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떠나기 전전날. 월요일.
베르사유를 방문하겠다는 계획으로 와인이며 도너츠며 사단 도시락까지 바리바리 싸서 집을 나섰지만
Gare d'Austerlitz 역 RER 창구의 매우 친절한 직원이 '월요일엔 베르사유에 가도 아무것도 볼 수 없단다' 라고 말해 주었다.
파리에서 고작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베르사유 였지만 파리 시내를 잰걸음으로 걷는데 익숙해진 나머지
그곳은 TGV 쯤은 타야 도착 할 수 있는,작은 숙녀 링이 앤드류스를 타고 뛰어 놀던 만화 속 영지처럼 아주 아득하게 느껴졌고
누군가의 염원이기도 한 베르사유라는 목적지에 마지막 날까지 다다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피로가 급습했다.
떠나는 날 당일 아침에 노트르담 성당을 오르는 대작전이 펼쳐질 줄은 꿈에도 모른채
크레페나 먹으면서 여유롭게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 하겠다는 계획이 이미 틀어져 버린데 실망했던 것이다.
결국 베르사유는 다음 날 가기로 했고 역을 나와 센느 강변의 이탈리아 지구를 걷기 시작했다.
파리에 최소한 반년간이라도 느긋한 마음으로 머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걸어서든 velib나 메트로 같은 교통 수단을 이용하든 파리 시내의 모든 지하철 역을 던젼으로 지정하고
역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나 서점 혹은 교회를 퀘스트로 해서 나만의 파리 지도를 만드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 미션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딱 그 정도의 기간만이라도 여유롭게 머물고 싶다.
여행 내내 서점이나 만화책 가게, 미니어쳐 게임샵 처럼 자잘한 피규어들이 파는 가게들이 눈에 띌때마다 들어가곤 했다.
봉준호의 팬도 아니고 설국열차를 보지도 않았고 별 흥미도 없는데 그 원작 만화책을 사야 한다는 뜬금없는 목적을 지니고
서점에 들어설때마다 황급하게 에버노트를 열어서 발음할 수 없는 불어 만화 제목을 직원들 얼굴에 들이밀곤 했던 추억.
그리고 베르사유를 가지 못한 그날 판테온 Pantheon 과 룩셈부르크 정원 Jardin du Luxembourg 중간 쯤의
만화책 가게에서 발견한 데어데블.
마블의 모든 슈퍼 히어로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데어데블은 내가 마블의 영웅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이다.
특히 비가 내릴때 그의 눈에 비치는 불완전하지만 완벽한 엘렉트라의 모습은
기계 오작동으로 형체를 잃어가지만 쇠락해가는 알 파치노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버린 시몬을 떠올리게 해서 더욱 애틋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데어 데블의 얼굴에 멋있게 탱고를 추던 <여인의 향기>속의 맹인 장교 프랭크가 오버랩 되곤한다.
어찌보면 참으로 불완전하고 빈틈 많은 영웅.
시각을 잃어서 다른 모든 감각이 발달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발달된 청각은 물을 채운 관속에서 귀를 담그고 자야 할 만큼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된다.
사랑하는 엘렉트라도 결국 지키지 못하는 영웅.
매번 곤경에 빠진 연인을 구해내고는 새로운 옷으로 재빠르게 갈아입고 나타나는 거짓말 같은 영웅이 아닌
아주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자신이 구하려 했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고 마는.
그래서 엘렉트라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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