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외부적인 요인으로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해 온 여행을 추억하는것 만으로도 내 인생의 여행은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끔한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동경은 여전히 가슴 아프겠지만 가까스로 기록 되어져서 사라지지 않고 남은 기억들은 더 공고해지고 지난 여행의 의미는 더욱 단단해질것이다. 매년 3월이 되면 빌니우스에 도착하기 전에 거쳤던 곳들에 대한 추억으로 벅차오른다. 당시의 여행 수첩속에 적혀진 음악 리스트들. 엄선해서 구워간 씨디 8장. 6번씨디와 8번씨디를 제일 좋아했었다. 매일 저녁,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오면 숙소에서 울려퍼지던 음악들. 작은 배낭에 적지 않은 자리를 차지했지만 챙겨가길 잘했다 생각했던 스피커. 그리고 모스크바의 인포메이션에서 영어를 못하는 러시아 여인이 그려준 지하철 카드 잔액 확인 기구. 알파벳에 겨우 익숙해진초급 수준의 러시아어로 부랴부랴 떠난 여행이었으니. 설명 해주려고 애를쓰다 결국은 메모지를 찾아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모습이 얼마나 예뻤던지.
모스크바 아가씨의 작은 그림을 수첩에 붙일 수 있었던것은 블라디보스톡의 키오스크에서 풀을 샀기때문이다. 이만하면 되겠지 하고 우표 자리를 남겨두고 엽서를 쓰고 나면 생각보다 큰 우표 탓에 이미 써버린 내용을 가려야 했기에 엽서를 사면 항상 우표를 먼저 붙이고 내용을 적어내려가곤 했었는데. 막상 풀을 사려고 하니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으로 보내는 엽서에 나라 이름을 선명하게 적고 싶었기에 색깔 볼펜도 사고 싶었다. 키오스크 너머로 보이는 풀을 손짓했고 파란 볼펜이라고 어설프게 적어서 보여줬는데. 선량한 블라디보스톡 청년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물건과 함께 단어가 적힌 수첩을 내밀었다. 심지어 내가 사지 않은 검은 볼펜, 빨간 볼펜, 초록 볼펜도. 여행은 나에게 항상 호의적이었다는것. 나는 항상 운이 좋았다는것. 지금의 인생은 나에게 과분하다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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