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전자책 구입기를 쓰려는것은 절대 아니지만
나의 미니미 스마트 폰으로도 이 정도 크기의 글자로 적힌 책을 읽을 수 있다니 기분은 좋다.
생각해보니 난 절대 독서광은 아니다.
어릴때 그나마 읽은 고전들은 초중생들을 상대로 쉽게 편집된것들이 많았고
그나마 작품명과 작가명 등장 인물들은 나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줄거리도 감상도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도 책을 읽고 싶다는 (정확히 말하면 책을 많이 읽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때가 또렷하게 기억난다.
바로 6학년때 우리 반의 어떤 남자 아이가 감동적으로 읽은 책을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라고 했을때.
선생님께서는 '그 책은 너가 읽기에는 아직 어려운 책이지 않을까' 라며 놀라셨을때 였다.
난 그 남학생이 나름 멋있었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물론 그 유리알 유희는 아직 읽지 않았다.
가끔 정독 도서관에 들르면 무슨 책벌레라도 되는냥 집까지 낑낑거리며 대여섯권의 책을 빌려오곤 했는데
그나마도 기간내에 읽지못하고 반납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난 서점 한 구석에 틀어박혀 책 한권을 그 자리에서 해치워 버리거나 밤을 꼴딱 새서 책을 읽을 만한 집중력도 없다.
책은 어쩌면 읽는 족족 마음의 양식만은 될 수 없는 철저한 소비재인것 같다.
모두가 독서광이 되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닌것도 같다.
이렇게 딴지를 거는 이유는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의 줄거리를 물었을 때 할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의 일종의 앙탈이다.
근데 이렇게 멀리 살게되니 한글로 쓰여진 책을 읽을 기회 자체가 없다.
내가 한글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철저히 언어 구사 때문이다.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최신 국어 사전을 하나 사서 그냥 사전을 외우는것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문장에서 새롭게 접하는 단어들이 없다보니 내가 구사하는 단어들이 너무 제한되어있고
덩달아 내가 이곳에서 사용해야 할 언어에도 한계가 오는 느낌이다.
어쩔땐 여기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에 적합한 한국어 단어를 모를때도 있으니 말이다.
책을 헌책방에서라도 싸게 구입해서 우편으로 받아서 읽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그런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 그냥 읽지 않게 된다.
전자책이란것이 있었지만 그것에 접근하기까지의 과정은 뭐랄까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서점에 가입하고 다운을 받고 앱을 설치하고 결제 과정이 번거롭지 않을까 지레 겁을 먹고
그렇게 계속 미루다가 나도 드디어 전자책이란것을 구입하게 되었다.
여러 여행사에서 주기적으로 메일이 온다.
보통은 저가 항공사의 싼 비행기 티켓 광고인데.
보통은 원웨이 티켓이거나 체류기간이 너무 길거나 날짜가 맞지 않아서 그냥 그런가보다 차라리 다행이다하고 무시해 버리는데
어제는 거의 5만원 짜리 4일 오픈 베르겐(Bergen) 왕복 티켓이 떠서 충동적으로 구매해 버렸다.
예약 버튼을 누르는 순간엔 노르웨이 물가가 비싸다는것은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어쩌면 난 4일동안 비행기 티켓의 몇십배가 되는 돈을 왕창 써버리고 피요르드 근처에서 떠돌이 거지가 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4일 여행이라지만 떠나기 전에 론니 플래닛을 구입 하는 ritual 을 포기할 수 없어서
혹시 시티 가이드로 베르겐편만 따로 있을까 싶어 론니 플래닛 공식 사이트 (www.lonelyplanet.com)에 들어가 보았다.
때마침 이웃나라 스웨덴의 오로라가 사이트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론니 플래닛은 여행 서적이라기 보다는 여행 사전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객관적이고 방대한 정보로 가득차있지만 사실 내가 이 책에서 얻는 정보는 정말 한정적이다.
그야말로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가끔 찾아보는 사전이고
여행에서 따로 사오는 물건도 없으니 몇 장의 엽서와 함께 내 여행의 흔적으로 남는 souvenir 라고 할 수 있다.
론니 플래닛도 전자책으로 발간된다는것은 나름 충격적이었다.
이것은 어쩌면 문명의 진보라기보다는 뒷간에 앉아서도 구글 검색을 할 수 있고
길을 잃더라도 구글 맵스속에서 어슬렁거릴 수 있는 요즘 세상에 맞서는 론니의 슬픈 발악일지도 모른다.
검색창에 베르겐을 입력하니 베르겐과 남서 피요르드 편을 바로 지정해서 보여준다.
게다가 필요한 챕터만 부분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서비스까지.
얼굴만한 탭이나 아이패드 같은것을 가진 사람이라면 뭐 론니 플래닛도 전자서적으로 구입해도 큰 지장은 없겠지만
난 슈니첼만큼 얇고 큰 기기를 가진다고해도 론니 플래닛이 인쇄되는 한 전자책으로 구입할 일은 없을것 같다.
그리하여 난 오늘 론니 플래닛 노르웨이편을 구입했고 기념으로 일일 바리스타가 되었다.
우유 거품위에 블랙커런트 시럽으로 그려 본 알파벳.
항상 어떻게 발음해야 할 지 궁금했던 저 노르웨이 알파벳이 eu 로 발음 된다는것을 알게되었다.
첫번째로 알게 된 단어는 바로 øl (eul) 맥주이다.
잠깐 훑어본 소감은 이렇다. 당장 카우치서핑에서 무료로 재워 줄 사람들을 물색해봐야겠다.
체류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이미 구입한 티켓은 쓰레기 통 뒤지는 고양이한테나 줘버리고 여행은 떠나지도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론니 플래닛이 내곁에 남는다는것은 분명한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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