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ffee

10월 입문

짧았던 여름을 뒤로하고 지속적으로 비가 내렸다. 비와 함께 무섭게 추워지다가도 다시 따뜻해지길 몇 번을 반복하다가 9월에 내리는 비들은 아직은 꽤 남아 있던 가을과 그 가을 속에 또 아주 미묘하게 엉겨붙어있던 늦여름을 전부 말끔히 탈탈 털어 헹궈버렸다. 낙엽은 3분의 1 정도 떨어졌다. 난방이 시작되기 전, 이 시기의 집안 공기는 때로는 옷을 잘 챙겨 입고 바깥에 있는 것이 더 아늑하다 느껴질 만큼 야멸차고 스산하다. 정점에 이른 겨울이 풍기는 중후한 낭만과는 또 다른 까탈스러운 매력으로 충만한 시기. 그와 함께 커피는 또 얼마나 빨리 식는지 말이다. 어릴 적 가지고 있던 주니어 고전 전집 리스트를 기준으로 시간이 나는 대로 고전 다시 읽기 축제를 하고 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주최자도 참가자도 나뿐인 행사에 참여 중이라는 생각이 우스울 정도의 집착과 몰입감을 유발한다. 원래 번호순서대로 읽어보려 했지만 1번 부활 2번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냥 건너뛰고 3번 좁은 문부터 읽기 시작해서 수레바퀴 아래서 와 폭풍의 언덕을 차례로 다시 읽었다. 어쩌다보니 프랑스와 독일, 영국 소설. 혹시 나라별로 구별되어지는 인물의 전형 같은 것이 이 옛 소설들에서도 느껴질까 의식적으로 살피고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읽으며 빠져들었던 다른 작품들을 떠올려보니 확실히 시골보다는 도시를 좋아해서 당시에 이런 작품들에 확 빠져들지 못했던 것도 같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목가적이고 낭만적이었다가도 폐쇄적이고 음산한 정취를 풍기는 시골보다는 도시의 골목 풍경이나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에 대한 인상이 배경으로 깔릴 때 그런 이야기들에 결국 좀 더 끌리는 것 같다. 제롬과 알리사의 구구절절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운명을 둘러싼 폭풍같은 이야기, 한스의 비극적인 유년시절이라는 20년도 넘은 케케묵은 한 줄의 인상을 가슴에 지니고 읽기 시작했으나 다시 만난 이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잔혹했으며 불행해서 당황스러웠다. 참 옛날 이야기구나 싶다가도 시대와 배경을 막론하고 삶에 적용되는 논리는 한결같다는 결론에 서글퍼지고 누군가에게 큰 잘못을 한 것처럼 찔리는 느낌도 들고 나로 인해 누군가가 불행해지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럭저럭 건강한 정신상태로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주변 환경에 감사함을 느끼는 등의 시시콜콜한 현실적 자각과 함께 느닷없이 영화 '사랑도 리콜되나요'의 오프닝이 생각났다. 부모들이 전쟁이니 총이니 폭력물 같은 것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애를 쓰지만 정작 그 자녀들을 가장 큰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사랑 노래라는 음악광 롭의 냉소 말이다. 자신의 실패한 러브 스토리를 작정하고 늘어놓는 롭이니 그런 대사가 다분히 심술궂다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상 사랑에 대한 얼마나 날카롭고 예리한 분석인가. 좀 더 독해력이 풍부해진 상태의 어린 나이에 이런 소설을 완역본으로 읽었다거나 내가 더 풍부한 감수성을 가진 미성년이었다면 이런 소설들은 삶에 대한 굉장한 의문과 내상을 남겼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폭풍의 언덕은 분량이 가장 길었지만 역시나 가장 거침없이 읽혔다. 힌들리와 히스클리프, 헤어튼이 만들어내는 워더링 하이츠의 음침한 분위기에 한껏 스며든 채로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 비극의 정점과 폭발의 순간에 가까워짐을 또렷이 인식할 수 있음으로 인해 흥미진진함은 배가 되었다. 이 짧은 글을 틈틈이 기록하는 며칠 사이에 난방이 시작되었다. 언 몸에 피가 돌듯 라디에이터가 따뜻한 온기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반응형

'Coffe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는 냄새의 커피  (3) 2022.01.12
수집  (4) 2021.11.14
10/11/2021  (0) 2021.11.13
9월 절정  (0) 2021.09.17
30/8/2021  (2) 2021.08.31
7월 종료  (5) 2021.08.06
쉬운 커피  (2) 2021.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