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에 '주문하지 않은 블랙커피를 덤으로 가져다줬으니 식은 커피 잘 마시는 네가 와서 마시라'는 친구의 메시지를 받았다. 밖에 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상상하며 느릿느릿 주섬주섬 겉옷만 걸치고 나간다. 크리스마스 지나고 몇 번 눈이 녹고 내리기를 반복하더니 제설용 모래를 비롯하여 더러운 먼지들이 제법 씻겨나가서 거리들이 오래된 전화의 보호 필름을 벗겨낸 것처럼 좀 미심쩍게 깔끔하다. 지난주만 해도 거리가 미끄러워서 진짜 긴장하고 걸었어야 했는데 카페까지 금방 걸어갔다.
배가 고파서 샌드위치 하나를 시켜서 반 갈라 먹는다. 이 카페는 사람이 늘 많고 테이블 마다 번호도 적혀있어서 실제로 예약도 가능한데 이렇게 이름이 적혀 있는 경우는 처음 본다. 창문 근처에 놓여 있던 이 명패를(?) 일부러 쓰윽 가져다 놓고 사진을 찍었다. 마치 알렉산드라가 자리까지 예약해 놓고 앉았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마시고 남겨놓은 커피라도 되는 양.
친구는 아마 내가 차가운 커피에 관대하기때문에 결과적으로 따뜻할 때 의도적으로 다 마시지 않는 것이란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프레소는 그것이 따뜻할 때 끝까지 다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커피이다. 하지만 그 조차 차마 끝까지 다 마시지 못하고 일어나기 직전에야 끝까지 들이키게 될 때가 있다. 어쩌면 커피는 어떤 상황에서든 첫 모금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이 커피는 손님이 다 돌아가고 난 후 1/3 정도 채워진채 완벽히 식은 케멕스를 바라보며 그냥 싱크대로 부어 버릴까 5초간 고민한 후 차마 그러지 못해 결국 다시 들이킬때의 기분을 떠올리며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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