 후보작들을 구경하다보니 딱 한군데 남우 조연상에 후보를 올린 이 영화가 눈에 띈다. 사실 그냥 '미국인 톰 행크스'가 나오는 휴먼 드라마이겠거니 두시간 멍때리고 보는데 문제 없겠지 싶어서 보기 시작했고 실제로 그랬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더 재밌고 감동적이었다. 물론 조연상은 브래드 피트가 10번을 타고도 11번을 탈 것이다. 오스카를 이미 두 번이나 거머쥔 톰 행크스이지만 이번엔 그래도 좀 아깝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연기였다. 연기 잘하는 톰 행크스가 하는 연기가 어떤 느낌인지 보통 우리가 알지만 톰 행크스는 사실 어디로 가버렸고 미국인이라면 다 알겠지만 나는 전혀 몰랐던 프레드 로저스라는 인물이 보였다. 톰 행크스의 연기가 그다지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프레드 로저스라는 인물이 쉽지 않은 연기를 필요로하는 독특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그냥 톰 행크스의 연기가 창조해낸 허구의 인물이라면 포레스트 검프처럼 기억에 남지 않을 수 없는 캐릭터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마치 무슨 전기 영화 같지만 사실 결코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 이 영화의 독특한 흡입력이다. 아픈 엄마와 자신과 여동생을 놔두고 떠난 아버지로 인해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잡지 기자 로이드.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증오로 평생을 살아 온 그는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고 나서도 쉽게 주변에 따뜻한 눈길 하나 줄 수 없이 메말라있다. 직장에서도 그는 날이 선 인터뷰 기사를 쓰는 문제 직원이다. 그런 그에게 편집장이 던져 준 미션 하나가 유명한 방송인 프레드 로저스를 취재하는 것이다. 만인이 존경하는 유명인, 그냥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아우라를 지닌 최불암 같은 인상의 그에 대해 그는 이전처럼 어떤 날카롭고 비판적인 기사를 쓸 수 있을까. 로저스의 방송으로 시작해서 그의 방송 촬영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나지만 사실 영화의 주인공은 그 방송인 로저스를 취재하는 와중에 스스로를 치유하고 아버지와 화해하는 잡지 기자 로이드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프레드 로저스 라는 인물이 그 시기의 미국인들에게 얼마나 선하고 값진 영향을 주었는지를 잡지 기자 로이드를 대표로 삼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로저스는 유능하고 인기있는 방송인이다. 그는 유명한 아동 프로그램을 30년 가까이 진행했다. 카메라를 응시하고 화면에 잡히는 그의 눈빛은 화면 밖의 모든 이들이 마치 나만을 보고 내 이야기도 들어줄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진실하다. 과연 저런 사람도 화를 내거나 분노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높낮이 없고 조곤조곤한 말투, 조금의 나쁜 먼지도 이상한 냄새도 풍길 것 같지 않은 정갈한 움직임, 그는 나를 질투하거나 나를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타자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로이드는 늘상 사람을 만나고 그를 경청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하는 잡지 기자이지만 동생의 결혼식에 찾아 온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할말이 있다는 아버지와 결국 몸싸움을 벌이고 만다. 그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기를 끝끝내 거부한다. 그렇다고 로저스가 완벽한 인격을 지닌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선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선에서 그의 인생도 자유롭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조명이 꺼진 촬영장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다 몇 번 쾅쾅 내려치는 방식으로 그는 어쩌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신의 어떤 부분을 게워낸다. 그것은 어쩌면 화가 나서라기 보다는 화를 다루려는 노력 자체에 지쳤을때 그가 사용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로이드가 마냥 부족하기만한 성격 파탄자인 것도 아니다.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한 사람은 하나의 인격체로서 주변의 가족 나아가서 불특정 다수에게 영향을 끼치는 자신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그들에게 건강한 영향을 주고 스스로도 성장하기 위해 매일매일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면 한 명은 현재의 삶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쓰여야 할 에너지를 줄곧 지나가버린 것들을 분노하는데에 쓴다는 것이다. 분노까지는 아니지만 누구나 정말로 화가 날때가 있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아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서. 그래서 때로는 상대가 능동적으로 마음을 열고 다가올때조차도 언젠가 나를 화나게 했던 그 과거의 순간을 일부러 상기시키며 감정을 버퍼링 상태로 놓아두며 마음을 꼭꼭 닫아두면서 어떤 승리감에 젖는다. 우리의 말 한 마디, 내가 고르는 단어 하나, 표정 하나가 매사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그 대상이 아직 어린 아이라면 역시나 때로는 이해받아야 할 존재일뿐인 어른인 우리도 항상 상냥하고 따뜻한 말과 표정으로만 그들을 대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우린 우리 그 자체로 완벽하지 않은데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으면 그 미숙함은 더해진다. 영화 속에서 로이드와 로저스가 식당에서 얼마간의 침묵을 유지하며 온 주변이 마치 진공상태가 되는 듯한 순간이 있다. 화가 나는 순간에 그 촛점을 타인이 아닌 스스로에게 돌려 완벽한 침묵의 경지에 이르러 평정을 유지하는 방법.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내 인생 곳곳에 자리잡은 짧지만 부정적인 어떤 순간을 온전히 나 스스로의 영향력 안에 가두고 지배하고말겠다는 자유 의지. 나도 매순간 기억하고 싶다. 화를 내야겠다는 욕망이행복에의 의지를 압도하려는 순간의 스위치는 결국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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