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는 첫눈이 내렸다. 물론 내리면서 녹아 버리는 눈이었지만 이제 정말 겨울이구나 하는 생각에 한 겨울에 펑펑 내리는 눈보다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 토요일 오전이면 집 근처의 상점들도 둘러 볼겸 혼자 나선다. 거리를 걷다가 빌니우스 중앙역에서 갈라져서 나와 구시가지로 연결되는 가장 큰 대로인 V. Šopeno 거리에서 재밌는 상자를 발견했다. 이 거리는 일전에 소개한 스트리트 아트가 그려진 건물이 있는 거리이고 그 스트리트 아트의 건너편에 이 상자가 붙어 있었다. 스트리트 아트 관련 글 보러가기
멀리서 봤을땐 건물의 전기 단자 같은것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상자에 임대 광고나 구인 광고 따위가 붙여져 있는 걸로 생각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럴싸하게 색칠도 되어있었다.
알고보니 누구나 열어서 책을 빌릴 수 있는 작은 도서관이었다.
미니 도서관 규칙
1. 모든이들이 적절한 책을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2. 다른 이들도 흥미로울 수 있도록 편지와 감상을 나눕시다.
3. 이 쇼페노 (V.Šopeno) 거리가 안전하고 쾌적한 거리로 거듭나길 희망합시다.
4. 자유롭게 얽매임없이 이 책들을 이용합시다.
5. 도서관은 모든 좋은 뜻을 가진 이들에게 항상 열려 있습니다.
이라고 적혀 있는데 가장 와 닿았던것은 3번 항목이었다.
이 거리가 사건 사고가 많은 우범 지역은 아니지만 가끔 길거리에서 마약 투여에 사용된 주사기가 발견될때도 있고 실제 마약 중독자들을 위한 도움 센터도 위치해 있다. 대낮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서 술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을 마주치는것은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환각제를 복용했는지도 모를일이다. 그들 대부분은 공격적이거나 폭력을 가하거나 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비틀거려서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지나치며 미소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니깐. 하지만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접근성도 뛰어나고 임대료가 저렴하니 텅텅 비어있던 주변 점포들에 여러 종류의 스튜디오들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뭔가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로 변하고 있는 느낌이다.
도서관을 열어 보니 (?) 여러 종류의 언어로 된 책들이 들어 있었다. 그다지 읽은 만한 책이 있는것 같진 않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퍽이나 유용한 책이 될 지도 모른다. 아직은 시작이니깐. 아직 도서관에 자리가 있으니 읽지 않는 책을 집에서 몇권 가져다 놔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날 가져다 놓은 책. 그루지야어 (몇해전 러시아와 외교문제로 충돌했던 이 나라를 영어로는 조지아 Georgia 라고 읽지만 리투아니아에서는 원어에 가깝게 그루지야라고 부른다.) 로 된 르네상스 미술 관련 책을 비롯해서. 사실 내가 읽지 않은 책이라 감상을 나눌 수도 없는 그냥 버릴 수 없어 가져온 책들이나. 더 나은 삶을 위해 빌니우스로 이민 온 그루지야 인이 모국어로 쓰인 책을 발견하면 마음이 편해 지지 않을까 상상도 해봤다.
나중엔 내가 다 읽은 잡지도 가져다 놓고 나도 재밌는 책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이 도서관 문이 박살나거나 담배 꽁초나 사탕 봉지 따위가 발견되지 않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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