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ny and Alexander>
중고등학생때는 영화를 선택하는데에 있어서 지금보다 훨씬 스스로에게 엄격했던것 같다.
지금은 시간이 있다면 왠만해선 가리지 않고 모든 영화를 보게 되는데 정말 쓰레기 같은 영화들속에서 조차도
건질만한 쓰레기가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인데, 그 말은 어찌보면 삶에 조금은 능청스러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삶에 가진 개똥 철학들을 훔쳐보는 재미를 지금보다 어릴땐 알지 못했던것이다.
사실 신작 비디오들은 항상 너무 비쌌고 오랫동안 아무도 빌려가지 않은듯 보이는 옛 고전들이나
딱히 대중적이지 않지만 호평일색의 영화들은 500원이면 빌릴 수 있었던 이유도 있었고
가끔 사보던 영화 잡지에서 번지르르하게 언급되는 영화들을 가능한한 많이 봐야한다는 생각에
때로는 재미없다 생각되는 영화들도 맛없는 영양식을 먹듯 꾸역꾸역 삼키곤 했던것이다.
하지만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려던 그때의 노력들은 결코 헛되진 않은것임을 느낀다.
그 모든 영화들이 내 인생의 귀감이 되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불현듯 떠오르는 영화의 장면들은
마치 내 등을 토닥거리는 누군가의 위로처럼 기쁠때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함께 기뻐하는 친구처럼 느껴질때가 있다.
이십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당시 보았던 영화들을 생각날때마다 다시 찾아 보곤 한다.
그 당시에도 이미 오래된 영화였던 그 일련의 영화들을 다시 보고 있자면 내가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세련되고 새것같아 놀랍다.
김기영의 <화녀>가 김성수의 <비트>보다 훨씬 세련되고 더 최근의 영화처럼 느껴진다면 정확한 예일거다.
남매의 이름으로 화니와 알렉산더가 퍽이나 드라마틱하고 예쁘다 느껴져서 순전히 그 생각으로 다시 찾아 본 영화.
스웨덴하면 스칸디나비아식 인테리어며 뭐며 이젠 이케아를 떠오르는 시대가 됐지만
당시만해도 내가 스웨덴 영화를 보고있다라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던 때였다.
화니와 알렉산더를 생각하면 늘상 떠오르던 장면들은
알렉산더의 얼굴을 환희 비추는 수많은 촛불과 소란스러운 크리스마스 저녁, 그가 고요히 마주 앉아 들여보던 이야기 상자.
크리스마스날 모인 대가족이 허리를 잡고 기차놀이를 하듯 온 집안을 뛰어다니는게 가능한 스웨덴 상류층 저택의 거대함에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마치 하루가 지나면 끝인 짧은 연극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던 그들의 자유분방함이었다.
그때는 화니와 알렉산더가 엄마인 에밀리에와 마주친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한 이질감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던것 같다.
그 모든 화려하고 생기발랄한 색채와 수십개의 촛불의 아늑함이 별안간 차갑디 차가운 회벽안에 갇혀
더 이상 절제할 수 없을 정도의 엄격함으로 바뀔때, 전혀 다른 두 세계가 타협의 여지없이 교체되는 극적임말이다.
갓 재혼한 에밀리에와 에드바르드가 마주보고 앉아있는 이 장면은 나에겐 제7의 봉인에서 체스를 두는 장면만큼 강렬했다.
지금까지 너가 가지고 있던 모든것들을 버리고 아이들의 가지고 놀던 장난감도 책도 모두 포기하고
네가 가진 옛 습관들도 생각들도 모두 버리고 새 인생을 시작하자는 에두바르도의 말은 정말 비현실적이고 무섭게 들렸다.
하지만 그 모든 조건들을 감내해야할만큼 남편을 잃은 에밀리에의 상실감은 컸었던거겠지.
현실속의 사람들이 종교의 힘을 빌려 스스로를 통제하고 인생의 고달픔들을 감내하는 노력들은
사실 죽음이라는 미래와 현실의 불행에 맞서는 자기 합리화에 가깝다.
과연 그런 절제와 엄격함이 현실에서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
신의 존재를 긍정하고자 한다면 지금 현재 마주하고 있는 모든 인생의 희노애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것 같다.
애크달 가문의 하녀로써 화니와 알렉산더를 돌보며 알렉산더의 삼촌의 정부이기도했던 다리를 절던 maj.
왜 굳이 이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인물을 장애가 있는 인물로 그려냈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절망적인 얼굴로 병을 앓으며 죽음이라는 신의 계시를 기다리며 종일 침대에 누워 살다가
결국 불타는 방안을 뛰쳐 나오며 죽어가는 에드바르드의 숙모는
그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대표하는 이미지였을지 모르겠다.
두 사람의 운명은 그들이 믿고 따르는 신념과 그들이 속한 세계의 질서속에서 극명하게 바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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