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ore>
'나이 들어도'라는 속좁은 수식어는 덧붙이지 말자.
90년대 헐리우드 여배우 이미지를 지녔지만 파니 아르당 같은 프랑스 여배우의 우아함도 지닌 아름다운 로빈 라이트이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교보문고에 수입 오리지널 영화 포스터를 파는 코너가 있었다.
중학생에게 수입 포스터들은 너무 비쌌고 아쉬운대로 한 두장씩 사오곤 했던게 바로 포스터 근처에 놓여진 영화 엽서였는데
실제 영화 포스터보다 훨씬 감각적이고 강렬했으며 마치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한 장처럼 완전 오리지널 분위기를 풍겼다.
개인 소장품으로 회고전에 대여된 옛날 한국 영화의 포스터들처럼 혹은 밀러 맥주에 붙어있는 Genuine draft 표기처럼 말이다.
비닐도 채 벗겨지지 않은채 서랍속에 쌓여갔던 나의 엽서들은 누구에게로 보내졌는지 한 장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 추억의 엽서들 중 내가 보지 못한 유일한 영화는 아마 로빈 라이트의 <She's so lovely> 였던것 같다.
그동안 적지 않은 숀펜의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아직 보지 못한 이 영화는 로빈 라이트에 대해 처음 알게된 영화이기도 했다.
이 엽서에서 받은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영화에 대한 기대감도 완전 최고치에 달해 있었던것이 사실인데
<Adore> 의 성숙해진 로빈 라이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정말 지금이라도 꼭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릴을 연기한 나오미 왓츠는 여성적이고 아름답지만 언제나처럼 불안정하고 확신을 잃은 눈빛이다.
마음에서 진심 우러나오는 소박하고 따뜻한 미소를 가진 누군가를 그녀가 연기할 날이 올까?
잭 블랙이나 벤 스틸러 같은 상대 배우를 만나지 않는 이상은 왠지 불가능할 것 같다. 하하.
티비속에서 기어나오는 귀신부터 방콕의 쓰나미까지. 계란을 구걸하는 악당들부터 가족을 잃고 혼자 남겨진 절망감까지
그녀를 괴롭혔던 모든 종류의 고통과 공포들이 그대로 새겨진듯한 눈빛.
그녀가 처해있던 상황들은 주변 인물들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던 절대적인 고립무원의 상태인 경우가 많았는데
<Adore>속의 릴은 그나마 (영화 줄거리를 생각하면 아이러니컬 하지만) 그녀의 배역 중 가장 편안해진 인물인것 같다.
평범한 우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끈끈한 릴과 로즈의 관계는 그녀들의 상반된 겉모습이 더해져서 궁금함을 불러일으키고
남편을 잃고 아들과 홀로 남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절대적인 조력자가 되어주는 로즈(로빈 라이트)는
실제로 나오미 왓츠가 출연했던 지금까지의 영화 속에서 그녀가 가장 마음놓고 의지할 수 있는 인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가장 절망적인 순간 서로에게 의지하며 더 큰 파국으로 치닫던 <21그램>속의 숀 펜이 로빈 라잇의 전남편이라는
영화 밖의 사실은 재미있게도 이 영화에 빠져드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부부가 살면서 비슷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공통된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기 때문이라고 어느 건축가가 그랬다.
어른이 되어서 각자의 가정을 꾸리지만 어릴때 함께 나고 자라난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는 릴과 로즈.
똑같은 환경에서 자신들의 엄마가 그랬던것처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절친한 친구로 자라나는 이안과 톰.
건장하게 자라나는 자신들의 아이를 보며 릴과 로즈는 모성애조차 공유한다.
바다로 헤엄쳐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어른으로 바뀌는 장면이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고
서핑 후에 집으로 돌아와 몸을 헹구는 이안과 톰의 모습이 의도적으로 부각된다.
우리가 빚어 낸 뜻밖의 작품,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처럼 멋진 모습으로 자라난 아이들에게 엄마들이 보내는 찬사와
신화 속 인물 같은 조각 미남들이 서로의 엄마에게 빠져드는 과정은
단순한 끌림,사랑의 감정이라기 보다는 영화의 원제처럼 절대적인 흠모에 가깝다.
이안과 톰은 각자 결혼해서 딸까지 낳지만 할머니가 된 릴과 로즈는 비현실적으로 늙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일부러라도 그들을 나이든 모습으로 분장하거나 하지 않는다.
투명한 바다와 탁트인 지평선, 그들에게만 허용된 지상의 낙원에서
늙지 않는 아프로디테가 소년 아도니스를 사랑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프로디테의 성역을 넘은 사랑들은 신들의 분노를 자초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미의 여신으로 남는다.
톰과 이안의 어린 아내들은 젊은 그녀들을 질투한다. 그것은 결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기싸움이 아니다.
이들 모두는 스스로 '우리는 이미 선을 넘었어' 라고 말하지만 그들 모두가 낙원으로 돌아왔을때 모든것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상처받은 아내들이 자식들과 함께 떠나가지만 그들은 그런 '인간'의 분노에도 대응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기위해 낙원을 떠나가거나 하는 '인간'의 실수를 범하지도 않는다.
파도는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지만 그들은 항상 잔잔한 바다 위 따스한 태양 아래에서 함께 부유한다.
거센 파도가 몰아치던 밤 서핑보드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친 이안이 재활중에 한나와 가까워져 결혼을 하면서
그들은 잠시 거스를 수 없는 인륜이란것을 받아들이지만 결국은 모두를 배반한다.
영화의 배경이 산이였던가 대도시였더라면 이들 모두의 관계는 성립 불가능했거나
단순한 불륜 그 이상으로 묘사될 수 없었을것이다..
낙원을 벗어날 명분이 그들에게는 없다.
영화를 보다보면 아마도 여성 감독의 작품이 아닐까 하고 의문을 품어 볼 수도 있는데
실제로 감독이 여성이란것을 알고나면 어쩔수 없이 여성감독의 여성영화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영화를 보게 된다.
이 영화가 친구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여성들의 이야기 대신 친구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남성의 이야기였더라면
일부 남성들은 그것이 욕정과 불륜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는 현실에 분노할지도 모른다.
나이들었지만 젊고 매력있는 여성들의 사랑이 너무 로맨틱하게 묘사되었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릴과 로즈는 애초부터 자신들의 사랑을 인정받거나 합리화시킬 의지가 전혀 없었다.
- 지금 이 상황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니?
- 좋아.
- 나도. 솔직히 이렇게 행복했던적이 없어.
- 이해해.
- 솔직히 두려워
- 무척.
- 하지만 끝내고 싶지 않아.
상처받을 것을 미리 두려워하지 않고 조그만 풀장같은 자신들의 낙원에서
자신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들을 비난 할 이유가 있을까.
그들은 비록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었지만 그것은 어떤식으로든지 누군가에게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인간'의 운명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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