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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ktaklis

12월에 회상하는 2025년 11월의 연극 '아들 Sūnus'

 



11월에 연극을 보는 것은 대략 이런 느낌이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수많은 거리를 지나 극장으로 향하고, 가까스로 암전 된 무대를 마주하고, 공연이 끝난 후 하나둘 밖으로 밀려 나온 관객들의 짙은 코트 빛깔이 밤의 빈틈을 차근차근 채워갈 때, 극장을 들어서기 전의 모습과 보고 나온 후의 풍경은 그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 없이 묘하게 압축되어 정체된다. 그것은 마치 연극을 보지 않은 상태와 이미 보고 나온 상태 사이엔 결국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마치 해결되지 않는 수수께끼의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 같아 빨리 감기로 되돌려보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해답을 주지 않는 의미 없는 장면에서 멈추는 것처럼 극적이지 않고, 의미심장한 장면 몇 개를 삭제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조작된 화면처럼 비현실적이다.

연극이든 영화든 (어쩌면 반복해서 보기 힘든 연극이라면 더더욱) 정말 언제라도 끝까지 기억할 수 있는 어떤 장면과 감정의 분출을 또렷하게 목격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보게 된다. 하지만 보기 전과 보고 난 후의 차이를 곱씹어보면 극장에 들어가고 빠져나온 차이 이상의 본질적으로 변화된 나를 인식하기란 힘들다.

어떤 감상들을 올리고 많은 생각을 하고 약간의 감정적 동요를 경험하지만 바뀌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를 보고 짧게라도 적는 이유는 내 인생에 생겨날지 모르는 많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에 대응하는 (쓰러진다도 해도 어쩔 수 없는) 방파제를 쌓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뭔가를 배운다는 것은 늘 의심의 대상이다. 그리고 때로는 타인의 스토리에 매달리는 수동성이야말로 나 자신의 이야기와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는 사용될 기회를 얻지 못했던 단어와 감정을 발굴하는 데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인 행위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출처 - Jaunimo teatras (Laura Vansevičienė)

 
 
리투아니아 연출가 이그나스 요니나스 (Ignas Jonynas)가 연출한 플로리앙 젤레르의 작품 <아들 Sūnus> 을 보았다. <아버지>, <아들>, <어머니> 삼부작 중 하나로 리투아니아에서는 세 작품이 전부 공연됐다.

소설을 쓰던 플로리앙 젤레르는 극작가가 되었고 그의 작품이 여러나라에서 연극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사이사이 작가 본인은 자신의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앤서니 홉킨스와 올리비아 콜맨이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딸을 연기한 <Father>, 휴 잭맨과 앤서니 홉킨스가 부자지간으로 나오는 <Son>이 그렇다. 

연극이 영화화되는 경우는 많지만 어쨌든 원작자가 직접 연출한 영화이니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글을 쓸 때 상상했던 상당 부분이 재현되었으리라 생각하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연극을 만들려는 미래의 연출자들에게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껏 벗어나도 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듯한 인상을 받았다. 물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세트와 소품들을 연극무대에서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며 어떤 식으로든지 나름의 해석을 바탕으로 무대에서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이 연출자의 소명이겠지만.  

출처 - Jaunimo teatras (Laura Vansevičienė)

 
 
연극표는 통상 두달도 더 전에 예매를 하지만 늘 남은 자리가 별로 없어서 원하는 자리에 앉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2 열정도면 사실 항상 괜찮은 자리였는데 이 연극의 독특한 무대장치 때문에 아주 안 좋은 자리가 되어버렸다. 앞의 5 열정도는 아예 표를 판매하지 않고 비워두거나 무대장치를 언급하고 앞 좌석들은 가장 싸게 팔게 하거나 했어도 좋았겠다 싶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늘 앞자리에는 거의 보리스 옐친이나 헬무트 콜 급의 연극협회의 원로 같은 장대한 풍채의 사람이 앉는데 정말 예외 없이 거의 매번 그런 것에 폭소하는 순간 연극의 시작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세 번째 벨이 울린다.
 
공중에 매달린 거대한 장치 위로 인물들이 올라간다. 아버지와 아들, 아내와 남편, 엄마와 아들의 불안정한 관계들, 그들이 정상적인 소통에 얼마나 애를 먹고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을 그 무대 장치는 사실 정말 탁월했다. 그래서 저 장치가 앞으로 기울면 배우들이 잘 보였지만 높은 위치에서 수평을 유지하거나 반대로 기울면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 마저도 갈등하는 두 인물 사이에서 관람객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손발이 묶인 제삼자의 위치라고 합리화하며 연출된 세트에 감탄하는 길을 택한다.

거친 파도에 배의 선미가 대책 없이 중심을 잃고 위로 솟구치듯 거대한 패널은 늘 움직였다.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설득할 수도 없는 사람들은 속절없이 소맷자락을 붙잡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나라는 존재를 우선에 두고 인물들이 중심을 잡으려고 할 때에도 '내가 비로소 널 이해하려고 한다'는 자세를 취했을 때도  무게중심은 보란 듯이 상대방으로 옮겨간다.
 
 

출처 - Jaunimo teatras (Laura Vansevičienė)


 
이 연극은 아들 니콜라스와 아빠 피터의 이야기이고 누군가의 아들인 피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니콜라스와 피터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피터가 새 가정을 꾸려서 나은 어린아이 (실제 아이는 등장하지 않고 아이는 줄곧 속싸개 같은 것에 감싸인 채로 묘사되는데 그것이 피터의 젊은 부인이 갈아입는 여러 벌의 의상에 완전히 결합된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인상적이었다)와 피터가 장차 맺게 될 부자관계를 그려보게도 된다.
 
아버지 피터의 외도로 인해 니콜라스는 끔찍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고통받는 엄마를 보았고 아이의 우상이었던 아빠가 엄마에게는 증오의 대상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다. 버려졌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나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버리는 것임이 유년시절의 유일한 교훈이다. 모든 행복이 거짓에 불과한 과거가 되는 것을 보았고 미래와는 단절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행복했고 그럼에도 나는 사랑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 전에 이미 성장판은 닫혀버렸다. 부모는 이혼했고 엄마는 혼자 남았고 현실을 받아들인 듯 보이지만 아이는 이미 치유할 수 없는 상처투성이로 남았다. 니콜라스는 방황하고 학교에도 가지 않으며 자살시도를 하고 불현듯 엄마보다는 아빠와 살고 싶다며 아빠의 새 부인과 이복동생이 있는 아빠의 집으로 들어온다. 피터는 뒤늦게 아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아들은 엄마와 아빠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표면적으로 노력하지만 이미 이번 삶에는 미련이 없다. 정신병원에서 꺼내달라는 아이의 절규를 듣고 부모는 아마도 그것이 그에 대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데려온다. 부모에게 마지막 환희와 안도를 경험하게 한 후 아이는 방아쇠를 당긴다.  
 
영화 The Son에는 연극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등장한다. 피터의 아버지, 즉 니콜라스의 할아버지다. 그를 연기한 앤서니 홉킨스는 영화에서 단 한 번 등장하며 아들 피터와 대화를 나눈다. 일을 하느라 가정을 등한시했고 엄마를 버린 아버지의 과거를 언급하며 피터는 커리어에 좋은 제안이 들어왔지만 가족과 시간이 중요한 것 같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가정적인 태도에 아버지가 가족을 내팽개친 과거를 후회하는 감정을 내비치고 약하게 굴 것을 내심 기대하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완고하다. 피터의 그런 태도는 오히려 어려서부터 피터를 늘 궁지로 몰며 최고가 되게끔 단련하던 아버지에게 여전한 약해빠진 놈의 증거로 작용한다. 피터 자신도 그런 약점을 극복하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에게 엄격했다. 이제는 죽고 없는 아들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그는 아들이 살아있었더라면 이룰 수 있었을 법한 삶을 상상한다. 아들이 극복했더라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했을 어떤 삶, 하지만 그 아들은 생전에 단 한 번도 꿈꾸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삶이다. 그 자신이 그토록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그가 정말 원했던것은 무엇인지 모르게 되어버린 삶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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