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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Big night (1996)


학창 시절의 기억들은 아직 생생해서 20년이라고 해봐야 그다지 오래 전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데 이런 영화가 무려 23년 전 영화란 것을 인지하고 나면 시간이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는건지 멈칫하게 된다. 어떤 영화를 보고 가슴 속에 남는 감정들이 살아있는 사람과의 교감만큼 진하고 지속적이라는것에 항상 놀란다. 이 영화는 97년도에 영화 잡지의 시사회에서 보았다. 마치 레스토랑 메뉴판처럼 생긴 멋진 시사회 입장권을 나눠줬었는데 그런 것들을 좀 놔둘걸 하다가도 지금도 여전히 뭔가 지속적으로 버리며 조금 더 남겨둬야 할 것과 이제는 가슴에 새겨져서 버릴 수 있는것들을 구분하는 스스로를 보면  남겨둘걸 하는 생각을 하며 기억하게 되는 그 순간의 아쉬움이  추억의 가치라는 생각도 든다.

이 영화를 아주 여러 번 보았고 앞으로도 여러 번 볼거라는 것을 안다. 그곳에는 금새라도 말을 걸어 올 것 같은 친숙한 인물들이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탈리아 음식과 그 음식에 대한 이탈리아인 특유의 철학은 말할것도 없고 그 어떤 음식 영화보다 생기 넘치고 풍부하다. 하지만 단지 음식 영화는 아니다. 새로운 곳에 자리잡고 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본능적으로 지켜나가려고 하는 인격과 그럼에도 간과해서는 안되는 조화와 타협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를 다시 꺼내어 기억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사실 얼마 전에 보았던 <그린 북> 이라는 영화때문이었다. 차별받는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에 대한 묘사가 훨씬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이민자와 그들의 음식 이라는 소재에 빅 나이트보다 더 진솔하고 유쾌하게 접근한 영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 동부 바닷가 마을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사사껀껀 충돌하는 이탈리아인 형제 프리모와 세콘도가 있다. 형 프리모는 원칙적이고 자기 요리에 대한 철학이 확고하다. 미국인들이 원하는 미트볼 스파게티는 만들고 싶지 않다. 리조토를 주문하고 또 스파게티를 먹겠다는 손님을 이해할 수 없고 시든 바질을 사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식당 경영을 맡고 있는 동생 세콘도는 조금은 현실적이다. 형을 이해하면서도 식당 매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형의 까다로움에 질렸다. 장사만 된다면 피자에 햄버거라도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끌어다 쓸 수 있는 돈도 없고 은행도 대출을 거부한다. 그런데 동네에는 아주 성업중인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다. 호방하고 사업 수완 좋은 사장 파스칼의 방에는 레스토랑에 왔던 험프리 보가트의 사진이 걸려있다. '손님이 원하는 것을 먼저 주고 그 다음에 네가 원하는 것을 줘야한다'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그는 어쩌면 세콘도의 롤모델인지도 모른다. 파스칼은 유명한 뮤지션을 초대해줄테니 한 번 끝내주는 저녁 파티를 만들어보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세콘도는 계좌에 남은 돈을 탈탈 털어서 레스토랑의 사활이 걸린 마지막 파티를 준비한다.

프리모가 파티의 메인 음식으로 팀파노를 만들겠다고 하니 세콘도는 한사코 말린다. '형 제발 그것만은 포기해줘'. 그만큼 손이 많이 가고 지방색이 뚜렷한 음식이라서 미국인들이 많이 올지도 모를 파티에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을거다. 사진은 완성된 팀파노를 꺼내에서 만져보는 장면. 어떻게 자를까 고민하던 이들은 결국 통째로 홀로 가지고 나가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웨딩 케익을 자르듯 자른다. 집에 있는 이탈리아 요리책에는 Timbale 이라고 나오는데 같은 뜻인것 같다. 큰 북에서 유래한 이름인데 실제로 커다란 법랑 대야 속에 파스타 반죽을 넓게 늘어뜨려 깔고 그 속을 펜네 같은 짧은 파스타와 각종 야채, 고기 소스등으로 가득 채운 후 보자기 묶듯 파스타 반죽으로 덮어서 구워내는 것이다. 대야를 뒤집으면 거대한 케익 같은 팀파노가 나타나는데 그것을 파이 자르듯 잘라서 서빙한다. 영화에서는 팀파노에 집어 넣을 수제 펜네를 만드는 것부터 팀파노 완성까지 전부 묘사가 된다. 이 음식을 맛본 식당 주인 파스칼은 갑자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프리모의 멱살을 잡는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만들다니 죽어 마땅하다는 찬사의 표시였다. 나도 멱살 잡힐 만한 음식 만들어보고 싶네

파티에 모인 이들은 유명 뮤지션을 기다리지만 때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자 파티는 주인공 없이 진행된다. 삼색 리조토부터 시작해서 생선요리,팀파노, 디저트로 이어지는 길고 긴 코스. 하지만 새벽이 다 되어도 음악가는 나타나지 않는다. 애초부터 파스칼은 음악가는 초대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같은 이민자로써 형제들에게 마지막 열정을 쏟게 할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파스칼의 기지였던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자의 파티를 즐기는 동안 사람들 역시 음악가에 대해서는 잊는다. 세콘도는 속았다는 생각에 분하다. 하지만 항상 의기소침해있던 프리모는 하고 싶던 요리를 다 해냈다는 생각에서인지 오히려 평온해보인다.


파티가 끝나고 프리모는 그냥 로마로 돌아가 삼촌 식당에 가서 일하자고 동생에게 제안하고 그들은 그동안의 앙금들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모래 사장 위에서 한바탕 싸운다. 세콘도는 이탈리아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다. 그는 더 이상 남을 위해 일하고 싶지 않다. 프리모 역시 쉽사리 혼자 이탈리아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어쨌든 함께 떠나 온 그들 사이의 원칙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이 영화의 절정은 화려한 파티와 풍성한 음식의 향연이라기 보다는 한 바탕 싸우고 나서 한 잠 들었다가 아침이 될 무렵 모두가 다시 주방으로 모이는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분명 실패하고 고뇌하고 있고 그 어떤 확실한 결말도 보여주지 않은며 영화는 끝이 나지만 그들이 어떻게든 이겨내고 당당히 뿌리를 내리고 살았을것이다 상상하고 싶게 만드는 장면이기도 하다.


세콘도는 주방 조리대에 누워 자고 있는 조수 크리스티아누를 깨우고선 팬에 기름을 두르고 천천히 달걀을 깨기 시작한다. 소금 조금 집어 넣고 포크로 풀어서 무심하게 만들기 시작하는 프리타타. 그들은 바구니에 담겨 있는 빵을 손으로 잘라 말없이 먹기 시작한다. 뒤이어 들어온 프리모는 엉거주춤하게 서있다. 아침 인사를 하기도 화해의 말을 건내기도 애매하다. 세콘도는 형을 힐끗보고 말없이 팬에 남아 있는 오믈렛을 덜어준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고 미국적 사고방식과 최대한 타협하려는 세콘도이긴 하지만 때로는 프리모보다 더 쉽게 흥분하고 본능에 충실한 면모를 보인다. 흔히 말하는 세콘도의 그 이탈리아적 기질이 그가 누구보다도 프리모를 이해하고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에 안도하게 한다. 형제는 어깨 동무를 하고 아침을 먹기 시작한다. 눈치 빠른 주방 조수는 자리를 비켜준다. 달걀과 빵이면 된다. 프리타타든 오믈렛이든 달걀말이든 풀어놓은 달걀이든 반숙이든 완숙이든 미국이든 이탈리아든 한국에서든 어디에서나 누구나 먹는 음식, 별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음식.

새로운 세상에 이질감없이 융합되어 가는 과정이 분명 쉬운것은 아닐거다. 하지만 아침은 그래도 먹고 봐야한다는 오늘을 살아가겠다는 단순한 의지와 함께라면 사실 삶은 어디에서나 비슷할 것 같다. 그나저나 난 언제나 팀파노를 만들어 볼 의지가 생겨날까. 이탈리아인의 저녁식사에 초대받고 싶다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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