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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사랑도 통역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 소피아 코폴라 (2003)

 

 

<Lost in translation>

 

24시간을 초단위로 잘개 쪼개어서 그 하루를 온전히 투자해

매순간 머릿속을 파고드는 단어와 소리, 이미지들을 빠짐없이 기록해 나가야한다면 어떨까.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굴리는 그것은 어쩌면 상상을 기반으로 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유에 가까운것일지도 모른다.

집밖을 나서서 내가 마주치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단어와 섞이는 나의 단어를 포착하고

그들의 눈빛과 감정에 부딪힌 후 돌아오는 나의 오감들을 내 감정의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가는것은 단순한 사유와는 좀 다르다.

각기 다른 감정들을 비슷한 색깔로 분류하고 적정량의 놈들이 모여졌을때 서랍장 입구에 견출지를 붙이는것.

서랍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의 감정을 담아내지 못할때 우리의 감정은 세분화되고 서랍의 개수는 늘어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어떤 음악들을 떠올리고 어떤 영화들을 떠올린다.

영화와 음악은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감정의 서랍이고 그곳에서 표출되는 이미지와 사고들은

내가 처해진 상황과 운명이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에 대한 또 다른 인식과 공감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자신의 판타지와 영감을 세상밖으로 표현해내지 못해 안달인 세상의 모든 감독들과 뮤지션 덕분에

우리의 감정분류작업은 그나마 수월한것인지도 모르겠다.

 

 

 

몇주전부터 이 영화가 미치도록 다시 보고 싶어졌는데 왜인지 쉽사리 디브이디에 손이 가질 않았다.

왠지 영화를 보고나면  겉잡을 수 없이 주인공들의 감정에 빠져버릴것만도 같고 

낯선곳으로 혼자 훌쩍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들까 두렵기도 하고

영화의 오묘한 해피엔딩 아닌 해피엔딩이 나에게 오히려 절망적으로 다가오면 어쩌지 걱정이 됐다.

그렇게 주저주저하다가 참지 못하고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몇번 돌려듣고 영화를 다시 보았을때의 느낌은 그랬다.

 My bloody valentine 의 sometimes 라는 자궁속에서 태어난 각기 다른 음표들이 

마치 케빈쉴즈의 지휘 아래 정처없이 부유하는 느낌이랄까. 

잠깐 딴 얘기를 하자면 영화를 보며 캡쳐한 이 사진들을 올려놓고 거의 20일째 이 글을 쓰고 있다.

 하루에 한 줄 씩. 머릿속에서 늘어져 오선지를 이탈하는 케빈쉴즈의 음표들을 힘겹게 붙들어 놓으면서

흩어지는 단어들과 함께 조그만 실에 매달아 날려보내는 기분으로.

조금씩 저마다 외로운 우리들은 묶여지고 싶은 자신의 실을 찾아 평생을 헤매는것일지도 모르겠다.

we are flying to somewhere with red ballons.

and we are floating with them till they disappear in the sky.

 

 

우리를 괴롭히는것은 명백히 '질문'들이다.

우리는 질문이라는 바이러스에 철저하게 감염되었고 그로인해 자유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쏟아부어지는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해야할지에 대해 하루의 절반을 고민하고

누군가의 질문에 대해 이미 내뱉은 대답을 후회하는데에 나머지 반의 절반을 쓰고

상대를 만족시킬수 없는 대답을 해야한다는것에 절망하는데에 다시 남은 반의 절반을 소모하며 

최종적으로 내 기대와는 다른 대답을 늘어놓는 상대방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실망하며 

점점 자기속으로 고립되어간다.

 

 

우리는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헤어스타일 새로운 립스틱을 바르며 그 고립감에서 벗어날수 있을거라고

오늘도 어제처럼 그리고 내일처럼 습관적으로 기대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언어들은 자신만의 사전속에서 제멋대로 정의된지 이미 오래.

우리가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끌어안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의 손가락은 힘겹게 자신만의 사전을 넘기며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영원히 번역되어질 수 없는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니깐.

 

 

정작 길 위에서 우리가 길을 잃을 수 없다는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절망적이다.

우리는 사라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세상이 표시해 놓은 좌표위에서 그저 방황할 뿐

꺽어질듯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늦가을 우울한 나뭇가지처럼

송곳같은 이끼로 뒤덮여 처절하게 미끄러질 누군가를 기다리는 냇가의 바위처럼

내려줄듯 내려지지 않는 비로 누군가를 불안하게 하는 잿빛하늘처럼

우리가 지각하는 물리적인 세상은 우리가 부대끼는 감정도 단지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야한다고 강요한다.

그래. 어쩌면 우리도 언젠가는 익숙해질지도 몰라.

시간이 무한으로 흐름에도 달력이 그어놓은 점선을 따라 영원히 우리가 증오해야할 월요일의 아침 공기처럼.

 

 

 

멀리 일본까지 카펫의 샘플을 보내는 아내도

자신의 생일을 잊은 아빠에 익숙해지는 아들도

과장된 몸짓으로 인터뷰에 응하는 여배우도

급한 키스를 남기고 도망치듯 호텔방을 빠져나가는 남편도

멀리서 걸려오는 전화에 집중할 수 없는 친구도

이 영화속의 등장인물들처럼

우리를 혼자라고 느끼게 하는 그 누구도 가해자는 아니다.

모두가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세상, 그 외로움이라는 링위에서 동점이 되는길은 우리 모두 유죄라고 인정하는 것.

우리 모두 조금씩은 누군가를 텅 빈 방 한구석에 쓸쓸하게 세워두고 있으니깐.

 

 

그만 써야겠다.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는 이 영화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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