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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2월에 떠올리는 12월의 바냐 삼촌


어느새 2월이 되었다. 12월 초에 슬로베니아 연출가의 리투아니아어 연극 바냐 삼촌을 보고 왔다. 이 작품은 작년 가을의 빌니우스 국제 연극제에서 상연이 되었는데 너무 금방 매진이 돼서 아쉬워하던 차에 빌니우스 소극장 공연이 다시 잡혀서 가까스로 표를 구했다. 리투아니아에서 뭔가가 아주 금방 팔려버려 못 사거나 하는 것이 있다면 오로지 연극 티켓이 아닐까 싶다.

리투아니아의 창작 연극들이 꽤 많이 있지만 그 틈에 가장 자주 올라오는 고전 작품은 역시 체홉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체홉의 소설들이 희곡보다 훨씬 더 깔끔하니 재밌지만 작가의 재치나 유머는 살짝 지루해지려는 좀 더 옛스러운 희곡의 분위기도 결국은 참지 못하고 뚫고 나온다.

연초에 일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일부러 찾아 보았다. 솔직히 상당히 지루했지만 체홉 지분으로 끝까지 의미를 부여하며 보았다. 수화를 비롯해 각기 다른 언어로 바냐 삼촌이라는 극을 올린다는 설정에선 분명 독특한 울림이 있었다. 만약 무더운 8월의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하는 포르투갈어의 바냐 삼촌을 관람해야 한다면 누구든 감동받을 몇 군데 지점을 정해 놓고 그 순간을 기다리게 될 거다. 하는 말도 살아온 환경도 다르지만 우리가 같은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처럼.


연극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바냐 삼촌이 노모와 죽은 누나의 딸인 조카 소냐와 시골 영지에 산다. 소냐의 아빠이자 바냐의 처남인 교수는 모든 가족의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받으며 평생을 오로지 학문에 전념했지만 바냐는 뒤늦게 그것이 정말 쓸데없고 무의미한 짓이었다고 생각하며 처남을 떠받드는데 자신의 인생을 허비한 것을 억울해한다. 노모는 여전히 교수인 사위를 신처럼 여기며 매달린다. 교수는 심지어 젊은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한 채 처갓집에 얹혀 산다. 통풍에 걸린 교수의 치료차 훈남 의사 아스트로프는 바냐네 집에 자주 왕래한다. 그도 시골에서 재능을 썩히고 있는 술 취한 지식인일 뿐이다. 소냐는 그런 의사를 좋아한다. 의사와 바냐는 교수의 젊은 아내를 동시에 흠모한다. 교수는 느닷없이 이 생산성 없는 영지를 팔아버리고 핀란드 어디쯤으로 떠나자며 제안한다. 바냐는 그럼 나랑 엄마랑 소냐는 어디로 가냐며 총을 난사하며 절규한다. 총은 심지어 적중하지도 못하고 교수는 아내와 시골을 떠난다. 소냐는 다시 한번 어떻게든 살아나가자며 바냐 삼촌을 위로한다.

연극이 아주 마음에 든것은 아니다. 배우들은 지나치게 소곤댔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연대에 특정 뉘앙스를 추가해서 과장하며 억지로 웃기려 들기도 했다. 활자 넘어 가득한 체홉의 냉소는 연극으로도 영화로도 온전히 구현되기 어려운가 보다. 하지만 몇 장면에서는 울컥하고 눈물이 나오기도 했으니 그것은 전적으로 사용된 음악 때문이었다. 영화든 연극이든 연출가들이 쓰는 음악에 많이 휘둘리는 편이다. 영화를 보고 단 한 곡의 음악이 기억에 남더라도 영화가 끝나고 사운드트랙 정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게 된다. 마지막의 돌비 사운드 로고가 나올때까지 자리에 남아있게 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좋은 영화이다. 이 연극의 경우 연출가의 음악 취향이 몹시 대중적이어서 아마 대부분의 관객이 음악으로 연극에 몰입할 수 있었을 거다.

연극에는 유독 소냐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많았다. 시골에서 힘들게 일하는 소냐는 사실상 아버지의 관심 밖이고 바냐 삼촌에게는 알게 모르게 정신적인 지주이다. 루리드의 Perfect day를 부르며 현실에 순응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위로하고 아스트로프를 쳐다보며 교수의 아내인 옐레나와는 시너드 오코너의 Nothing compares to you를 한 파트씩 나눠 부른다. 화사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촉촉한 머릿결의 옐레나는 멋있게 잘 부르고 운동복에 작업복을 걸친 뽀글이 머리의 소냐는 사정없이 음이탈을 감행한다. 소냐의 바닥난 자존감과 아스트로프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마음은 그렇게 우회적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는 크랜베리스의 Ode to my family까지 부른다. 그 노래는 나에게 소냐의 테마처럼 남았다. 그로부터 남은 연극을 보는 내내 머리에 맴돌던 것은 엉뚱하게도 어릴 때 재밌게 보았던 주말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였다.

토요일 저녁, 드라마 시작과 함께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 그림이 지나가면 우울하고 촌스러운 사북 탄광촌과 세련된 서울의 부잣집 이야기가 차례대로 나타났다. 야망에 불타는 똑똑한 이종원은 고다르를 좋아하는 지적인 부잣집 친구 배용준과 친해지기 위해 프랑스 문화원에 우연처럼 등장하곤 했고 사북에 사는 작가 지망생이었던 둘째 딸 전도연이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화면에 나타나면 Ode to my family가 뒤따라 흘러나왔다. 막 크랜베리스라는 그룹을 알고 좋아하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 전도연의 테마가 유독 좋았다. 드라마에서 그녀에게만 유독 그런 주제곡이 있었던 것 같다. 극본을 쓴 작가 본인의 모습이 투영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희망이라곤 없어 보이는 암울한 사북의 잿빛 풍경 속에서 그 음악과 함께 나타나는 전도연과 그를 졸졸 따라다니는 차태현의 모습은 유난히 풋풋하고 희망적이고 산뜻했다. 지금도 그 음악을 들으면 그 드라마가 생각난다. 그리고 이젠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노래를 부르던 소냐 생각도 날 거다. 물론 소냐와 극중 전도연, 종희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종희는 희생적인 언니와 정신 지체를 겪는 동생 사이에서 주변을 동정하고 연민하고 속깊이 안타까워하지만 한편으로는 냉철하게 차곡차곡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간다. 소냐 역시 좌절하고 자기연민에 빠진 바냐 삼촌을 일으켜 세우려 애쓰지만 그 모습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이나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카렌을 떠올리긴 어렵다. 그러기엔 그들이 속해 있는 시대 자체가 개인의 희망과 내공으로 이겨내기엔 더 과격한 사회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여러모로 바냐 삼촌과 이 드라마가 많이 닮았다고 느꼈다. 자랑스러운 큰 아들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던 시골 술집 마담 김수미의 모습에는 사위를 숭배하는 노모의 모습이 겹쳐졌다. 개천에서 난 용 같은 존재인 친구를 조건 없이 응원하던 고향 친구들. 너 자신을 희생에서 나만을 위해 살라고 누구도 애원하지 않았지만 단지 좀 더 많은 가능성을 지녔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모두의 희망이 되어버리던 존재 그리고 그 부담감을 안고 부탁하지 않은 빚을 진채 살아갔을 사람의 무게도. 사실 연극에서 교수가 연기를 제일 잘해서인지 예전에 희곡을 읽을 때 달리 다가오지 않았던 교수와 그의 아내에게조차 모종의 연민이 느껴졌다.

체홉 자신이 의사이기도 했고 남아있는 실제 그의 사진에서의 인상 때문인지 늘 술에 절어있는 시골 의사 아스트로프는 나에게 센티멘탈하고 유약하고 냉소적인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 극에서는 빨간색 베스파를 끌고 무대에 등장하는 호방하고 거침없는 마초 느낌을 물씬 풍겼다. 물론 술에 취해있는 것은 똑같았다. 19세기말 정도 될듯한 연극의 배경이 90년대 소련 어느 조악한 다차의 응접실 같은 세트에서 재현되었지만 그것도 충분히 그럴듯했다. 물론 극을 18세기 중반으로 끌고 간다고 해도 어울릴 거다. 우리나라 배우가 소냐를 연기한다면 누가 어울릴까 생각했다. 이솜 혹은 천우희. 바냐 삼촌은 박해일. 교수님은 정진영. 아내는 어쩌면 최희서. 아스트로프는 아 아스트로프 중요한데.... 생각해 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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