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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huanian Language

리투아니아어 124_Valerijonas 쥐오줌풀



 

얼마 전에 십자가 언덕이 있는 리투아니아의 북부도시 샤울레이에 갔었다. 50년이 넘은 약국을 겸하고 있는 식당에 들렀는데 가게이름에서부터 포스가 느껴졌다.

발레리요나스 Valerijonas.

수많은 약초 중에 발레리요나스가 굳이 가게 이름이 된 이유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타임이나 카렌듈라, 캐모마일 같은 흔한 아이들은 당당하게 '약초 찻집 Vaistažolių arbatinė'을 지향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았겠단 생각은 들었다. 발레리요나스는 일상적으로 마시는 허브차들에 비해선 그 성격과 효능이 아주 확실한 약초이고 그런 약초들 틈에선 또 비교적 대중적이다.
 
약국에 가면 발레리요나스가 들어간 약품들을 쉽게 살 수 있다. 5년 전 환으로된 발레리요나스를 병원에서 딱 한번 먹은 적이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지고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건너편 침대에 누워있던 여인이 웃으면서 '발레리요나스'라고 알려주었다. 나만 빼고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뭔가를 알게 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상 난 정상 컨디션이었지만  입원 환자였으니 으레 그냥 누운 김에 푹 쉬라는 의미로 줬던 것 같다. 그 몽롱해지는 느낌이 딱히 유쾌하진 않았다.

발레리요나스에는 세로토닌의 양을 조절하는 성분이 있기 때문에 불면증에는 물론 불안이나 스트레스를 줄이는데도 좋다고한다. 환, 알약, 액상, 차 등 그 형태도 다양하다. 가격도 비싸지 않다. 대략 네다섯 종류의 허브는 집에 두고 먹는 리투아니아 가정에서도 흔한 약초이다. 

뿌리에서 쥐오줌 냄새가 나서 한국에서는 쥐오줌풀, 길초근 으로 불린단다. 쥐오줌 냄새는 물론 발레리요나스의 뿌리 냄새도 맡아본 적이 없으니 구체적으로 어떤 냄새인지는 모르겠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악마의 수염이란 별칭이 있다.

 

연초에 불가코프의 '조이카의 아파트' 연극을 재밌게 봤다. 러시아어 대사들이 길어질수록 알아듣기 힘드니 때맞춰 고개를 들어 자막을 보는 것이 상당히 피곤한데 그나마 객석에서 웃음이 나오는 부분들은 비교적 쉬운 언어이기도 하고 결국 비슷한 문화 속의 유머들이라 흐름을 잘 따라가면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다.

연극 1막에서 오볼리야니노프가 비실거리면서 등장하는데 그때 나오는 단어 하나가 마치 배구 경기의 예상치 못한 백어택처럼 세 번 귀에 꽂혔다. 오볼리야니노프와 조야의 대화에서 모두가 웃었다.


조야 - 누우세요. 발레리아나를 드릴게요. 아니면 와인?
오블리야니노프 -빌어먹을 와인과 발레리아나! 그깟 발레리아나가 나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

 

러시아어에서는 이 약초를 학명 그대로  '발레리아나 Валерианa'라고 하고 원문에선 다시 지소체를 썼다. 이 부분이 한국어로 어떻게 나왔을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한 출판사에서는 '신경안정제'로 번역을 했다. 번역자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쥐오줌풀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을것 같고 먹으면 신경 안정제 역할을 하는 게 맞으니 사실 틀린말은 아니다. 어쩌면 원어를 그대로 옮기고 그냥 주석을 달았어도 좋았을 것 같다. 그래도 발레리안까라는 단어 하나가 웃음을 유발했다면 약초로서의 기능을 넘어서  21세기 빌니우스 사람들과 100년 전 모스크바의 조야 사이에 비슷한 추억과 기억이 있을테니깐.

집 앞이 사거리여서 그런지 교통사고가 자주 난다. 다행히 아직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가끔 쾅하는 소리가 나서 창가에 가보면 얼마 후 운전석과 조수석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느릿느릿 걸어 나온다. 구급차나 경찰들이 도착할때까지 사고 당사자들끼리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한번도 화내고 언성 높이는걸 못봤다. 아무런 내상 없이 무사하길 바라고 있자면 옆에서 이런 농담이 들려온다.

'괜찮아. 발레리요나스가 있을 테니깐'
 
교통사고가 났는데 웃을일은 아니지만 운전자들이 스스로 걸을 수 있었다면 발레리요나스 정도만 먹어도 금방 안정을 취할 수 있을 거라는 안도의 의미이다. 좀 더 들어가면 옛 소련 국가에 팽배한 '발레리요나스 만능주의'에 대한 냉소이자 이 귀여운 '신경 안정제'에 대한 뿌리치기 힘든 애정이기도 하다. 

오블리야니노프와 조야가 살았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발레리요나스는 오랜 시간 전해져서 내려오는 민간 신앙처럼 부엌의 정령이 되어 부엌 찬장 어딘가에 숨어있다. 오블리야니노프는 약초 따위로는 진정시킬 수 없이 상태였는지 모르지만 발레리안까는 조야가 그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의 보살핌이었거다.

문제 해결의 상황에서 신통한 대안이 없어서 그저 가진 것에 기대어 상황을 모면해야 할 때가 있다. 이따금 그런 꼼수와 방법들은 되려 정공법이 되어 시공간을 초월해 방구석 전설이 된다. 자잘한 고통과 부당함은 알아도 모른 척 지나가야 했던 시절을 거쳐온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기억하고 의지했을 존재, 찻집에 걸린 액자 속 발레리요나스가 그저 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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