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초에 커피와 까르토슈까(https://ashland.tistory.com/1259)로 묵직하게 당충전하고 보았던 연극 '아연 '. 화학 원소의 그 아연 맞고 리투아니아어로는 찐카스 (Сinkas)이다. 리투아니아 연출가 에이문타스 네크로쉬우스의 작품이고 원작은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아연 소년들'이다. 아프가니스탄에 보내졌다가 주검이 되어 아연관에 담겨 돌아오던 소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크라이나 태생의 벨라루스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구소련 국가인 리투아니아에서도 당연히 인기가 많다. 작년에 빌니우스 문학 페스티벌에서 한 인터뷰에서도 그렇고 러시아와 함께 전쟁의 원흉으로 취급되는 고국 벨라루스가 러시아에 점령당한 가장 억울한 식민지일 뿐이고 벨라루스의 대통령 역시 루카쉔코라기 보다는 푸틴이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벨라루스에 대한 여러 제재들은 부당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맞는 말이다. 이 작가는 당연히 국외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언젠가 이 작가의 짐가방에 폭탄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와 베를린 공항에 억류된 작가를 폴란드에서 있을 행사 주최 측에서 육로로 태워간 일이 있었다. 70살의 노작가의 여행 가방에 폭탄이라니 졸지에 폭탄 테러범이 된 당사자보다 안쓰러운 것은 어디선가 그 투박한 방해 공작을 머리를 굴려 만들어내고 있었을 누군가이다.
사실 이 작가를 특별히 막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읽는다. 그 작품들을 과연 재밌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독자가 있을진 모르지만 그럼에도 읽는다. 만약에 내가 이 일련의 작품들을 10대 때 혹은 리투아니아에 살기 전에 읽었더라면 좀 다른 느낌이었을까. 나이가 들어가며 이곳에 살면서 접한 그의 책 대부분을 나는 그럼에도 끝까지 샅샅이 정독하진 않았다. 누군가 그 '작은 사람들'이 남긴 작은 발자국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수집해 낸 고통과 참상의 집합을 가만히 앉아 읽어 내려간다는 것은 또 다른 작은 사람들의 위선에 불과하지 않을까. 불행을 관조할 수 있는 위치에서의 우리가 이런 이야기들을 접했을 때 분비되는 것은 혹시 아드레날린이나 도파민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들 때문에.
그래도 작가의 세컨핸드타임은 조금은 다르게 읽힌다. 다른 책들이 체르노빌이나 전쟁의 상흔에 대한 피해자들의 자극적이고 절망스러운 인터뷰로 이루어졌다면 세컨핸드타임은 소련 붕괴전후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비교적 냉정한 어조로 담겨있다. 가족이 죽거나 스스로 몸의 일부를 잃거나 박해당하는 등 타인에게 하소연할만한 선명한 상처는 지니지 않았지만 그 체제 아래에서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체한 삶을 살았을 사람들의 담담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재구성된 <아연 소년들>의 백미라면 인터뷰에 응했던 당사자들이 작가에 집단 소송을 걸고 그들이 피고와 원고로 법정에서 다시 만나는 후반부일 것이다. 인터뷰 당사자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성과 이름을 바꿔서 책에 실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이고 날조되었다고 말하는 당사자들을 작가는 법정에서 다시 보호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네크로쉬우스는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연출가이지만 그의 작품을 실제로 극장에서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햄릿이나 오델로, 백치 같은 많이 알려진 연극들은 극장 측에서 제공하는 공식 영상이 있었던 시기가 있어서 온라인에서 며칠에 걸쳐서 보았었다. 리투아니아 여배우 알도나 벤도리우떼가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로 등장하고 책 속에 나오는 인터뷰 몇 개가 고스란히 재연된다.
전쟁에서 돌아와서 사람을 죽인 아들에 대해 얘기하며 차라리 아들을 잃은 엄마가 부럽다는 엄마의 이야기, 아프가니스탄을 적합하게 공산화해서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그럴듯한 '국제적'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썩은 음식을 먹어가며 군용 물자를 현지인들과 교환하며 생활을 해야 했던 어린 군인들의 목소리. 30년도 더 지난 이야기들이지만 이토록 생생한 것은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에 징집되고 있는 양국의 청년들을 생각하면 어디선가 대를 이은 비극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케 하기 때문이다.
스투르가츠키 형제의 <노변의 피크닉>에 보면 잃어버린 두 다리를 찾겠다고 아들을 사지로 보내는 스탈케르와 그 아빠처럼 만의 하나 두 다리를 잃게 되면 쓰겠다고 자신을 위한 한 발의 총알을 장전하던 소년 아르투르가 나온다. 아르투르는 아버지를 원망했을까. 혹은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욕망이 실현되어도 아버지의 두 다리가 나타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진 않았을까. <아연 소년들>에는 포로들의 팔과 다리를 잘라 지혈해 놓고 몸통만 가져가게 내버려 둔다는 아프가니스탄의 반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스스로 고통을 마감할 수 조차 없는 고통을 주기 위해서였을까. 소년들이 자신의 고국을 원망하길 바랐을까. 나는 아마 그즈음에 책을 덮었던 것 같다. 연극은 글쎄 보지 않았더라면 나았을 수도 있었겠다. 책을 읽을 때는 최소한 전자책의 낭독 기능처럼 무미건조한 느낌이 들어 어느정도 감정을 붙들어 놓을 수 있었고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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