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는 나에게 '알지만 모르는 곳'이고 알고 싶은 동시에 잘 모르고 싶은 곳 이기도하다. 알고 싶은 마음을 아주 낮은 고도로 유지하고 있고 그런 마음이 들면 웬만해선 그냥 갈 수 있는 곳이다. 늘 그런 생각으로 가면 그곳은 영원히 영영 모르는 곳이자 항상 가고 싶은 곳으로 남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있다. 모르는 동안엔 모든 것이 다소 더 아름답다. 좋아하는 상태보다는 좋아함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항상 더 우아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단념할 수 있는 것은 휴지심에 반쯤 붙어있는 마지막 휴지 한 칸뿐이었으면 좋겠다.
바르샤바는 그냥 그곳으로 이동하는 것 자체에 어떤 즐거움이 있다. 한없이 폐쇄적인 이 도시가 나에게 늘 열려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냥 지나치기엔 뭔가 아쉬운 위치, 애매모호하면서도 은근슬쩍 고집스럽고 변칙을 허용하지 않는 이들의 인상이 그렇게 대대로 누군가를 자극하고 명분을 만들어준 것은 아닌지 괜한 오지랖에 연민을 느끼다가도 말 옮기기 좋아하는 식당의 폴란드인 직원을 생각하면 또 이중적인 감정에 사로잡힌다.
집에서 버스 터미널이 5분 거리인지라 아침 7시 버스도 큰 부담이 없다. 출근길 정류장 가는 것보다 가깝고 짐은 칫솔과 잠옷 바지 정도이니 출근할 때와 모양새가 똑같다.
아침 일찍 트롤리버스를 타고 출근할 때 혹은 점심을 먹고 이른 퇴근을 할 때 내리기 두세 정거장 쯤 남겨두고 졸음이 절망적으로 밀려올 때가 있다. 그냥 쭉 앉아서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늘 바르샤바행 버스를 떠올린다. 한번 타면 7시간을 안 내릴 수 있으니.
이제는 내려도 좋다 할 때쯤 바르샤바에 도착한다. 창밖의 고만고만한 수목들에 눈이 익숙해질 즈음 스르르 잠에 들고 버스 여행을 위해 아껴뒀던 전자책 한 권을 열어 키득거리다 다시 졸고 여권 검사를 하러 올라 탄 폴란드인들에게 최대한 또렷하고 결백한 눈동자를 보여 준 후 다시 창 밖의 똑같은 나무들로 시선을 옮긴다. 국경을 넘어 모양새가 달라진 단어 몇 개를 머릿속으로 읊조리다 보면 이제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 순간이 온다. 누군가는 음식물을 꺼내느라 부스럭거리고 어떤 이는 먼저 내린 사람이 남겨놓은 자리까지 길게 다리를 뻗어 다시 잠을 청한다. 이른 아침의 정적은 이제 없고 버스는 조금씩 번잡한 시내로 진입하고.
세상에 여러 종류의 자유가 있겠지만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을 때, 타자에 의해 북돋워진 의지로부터 일시적으로 격리될 때, 그리고 다시 되돌아갈 곳이 있을 때에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장거리 버스 안에서 약간 그런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자유에 사로잡히고 그 느낌이 나쁘지 않다.
바르샤바행 버스의 종착역은 바르샤바 서부터미널 정도가 되겠지만 그전에 마리몽트라는 지하철역 근처에서도 세워준다. 버스에서 내려서 익숙한 횡단보도 몇 개를 건너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역을 향한다. 한번 환승해서 바르샤바 대학역에 내리는데 예전 서울집에서 1호선 타고 종로 3가에서 환승해서 광화문에 하차하는 딱 그 정도 거리. 역에서 빠져나오면 세종대왕 대신 코페르니쿠스가 앉아 있고 통신사 대리점 앞의 흔들리는 풍선 인형대신 삐로기 의상을 입고 전단지를 나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들을 뒤로하고 24시간 주류백화점 두 곳을 지나 아는 동네 골목으로 간다.
좁은 도로가 구부러지는 내리막 길 탐카거리. 바르샤바에서 처음 숙박을 했던 동네여서인지 이곳은 나에겐 바르샤바안의 또 다른 바르샤바이다. 벽에 그려진 인물의 출생연도와 사망연도만으로 자연스레 인물의 이력과 바르샤바의 역사가 입력된다. 이름속의 알파벳 배열이 약간 별을 연상하게 하는 어감 탓인지 쏟아져내리는 것은 별빛이고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일 거라 예상한다. 폴란드인들은 민족시인을 사랑하니깐. 바르샤바는 장군 동상보다 시인 동상이 멋있는 곳이니깐.
지난번에 갔었던 외진 거리의 라멘집에 또 갔다. 서빙 직원도 같았다. 내가 먹어 본 유럽의 라멘맛은 거의 비슷하다. 국물 육수를 내다 내다 결국 진하게 내지 못하여 네슬레의 매기 치킨 스톡을 넣는 걸로 타협한듯한 국경을 초월한 맛. 라멘은 아는 맛이었고 식당 근처에는 라멘 속 간장 달걀보다 세배는 큰 왕튤립들이 피어있었다.
배가 어느 정도 부른 채 내려오면 늘 이 장면이다. 우측의 쇼팽 인스티튜트와 좌측의 쇼팽 뮤지엄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쇼팽 음악 학교를 끼고 공원이 펼쳐진다. 횡단보도를 건너 왼쪽으로 내려가면 지브롤터가 있는 스토르 카페.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자브카 편의점.
내려가는 길엔 음반 가게도 있다. 예전에 동네 레코드 샵에 가면 저걸 언제 누가 다사나 싶은 먼지 쌓은 클래식 음반들이 엄청 많았는데 여기에도 그런 지루한 모습의 음반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데카 레이블의 나름 신경 쓴 디자인의 쇼팽 연주곡 시리즈가 진열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피아니스트 임윤찬도 이 레이블에서 쇼팽 에튀드 음반을 냈다. 몇몇 연주자의 쇼팽 연주를 좋아하고 쇼팽 콩쿠르도 언젠가 가보고 싶지만 내가 쇼팽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
올 때마다 성실하게 달라져있는 건물 벽화
계단 따라서 공원으로 올라오면 이런 모습. Bolt 킥보드만 봐선 당장이라도 앱을 켜고 집까지 타고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건물 뒤로 멀리 비스와 강을 가로지르는 하얀 다리도 보인다. 16년 전 바르샤바에 처음 왔을 때 저 다리를 걸어서 건너 바오밥이란 카페에도 갔었는데 이젠 뭐 그렇게 멀리까지 가고 싶을진 모르겠다. 킥보드 타고라면 또 모르겠다.
지난해 바르샤바의 어느 공원에 앉아 개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 때문인지 요샌 공원에서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을 보면 저들은 하루 평균 얼마를 달려야 직성이 풀리는 어떤 성향의 개들 일지 늘 궁금해진다. 저 견주는 뒷모습만 봐선 포레스트 휘태이커가 연기한 고독한 고스트독과 싱크로율 100이지만 사실 아주 앳된 여성이었다. 짐 자무쉬를 만나면 꼭 얘기해주고 싶다. 너의 이 귀여운 영화 제목의 앞글자와 뒷글자를 떼어서 붙이면 그게 고독이라고. 몸이 근질근질한 생김새가 다른 여러 마리의 개가 그녀의 허리에 스스로를 묶은 채 그녀를 끌고 다니고 있었다.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 실제 저런 개를 데리고 다닌 여자였다면 어땠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웃는다.
쇼팽 음악 대학에서 악기 연주 소리도 들리고 성악하는 소리도 들리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오고 민들레도 듬성듬성. 까마귀도 클래식을 듣고 있는 중이고. 나는 또 여기에 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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