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왜 마셨는지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의 빈도로 마시고 싶다. 그러려면 좀 뜸하게 마셔야 하고 어처구니없는 주종이어도 명확하면 된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술을 대하는 자세와 감성은 또 그 나름대로의 진심이 담긴 채로 나와는 다르겠지만 애주가의 영혼과 체질을 가지지 못한 나로선 딱 그 정도가 좋다. 11월의 마지막 일요일, 연극보기 전에 진 한 잔을 마셨다. 술을 정말 거의 마시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생기냐면 대략 이렇다. 드라마의 새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지난 시즌의 내용을 잠깐 되짚어 줄 때 내 기억들이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재빠르게 되감겨 들어가며 수렴될 때의 느낌이 있다. 눈앞에 놓인 한 잔의 술이 바로 이전 술의 맛과 향과 추억을 마치 방금 전에 마신 것인 양 아주 명료하게 상기시키는 순간이 놀랍게도 존재한다는 것. 그러니 딸기 맛 진이 입속으로 파고드는 직전의 순간까지 내 혀 끝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련한 뒷모습을 남기며 휘발된 것은 바르샤바 삐로그 집의 아몬드 향 보드카였다.
춥고 질퍽한 날씨. 아직 남아있는 뾰족한 진 맛을 느끼면서 오르막길을 올라 극장에 갔다. 이제는 '있지만 없는 것'이 되어버린 러시아 드라마 극장. 따지고보면 한참 전의 일이지만 여기서 그래도 꽤 많은 연극을 보았다. 러시아어는 알아듣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리투아니아어 자막이 있더라도 읽지 않은 작품은 웬만해선 보지 않았지만 연극제를 하면 오히려 리투아니아어 연극을 이곳에서도 많이 해준다. 여름부터 전쟁 관련해서 극장 이름을 바꾼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결국 정말 그렇게 되었다. 이 극장은 사실 백 년간 그 명칭이 자주 바뀌었다. 폴란드 드라마 극장인 적도 있었고 지금은 리투아니아 올드 드라마 극장 Lietuvos Senasis Dramos Teatras이 되었다. 얼핏 보기에는 바꾼 식기에 결국 같은 음식을 담아 먹는 형상이라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한편으론 극장은 결국 처음부터 누구의 것도 아닌 그저 극장일 뿐이어야 했단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이제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옷을 맡기고 받은 번호표도 왠지 마지막인 것 같아 찍어 두었다. 리투아니아 러시아 드라마 극장의 약자인데 이것도 LSDT로 바뀔지 모르니깐. 엘에스디티는 리투아니아 사회민주 평의회 뭐 이런 것의 약자 같다. 껍데기에 불과할지 모르는 극장의 명칭에도 리투아니아 생활 초창기 몇 년 간의 추억들이 많이 담겨있기 때문에 참으로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극장은 여름보다는 확실히 겨울에 올 때가 더 기분이 난다. 겨울에는 맡겼다가 돌려받을 수 있는 뭔가가 있으니 공연이 끝난 후 다들 우르르 몰려나가 번호표를 내미는 순간에 휩싸이는 모종의 동지애 같은 것이 있다. 아직은 1/3쯤만 채워진 객석 속으로 조금의 한기를 느끼며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서 서서히 데워지는 공기를 몸으로 느낄 때. 그리고 번호표가 잘 있나 확인하려고 손을 넣으면 황량한 가방 한 구석을 휘젓는 손 끝에 와닿는 차가운 쇳조각의 촉감도 나에겐 겨울의 상징 중 하나이다.
이번에 본 백치는 사실 2018년 초연작인데 그때는 러시아어가 표기된 저 빨간 당나귀 포스터가 외부에 걸려있었음에도 표를 못사서 못 봤다. 옛 소련 국가들이 거의 그렇지만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공연 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렇게 비싼 돈을 안 들여도 양질의 공연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공연을 보는 것은 고상한 취향을 가진 특정 계층의 전유물은 아니다. 누구나 공연을 보는 날은 평소보다 최소 1.25배 정도는 정중하게 차려입고 아름다운 저녁을 보내겠다는 순진무구한 소년소녀의 마음가짐으로 집을 나선다. 공연이 매진되는 속도도 엄청 빠르다. 이 공연도 8석이 남아있을 때 가까스로 티켓을 샀다.
극장 매표소의 풍경은 눈이 씨뻘개져서 패밀리 닥터를 찾아가도 2달은 기다려야 검진 차례가 돌아오는 소도시 폴리끌리닉의 안과 같다. 알파벳 O가 크게 쓰여 있는 저것은 예브게니 오네긴의 초연 포스터이다. 스탈케르 부인 포스의 짧은 머리 여성은 옷 보관소에서 받아 입은 코트의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 이제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려는 듯한 몸짓이다. 일부러 팔구십 년대의 느낌을 재현해낸 세트 같아 보이는 이곳은 크게 바뀌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21세기인 지금에도 그냥 이렇게 저렇게 남아 있는 많은 것들 중 하나이다. 실상은 예산 부족, 고질적인 탁상 행정, 서로를 도무지 재촉할 줄 모르는 퇴행에 대한 암묵적인 타협 등등의 많은 문제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난 이런 공간들이 그저 좋다. 어차피 때가 되면 다 변할 것이고 그 속도가 아주 느려도 상관없다. 겉모습이 바뀌면 그 속사정에도 알게 모르게 부식이 진행된다. 아무리 깊고 아득한 추억이라고 할지라도 대개는 그렇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과 백치를 기반으로 한 3시간짜리 러시아어 연극이었다. 사실 리투아니아어 자막이 무대 위에 걸리기 때문에 자막 있는 연극은 이층에서 보는 것이 좋은데 표가 없어서 1층에 앉아 자주 고개를 빳빳이 들어야했다. 배우가 내뱉는 마지막 문장의 몇몇 단어들을 통해서 대충 자막이 바뀌는 지점을 알아차리고 자막을 최대한 빨리 읽고 극을 보며 확인하는 식이 된다. 그냥 연극을 보는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몰입도가 떨어지고 피로감이 있다. 늘 이런 상황에선 러시아어 동사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야겠다고 다짐만 한다. 몇 번은 자막과 대사의 템포가 어긋나기도 했고 어떨 땐 배우들 연기에 빠져서 자막 자체를 읽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소설의 내용을 되새기며 어림짐작으로 봐야 하는 상황도 있었지만 대체로 만족한다.
백치에 관한 작품은 리투아니아에 있으면서 3편을 보게 되었다. 하나는 리투아니아의 인기 안무가인 안젤리카 홀리나의 발레극 백치, 하나는 전설적인 리투아니아 연출가 에이문타스 네크로쉬우스의 4시간짜리 백치이다. 그러니 실재하는 므이시킨 3명, 로고진 3명, 나스타샤 3명을 본 셈이고 소설 속 대부분의 인물들을 등장시킨 비교적 소상하고 장엄했던 네크로쉬우스의 연극 속의 인물들을 생각하면 백치는 그냥 처음부터 움직이는 형태의 작품으로 존재했었던 느낌조차 든다. 그런 의문도 든다. 백치가 그렇게 실사화 하기 좋은 작품인가? 돈으로 사랑으로 질투로 치정으로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이야기는 얼핏 보면 드라마틱하고 매력적인 요소가 있지만 몇 시간 안에 다 풀어내기엔 또 장황하다. 4시간짜리 네크로쉬우스의 연극으로도 사실 역부족이다. 그런데 이번 이 연극은 상대적으로 길이가 짧았고 의상이나 무대에도 크게 공들이지 않았다. 연출가가 직접 골랐다는 단조롭고 어두운 음악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중간에 악령의 요소가 들어가서인지 비교적 긴박한 속도로 금방이라도 누가 불을 질러버릴 것 같은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분위기가 지배했고 확실히 젊은 연출가인 것이 느껴졌다. 이따금 장면 전환용으로 쓰인 회전하는 상자를 제외하면 무대 장치가 거의 전무한 와중에 뒤로는 홀바인 그림 속의 예수 그리스도가 누워있었다. 그것은 끊어질 듯 말락 한 숨을 부여잡고 관 속에 누워 겨우 숨 쉬고 있는 예수의 영상이었고 마치 난로 속에서 고요하게 이글거리는 불길과도 같았다. 비난과 불신과 폭언과 고성이 난무했지만 결국 믿는다는 것 그리고 믿지 않는다는 것의 테마가 연극을 이끌고 가는 느낌이 들었다.
전통적으로 1부는 나스타샤의 생일날 사람들이 모이고 난로에 돈다발을 집어 넣는데 이르는 장면으로 끝이 났고 2부는 어딘가에 비로소 잠든 채로 누워있을 나스타샤를 뒤로 하고 이어지는 로고진과 므이시킨의 대화 장면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2부 시작 전 30분 휴식 타임에 관객들이 아직 다 돌아오지 않은 시점에서 갑자기 레베제프 역의 배우가 접시에 절인 양배추를 잔뜩 담아와서 우리 앞 줄에 앉더니 뒤따라서 귤이 담긴 봉지를 든 예판친과 페르디쉬첸코가 나란히 나타나서 같이 앉았다. 2부의 시작은 부르도프스키와 이뽈리트가 80년대의 섹스 피스톨즈를 연상시키는 차림으로 나와서 기타 연주를 하며 극을 이어갔는데 그때부터 객석에 앉은 저 3인방이 귤을 던지고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난투극으로 변했다.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이폴리트가 등장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왜인지 미성년의 아르까지도 좋다. 작가의 소설 속에서 동굴 같기도 관 같기도한 좁은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약간의 병맛이 깃든 독백을 내뱉을 수 있는 인물들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는 편이다. 다른 두 연극에는 등장하지 않은 부분이어서도 좋았다. 그리고 이폴리트는 자신의 방에 난 창문으로 벽을 바라보듯 시종일관 관객을 등지고 있었다는 것, 그가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어두운 엠비언트 음악에 겨우 숨이 붙어있는 채로 미세하게 움직이는 예수의 모습이 결합되어서 로고진과 나스타샤 므이시킨이 등장하는 처음과 끝보다 가장 인상에 남았다.
근데 백치를 펼쳐 읽으면 놀랍게도 연극을 통해 본 인물들의 얼굴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이를테면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 안소니 퀸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으면 존 레귀자모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생각하면 반대 경우이다. 그래도 로고진의 모습 정도는 각인될법 한테 그렇지도 않다. 소설을 읽으면 작가의 인물 묘사를 통해서든 인물의 대사를 통해서든 어떤 형태로든 머릿속에는 그들의 형상이 자리 잡는다. 정말 신기한 것은 무형의 형상이 존재한다는 것. 소설을 읽으며 특정 배우의 얼굴을 떠올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렌즈를 끼지 않았을 때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지만 상대의 표정 변화와 감정을 대강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얼굴이 없는 상태의 몸짓이 머릿속에 남는다. 그러니 연극이든 영화든 연출가의 해석으로 얼굴을 가진 인물들을 보고 나면 그런 형체 없던 내 머릿속 인물들에도 살이 붙고 눈빛이 나타난다. 하지만 막상 다시 작가의 고유한 텍스트를 접하면 다시 그 인물들은 얼굴 없는 형상이 된다. 가장 처음 읽었을 때 자리 잡은 그 고유하고 강렬한 느낌은 누가 그려낸 그림이라기 보단 스스로 나타났다가 사라졌음에도 마치 그려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성스러운 형상 같다. 그러니 백치든 뭐든 계속 보게 된다면 아마 그 사라진 형상이 그려진 형상이라고 고집스럽게 믿어서라도 그 그려진 형상에서 사라진 형상을 발현하고 가둬두고 싶은 의지 같다.
하지만 극을 연출하는 사람들은 과연 그런 것을 신경을 쓸까 라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몇천대 몇의 경쟁률을 뚫고 그 인물의 형상이나 대사들을 연출가가 의도하는 대로 연기할 수 있는 배우를 공들여 뽑을 때도 있겠지만 이번 연극은 오히려 그런 과정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처럼 보였다. 배우들에게 옷을 입히고 분장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인물 해석을 했겠지만 젊은 연출가의 백치는 가브릴라를 연기한 배우가 므이시킨을 연기했어도 로고진이 므이시킨을 연기했어도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연극을 보고 오면서 두 영화를 떠올렸다. 라미 말렉이 연기한 프레디 머큐리와 에단 호크가 연기한 쳇 베이커를 생각했다. 라미 말렉이 이미 그려진 프레디 머큐리를 연기했다면 에단 호크는 나타났다가 사라진 쳇 베이커를 연기하고 스스로 그림으로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물론 그려져서 나타난 프레디 머큐리에 훨씬 더 환호하는 법이다.
극장 앞 술집은 이름도 기가 막힌 에이미 와인 하우스이다. 조명이 있는 곳에 야외 테이블이 있고 저 곳엔 소년 로맹 가리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 여름이었으면 연극이 끝나고 난 후 갈 수 있었겠지만 저곳은 겨울에 갈 곳은 아니다. 여름에 저곳에 가면 건너편 극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결국 이들은 반년 차이로 항상 엇갈린다. 지척에 있지만 한쌍이 될 수 없는 장소들이 있다. 겨울이 되어 연극을 봐서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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