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렴한 비행기 티켓덕에 매우 충동적으로 계획한 베르겐 여행.
여행전부터 왠지 이 여행이 몹시 마음에 들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 짐은 초등학교 시절 토요일 책가방 정도의 무게였고 머물곳은 순조롭게 정해졌으며
두달 여의 시간동안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빌니우스와 베르겐의 날씨를 번갈아 확인하면서
내가 좀 더 북쪽으로 하지만 조금 더 따뜻한 곳을 향한다는 생각이 들자 미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큰 아버지와 큰 고모가 살고 계시는 강원도 양양과 경상도 통영의 정서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기대도 있었다.
물에 빠졌거나 배멀미를 한 기억 때문에 바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던 장소들이지만
어찌보면 내가 아무런 편견없이 가장 처음으로 바다를 접했던 곳도 그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리워 할 만한 바닷가 도시 하나 정도 더 가져야 한다는 일종의 목표의식도 생겨났다.
뜨거운 홍차가 담긴 보온병과 두터운 다크 초콜릿 한 블럭을 챙겨 넣고 편히 걷자는 생각으로 오르기 시작한 베르겐의 뒷산들.
500미터에서 800미터 가량의 높지 않은 산들이었지만 베르겐 전체는 하이킹 코스라고 불러도 무리없는 도시였다.
이 계단식 지형의 도시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밀착된 조깅복을 입고 이어폰을 꽂고 달리는 베르겐 시민을 만날 수 있다.
일기 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하면 비가 내리지만 해가 난다고 해도 비가 온다는 베르겐의 우스갯 소리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산에 오른 그 날은 운이 좋게도 베르겐에 해가 났다. 코트를 걸치긴 했지만 옷을 적게 입었어도 춥지 않아서 좋았다.
호수 앞에 놓여진 거의 모든 벤치에 앉아 쉬어가며 게으름을 부리던 우리가
Rundemanen 이라는 이정표를 본 것은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입에 쉽게 달라 붙지 않는 여타 노르웨이어 지명과 달리 한번에 뇌리에 새겨진 이 룬데마넨을 왠지 꼭 올라야 할 것 같았다.
베르겐의 산들은 전투적인 등산을 요구하는 복잡한 지형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지리산 종주처럼 원정대의 기분으로 천천히 오르기보다는 뒷산을 오르듯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등산객들이 많았다.
곳곳에 아직 채 녹지 않은 얼음이 나타나고 어느 순간부터는 조명도 사라지고 바람 소리가 거세지자 약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Fare for isnedfall. '떨어지는 얼음주의' 정도의 의미 같은데
룬데마넨 정상 근처에서 버려진 송신탑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거대한 철 구조물과 위험 표지판을 마주쳤을때
마치 체르노빌에 남겨진 방사능처럼 폐기된 송신탑의 전자파에 오염되고 있다는 비논리적이고도 맹목적인 공포감이 엄습했다.
과연 공포감이라는것은 단지 높이나 거대함에서 오는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둠속에 자취를 감춘 자연에 압도당했었음과 동시에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에 절대적인 공포를 느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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