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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바그다드 카페 Bagdad cafe> 퍼시 애들론 (1987)

 

 

<바그다드 카페>

 


트렁크와 함께 단 둘이 남겨진 주인공들에 본능적으로 끌린다. 그들이 방황하는곳은 캘리포니아 사막 한가운데일수도 있고 '아프리카'라는 이름의 카페일수도 있다.(그린카드) 때로는 프로레슬링 체육관 앞을 서성이기도 하고(반칙왕) 전설의 명검을 지닌채로 강호를 떠돌기도 한다.(와호장룡) 혼자인것에 익숙하고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그들을 무의식중에 동경하는 내가 가끔은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외톨이 같은 그들과 함께 고독의 미학을 깨달아가는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과제라는 생각이 가끔 든다. 혼자라는것의 정의는 과연 누가 어떤 단어로 내려줄 수 있는걸까. 그것이 100퍼센트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독에 대해 얘기하는것은 엄청난 모순이 아닌가. 마치 설탕이 단지 쓴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충치의 고통에 대해 논하는것처럼 말이다.


 

 

 


현미경을 통해 작은 물체를 확대해서 볼 수 있는것처럼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세배속 쯤 늦춰서 볼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어떨까. 기쁨에 환호하는 우리의 얼굴을 잘게 분쇄하면 중간중간 멈춰진 화면속에서 오히려 슬픈 눈동자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고 슬픈 우리들의 좌절감은 마치 이미 옛일이 되버린듯 아련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화가 나서 격앙된 목소리는 음소거된채로 우스꽝스러운 시트콤 속 주인공들처럼 허공에 팔만 휘둘러대고 있을지도. 감정이 표정과 어조가 아닌 속도로 표현될 수 있는것이라면 지금 내 감정의 속도는 어느정도일까. 분노의 감정은 초음속비행기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기쁨의 감정이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는 링거속의 포도당처럼 영원의 속도로 흐른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덜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트렁크와 함께 내던져지다시피해서 낯선 사막 한가운데를 우두커니 걸어가는 쟈스민. 가슴속에서 참고 썩혀왔던 곪을대로 곪은 고름이 터진걸까. 마치 헤어짐을 기약하고 떠난듯한 여행은 시작과 함께 끝이 나고 그녀만의 예기치 않은 여행이 시작된다. 초라한 바그다드 카페에서 각자의 구석을 차지하고 자신만의 소일거리를 일삼으며 살아가는 장기투숙자들의 이야기. 다소 퉁명스럽고 권위적인 하숙집 아줌마 브랜다와 엄마의 핀잔에 굴하지 않고 주구장창 바흐의 평균율을 연주하는 아들. 특유의 생명력으로 바그다드 카페에 생기를 불어넣는 쟈스민과 그녀의 커피머신에 익숙해져가는 사람들. 그리고 모두들 혼자임을 잊고 서로에 동화되어갈때 돌연 카페를 떠나는 데비. 바그다드카페는 그들의 쓸쓸한 감정이 잠시 머물다가는 감정의 섬같은 곳이었다. 허공에 내던져진 부메랑이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듯이 누군가는 되돌아오지만 누군가는 떠난다.

 


 


함께 있어도 행복하지 않을때 우리는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더이상 행복해 하지 않는 상대를 봤을때 내 감정과는 상관없이 그 사랑에는 사형선고를 내려야한다. 속된말로 둘이 못잡아먹어서 안달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할퀴며 헤어지는 상황에서도 그 싸움의 승자는 없다. 하나의 질서안에서 함께 머물다 누구 하나가 그 테두리를 벗어나려고 시도할때 모두가 함께 상처를 입는다. 아예 아무런 질서가 없는 세상은 어떨까. 모두가 그 테두리안에서 자유를 느끼고 함께여도 혼자임을 만끽할 수 있다면. 카페 안에서 함께 머물다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서 오롯이 자신의 세계를 연장해 갈 수 있다면. 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쟈스민보다는 까칠한 성격을 버리고 주변의 소중함을 깨달아가는 브랜다와 그렇게 물렁해진 브랜다의 곁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남편보다는 더이상 고독이 부자연스러워졌다고 느끼며 미련없이 떠나는 데비의 마음이 훨씬 와 닿았다.

 




 

서울에는 장사가 안되서 폐업을 해도 폐업처리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철거되지 않고 남아있는 주유소들이 많다고한다.돌보는 사람 아무도 없이 그냥 마지못해 서있는듯한 석유탱크와 불안하게 앉아서 걸레질을 하는 쟈스민. 떠나지 못해서 남아있는 사람들과 버리지 못해서 우리가 가져가는 삶이 떠올라서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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