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하고 깔끔하고 이런 영화는 귀여워서 그냥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지. 하루에 십분씩이라도 보면 그냥 짧은 유머를 읽은 듯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영화이다. 작년 즈음 베를린 카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흐릿해져가는 베를린의 기억을 간신히 붙잡고 있을 무렵에 기적처럼 나타난 영화. 흑백 영화인데다가 제목에 커피까지 들어가니 자연스레 짐 자무쉬의 <커피와 담배>가 생각나지만 기본적인 컨셉은 확연히 다르다. <커피와 담배>가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커피잔들을 프레임 한 가운데에 모셔다 놓고 세상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그나마 아낌없이 허락되는 것은 커피와 담배, 수다뿐이라는 자세로 마시고 또 마시며 영양가없는 이야기들을 진지한 표정으로 나누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이 영화는 그 흔한 커피 한 잔이 허락되지 않는 어느 독일 청년의 우울한 하루에 관한 이야기이다.
방황하는 젊은 청년들의 로드 무비라는 것, 영화 전반에 걸쳐 무심하게 흐르는 재즈라든가 달콤한 낮잠이라도 한 잠 자야할 것 같은 나른함으로 충만한 도시 풍경들이 정지된 장면처럼 곳곳에 배치한 구성들은 자무쉬의 또 다른 영화 <영원한 휴가>와도 쏙 닮았다. 하지만 건방진 목소리로 당당하게 자신의 개똥철학을 피력하던 나사 풀린 방랑자, 영원한 휴가의 앨리와는 다르게 니코는 단지 무기력하며 한 방울의 유머도 없이 잔뜩 경직되어 있다. 금방이라도 커피와 담배 속의 등장인물들이 나타나서 심각한 표정의 니코의 어깨를 툭치며 좀 웃어라 라고 말하고 지나갈 것 만 같다.
영화 중간 중간 나오는 이런 베를린 풍경들이 참 좋았다. 지하철 구석구석 나뒹굴던 맥주병들, 오백년 전 것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 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던 전단 광고들. 차양없는 테이블 위에 놓여져서 데워지고 있던 태국 음식점의 칠리소스들, 뭔가 그런 풍경들을 가르고 니코들이 지나갈 것 만 같다. 베를린의 니코는 음주 운전으로 면허는 중지됐고 학교를 때려치고도 꼬박꼬박 학비를 받아온 것이 탄로나서 부모로부터의 재정적 지원도 끊긴다. 여자 친구랑도 헤어진 것 같다. 그렇다고 딱히 원망할 대상을 찾을 수도 없는 니코의 모든 불운한 개인 사정, 그런 사정을 생각하면 커피 한 잔 따위 마실 수 없는 것이 그다지 큰 불운인가도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보잘 것 없는 커피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닌지 반문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베를린에서 많은 커피를 즐겁게 마실 수 있었다, 생뚱맞게 나부끼던 꽃가루들과 함께 그저 따사로웠다. 그때 난 걱정이 없던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걱정들은 그냥 뒤로 미뤄두고 있었던걸까. 어쩌면 그것은 카페인의 힘이었을까.
아침 카페에 갔더니 동전이 모자라서 커피를 살 수 없고 돈을 뽑으려는데 현급 지급기가 지불불능을 선언하며 카드를 먹어버리며 어떤 식당에서는 커피 기계가 망가졌다고 하며 골프장에서 만난 아빠는 오후에 무슨 커피냐며 대신 보드카를 주문해주고 친구 따라 놀러 간 영화 촬영 현장의 스탭용 커피 주전자는 텅 비어있고 니코가 뒤를 돌아서자 마자 스탭이 새 커피 주전자를 가져다 놓는 식이며 병원의 커피 자판기는 물론 고장이 나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벌어지기 전 아주 이른 아침, 옷을 주섬주섬 입고 집을 나서려는 니코에게 여자 친구가 묻는다. '커피 마시고 갈래?' 니코는 그냥 나온다. 결국 그 아침 커피 한 잔을 스스로 거절한 유연하지 못함으로 그는 하루종일 커피 한 모금도 구경하지 못한다. 새 집으로 이사를 왔지만 니코의 마음은 짐 상자속에 꼭꼭 닫혀있다. 니코가 지금 웃을 수 없는 이유는 그의 모든 생각이 과거에 얽매여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결함과 불운을 대놓고 자조할 수 있을때 드디어 얻어지는 자유 같은거, 니코에게 커피 이상으로 필요한 것일거다.
이 벽화는 어디쯤이었을까. 이건 못보고 왔네. 찾아 가서 볼 날이 오겠지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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